업
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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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하게 되는 일체의 모든 '행위' . 〔어 의〕 산스크리트어 'karman' 의 의역으로, 소리로 번역할 때는 갈마(羯磨)라고 한다. karman은 '하다' · '완수하다' · '만들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어근 'k' 에서 파생되어 '행위' · '활동' . '일' 등의 의미를 갖게 되었 다. 업설(業說)은 베다(Veda) 시대부터 시작해서 브라흐마나((Brāhmaṇa)와 우파니샤드(Upaniṣad) 및 요가(Yoga) 사상 등 힌두 전통 전반은 물론, 자이나교(Jainism)와 불교의 교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론으로, 이들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 적으로 업설이란, 인간의 행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주장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과 우주의 역사는 다름아닌 인간의 행위에 의해 서 결정된다는 것이 업설의 궁극적 주장이다. 〔종 류〕 일반적으로 업은 삼업(三業)이라 하여 세 가 지로 분류한다. 입을 제외한 모든 신체의 동작으로 하게 되는 행위를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행위를 구업(口 業) , 마음으로 하는 활동을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즉 어떠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 의업이 고, 그 의지가 신체적 활동과 언어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신업과 구업이다. 업은 행위의 동기가 선이나 악이냐에 따라서 선업 · 악 업 ·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어진다. 무기업은 선악 어 느 쪽으로도 분류될 수 없어서 윤리적으로 중성적인 행 위를 가리킨다. 또한 모든 업은 예외 없이 결과를 초래하 는데 초래된 업의 결과를 보(vipaka, 報), 즉 업보(業報) 혹은 과보(果報)라고 한다. 업의 과보는 금생(今生)에 곧장 나타나기도 하고 미래의 언젠가에 나타나기도 한다. 과보가 금생에 곧바로 초래되는 업을 순현업(順現 業)이라고 하고, 금생에 지은 업의 과보가 내생(來生)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내생 이후의 어느 때에 드러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고 한다. 이를 삼세 업보설(三世業報說)이라고도 한다. 업은 기본적으로 개 인적 단위의 개별 행위이며 결과이지만 공동체 단위의 단체 행위일 수도 있다. 개인적 단위의 업을 불공업(不 共業) 혹은 사업(私業)이라고 하고, 공동체 단위의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또 물질적 혹은 물리적으로 표 현되어 타인이 볼 수 있는 업을 표업(表業)이라 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타인이 알아볼 수 없는 업을 무표업 (無表業)이라고 한다. 〔법 칙〕 업설은 기본적으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 과가 있다는 '인과의 법칙' 위에서 성립한다. 또한 악한 행위에는 악한 업보가 따르고 선한 행위에는 선한 과보 가 따른다는 '윤리의 법칙' 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인 과성과 윤리성이라고 하는 이중 구조를 가짐으로써 결국 업설은 윤리적인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업의 결 과는 예외 없이 업의 주체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자업 자득(自業自得)의 법칙' 이라고 한다. 인과 법칙 : 업은 예외 없이 원인과 결과라는 원리에 따라 작용한다는 뜻이다. 업 즉 모든 행위는 실현되는 그 순간 그 자체로서 끝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하지 않고 업의 주체 속에 반드시 그 흔적을 남 긴다. 이는 향을 태우면 향은 타서 사라지지만 향기가 옷 에 배어들어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업이 남긴 이 흔 적을 업력(業力)이라고 하는데, 이 업력은 업의 주체 속 에 잠재적인 에너지로 남아 있다가 기회가 오면 과거에 지었던 업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 업력은 업 의 주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 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새 존재로 다 시 태어나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 현재의 모든 상황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지금 사람이 된 것은 과거에 사람이 될 업을 지었기 때문이며, 짐승이 된 것은 과거에 짐승이 될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업은 존재의 현 재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으면 사람으로 태어나 고 짐승으로 태어날 업을 지으면 짐승으로 태어난다. 현 존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육체적 조건이나 정신적 기질 또는 처하게 되는 환경까지도 그 존재가 과거에 지 은 업의 결과이다. 이 업의 인과 법칙은 "전생의 일을 알 고 싶은가? 금생에 받는 바를 보라. 내생의 일을 알고 싶 은가? 금생의 짓는 바를 보라"는 불교의 경전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업의 인과 법칙은 식물의 씨앗과 열매로 비유될 수 있 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전적으로 씨앗에 의해서 결정된다. 콩이라는 열 매는 콩이라는 씨앗의 결과이고 팥이라는 열매는 팥이라 는 씨앗의 결과이다. 같은 밭의 같은 조건에 심고 키우더 라도 하나는 콩이 되고 다른 하나는 팥이 되는 것은 전적 으로 콩이나 팥이라는 씨앗 때문이다. 콩을 심었는데 팥 이 열리거나 팥을 심었는데 콩이 열리는 법이 없는 것처 럼 업인(業因)에 따라 정해진 업과(業果)가 생겨난다. 업의 인과 법칙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은 업은 여하튼 반드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지은 업의 성격에 따 라서 순현업 · 순생업 · 순후업이 되기도 하지만, 언젠가 는 틀림없이 과보로 나타난다. "금생에 지은 악업의 과 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말라. 아직 그 열매가 익지 않았을 뿐이다. 금생에 지은 선업의 과보가 나타나 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지 말라. 아직 그 열매가 여물지 않 았을 뿐이다" 라는 경구에서 업과 과보의 인과 법칙에 대 한 불교 신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 업인은 반드시 업과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것이 업의 인과 법칙 이다. 윤리 법칙 : 업은 물리적인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윤 리적인 선악의 법칙이라는 뜻이다. 업이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의미는 선한 업에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업에는 악한 과보가 따른다는 뜻이다. 공을 발로 차서 앞 으로 튀어 나가게 하는 단순한 물리적인 행위의 인과 관 계를 두고 업의 법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열 걸 음을 걸어 나갔으면 뒤로 열 걸음을 물러나야 한다는 기 계적인 인과 법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행위가 원 인이 되어 그 결과를 초래하려면 반드시 윤리적 행위라 야만 한다. 즉 어떤 행위가 업이 되어 과보를 초래하려면 최소한 그 행위가 선악의 어느 쪽에 해당되어야만 한다 는 것이다.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니어서 윤리적으로 중성적인 업, 즉 무기업일 경우에는 과보가 초래되지 않 는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기업은 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보를 초래하는 행위만을 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업이란 업을 짓는 자신과 그 업의 대상이 되는 남에 게 모두 좋은 결과를 초래하여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행 위를 말하며, 악업이란 업을 짓는 자신이나 남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여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선업과 악업에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 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행위가 경우에 따라 선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악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열 가지 행위를 악업으로 정하여 엄 금하고 그 반대의 열 가지 행위를 선업이라 하여 적극적 으로 권면(勸勉)하는데 이를 십악업(十惡業)과 십선업 이라고 한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殺生〕, 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는 행위〔偸盜〕, 부정(不貞)한 성행위를 하는 일〔邪淫〕,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거짓으로 말하는 행위〔妄語〕, 서로 다른 말로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행위 〔兩舌〕, 험담 · 욕설 등으로 남을 해치는 행위〔惡口〕, 부 풀리고 꾸며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행위〔綺語〕, 남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貪欲〕, 자신 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瞋恚〕,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어리석고 잘못된 마음〔痴暗〕이 십악업이다. 또 모든 생명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살리는 행위〔放生〕, 자신의 소유와 노력을 남에게 베풀어 돕는 행위〔布施〕, 청정하고 온당한 성생활을 하는 일〔淨行, 혹 은 梵行〕,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 〔眞實語〕, 한결같은 말로써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합시 키는 행위〔和合語〕, 부드럽고 찬탄하는 말로써 남을 기 쁘게 하는 행위〔柔順語〕, 사실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 로 질박하고 올곧게 말하는 행위〔質直語〕, 자신의 노력 과 소유를 남에게 베풀어 도우려는 마음〔布施心〕, 고통 스럽고 욕된 일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마음〔忍辱心〕, 연기법(緣起法)으로 우주와 인간의 실상을 꿰뚫어 봄으 로써 이기적 집착심에서 벗어나는 마음〔智慧心〕이 십선 업이다. 십악업과 십선업 모두 앞의 세 가지 행위는 신업 에 해당하고, 중간의 네 가지 행위는 구업에, 뒤의 세 가 지 행위는 의업에 해당한다. 십악업은 그것들이 자신과 남을 모두 불행하게 만들 고, 십선업은 그것들이 자신이나 남을 모두 행복하게 만 든다. 악업을 쌓으면 나쁜 과보를 받고 선업을 쌓으면 좋 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업의 윤리 법칙이다. 그러나 선 업에는 반드시 좋은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필연적으로 나쁜 과보가 따른다는 업의 철저한 윤리 법칙에도 약간 의 융통성은 있다. 악한 업을 지어 나쁜 과보가 예상되더 라도 다시 많은 선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는 완화될 수 있 다. 불교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였 다. 소금을 아주 많이 넣어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짠물에 도 자꾸 맹물을 섞으면 나중에는 마실 수 있는 물이 되는 것처럼, 악업을 많이 지었더라도 선업을 자꾸 많이 지으 면 악업의 과보는 희석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물 속의 소금 농도가 낮아질 수는 있으나 아주 없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선업을 아무리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악업 의 결과를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의 윤리 법칙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업자득의 법칙 : 업의 자업자득 법칙이란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이 받는다”(自作自受)는 법칙이 다. 이는 업의 인과 과정에는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도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이 지은 악 업을 남이 대신 받거나 남이 지은 업을 자신이 대신 받을 수는 없다고 한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선 업의 결과를 남에게 전해 줄 수 없으며, 남이 원한다고 해서 그가 지은 악업의 결과를 내가 받을 수는 없다. 아 무리 사랑하는 부모 형제나 부부라 하더라도, 나의 선업 으로 그의 악업을 갚을 수 없고 그의 선업으로 나의 악업 을 갚을 수 없다. 이처럼 업의 자업자득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가혹하리 만큼 예외 없이 철저하게 엄격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불교의 업설에 따른다면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다. 깨달음을 성취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자신 이 지은 모든 악업을 소멸하고 그에 합당한 업을 지어야 만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력뿐 이다. 초기 불교의 업설에서는 부처마저도 자신이 지은 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남을 자유롭게 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가 대두되면서 공덕(功德)의 전이(轉 移) 사상이 등장함으로써 초기 불교의 자업자득의 법칙 에 예외를 인정하게 되었다. 대승 불교 신자들은 부처나 보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거듭되는 선업의 결과인 무한 한 공덕을 쌓은 위대한 존재들이라면 그 공덕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나 보살이 거 듭되는 선업으로 지은 무한한 공덕을불쌍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서원(誓願)하고, 중생들이 그 공덕을 나 누어 받기를 소망하면 공덕은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에 대한 불교 신자들의 믿음에 서 이러한 공덕의 전이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관세음보 살이나 아미타불은 그들이 지은 무한한 공덕을 원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퍼 내도 마르지 않는 바닷물처럼 그들의 무한한 공덕을 중 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업의 자업자득의 법칙에 예외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업〕 업은 철저하게 인과의 법칙을 따 르지만 업의 결과가 반드시 기계론적으로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같은 팥을 심었어도 토양 · 수분 · 햇빛 · 온도 등 생장 환 경에 따라 성실한 열매도 되고 부실한 열매도 된다. 같은 음식을 베풀더라도 짐승에게 주느냐 사람에게 주느냐에 따라서 공덕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인간의 의지이다. 불교에 따르면 우주에는 천상(天上) · 인간 · 축생(畜 生) · 아수라(阿修羅) · 아귀(餓鬼) · 지옥 등 여섯 종류 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천상 세계에는 고통은 없고 온갖 즐거움만 있다. 인간 세계에는 온갖 고통과 즐거움이 동 시에 존재한다. 인간 세계 이하 네 세계에는 즐거움은 없 고 단지 고통만 있다. 축생들은 천대(賤待)와 부림을 당 하다가 결국은 잡아먹힌다. 아수라들은 온갖 시기와 질 투로 얽혀 투쟁만 계속하는 고통을 당한다. 아귀는 굶주 림의 고통에서 헤매는 존재들이다. 지옥의 존재들에게는 온갖 방법으로 죽임의 징벌이 반복된다. 업설에 따르면 이들 중에서 인간만이 업을 지을 수 있 으며, 나머지 다섯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에서 지은 업을 소비하기만 한다. 즉, 다섯 세계는 인간 세계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받기만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업이란 선악 의 의지에 따라 실천하는 행위인데 인간만이 선악을 선 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천상 세계의 존재들 은 인간 세계에서 지었던 선업의 결과인 즐거움을 누리 느라고 의지를 가지고 다른 업을 지을 생각을 않는다. 인 간 아래의 네 세계의 존재들은 인간 세계에서 지었던 악 업의 결과인 고통을 받느라고 다른 업을 지을 겨를도 없 지만, 실제로 이들은 아예 의지를 갖지 못하는 존재들이 다. 예컨대 동물들의 행위는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 의지 에 따른 행동이 아니다. 의지가 게재되지 않은 행동은 윤 리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업설에서 가장 결정적 인 요소는 인간의 의지이다. "의지가 작용되지 않은 업은 보를 받지 않는다"(中阿含 卷3 思經). 의지와 무관하게 실천된 행위는 과보가 초래 되지 않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업설과 현대의 법 정신은 둘 다 동기 주의(動機主義)이다. 현대의 법은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인 경우 살인이 아니라 과실 치사로 간주하는데, 이는 사람을 죽일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의업을 사업(思業)이라고 하고, 신업과 구 업을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한다(中阿含 卷32 優婆離經). 이는 불교 이외의 교설들이 신업을 중시하는 데 비해 불 교는 의업, 즉 인간의 의지를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업설에서 의지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 하다. 왜냐하면 의지는 인류 역사의 변화와 발전의 원동 력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만일 의지라는 요소가 없다 면 업설은 완전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이론에 빠지고 만다. 업설에서 의지의 개입이 없다면 과거와 달라진 현 재나 현재와 달라진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 의지의 개입 이 없는 원인(행위)과 결과(업보)는 무한히 똑같은 반복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지라는 매개 변수가 없다면 역사의 변화와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선 의지에 따르는 선업에 의해 발전적 변화가 있고, 악 의지에 따르는 악업 에 의해 퇴행적 변화가 초래된다. 똑같은 씨앗에서 성실 한 열매가 맺기도 하고 부실한 열매가 맺기도 하는 것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는 등 의지에 따른 생장 환경의 조성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업설의 의의〕 업설에 나타나는 의의는 크게 세 가지 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합리적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 는 사회 윤리적 현상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에 서는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 어 불행에 빠지거나,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이 불행해지지 않고 도리어 행복을 누리는 윤리적 부조리를 수없이 경 험한다. 인간 세상의 이러한 부조리한 윤리적 현상을 운 명론자는 운명으로, 우연론자는 우연으로, 유신론자는 신의 뜻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업설은 업의 인과 법칙에 근거한 삼세 업보설로 설명한다. 둘째, 업설은 인간의 시 야를 현세적 한계를 초월하여 과거 · 현재 · 미래의 끝없 는 시간은 물론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무한한 우 주적 세계 속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의 영역을 확대한다는 점이다. 업설을 수용하는 인간은 현세에 국한되지 않고 무한히 확장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셋째, 업설은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을 인간의 의지에 둠으로써 현재의 바람직하지 않은 현실을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닫고 일어서 극복하라는 강 력한 의지적 인간상을 부각시킨다. 업설의 의의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를 요청하며, 그에 따 르는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요구하는 데 있다. 업설이 희망하는 인간은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인 것이다.
※ 참고문헌 Haridas Bhattacharyya, The Doctrine of Karma, VisvaBharati Quanterly 3, 1925~1926/ E. Conze, Buddhism : It's Essence and Development, New York, Harper and Row, 1992/ M. Eliade ed., 《ER》/J.N. Farquhar, Karma : Its Value as a Doctrine of Life, Hibert Joumal 20, 1921~1922/ Hall Rodney, The Law of Karma, Canberra, 1968/ J. Hastings ed., 《ERE》/ K.N.Jayatilleke, Survival and Kamma in Buddhist Perspective,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69/ P.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 A Historical Analysis, Univ. Press of Hawaii, 1976/ 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trans. by Sara Webb-Boin, 1988/ W.S.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Goreon Fraser, 1978/ E.J. Thomas,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New York, 1963/ H.C. Warren, Buddhism in Translation, New York, Atheneun, 1984/ 小口偉一 · 堀一郎 監修, 《宗 教學辭典》,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73. 〔尹永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