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
〔히〕אֱדוֹם · 〔라 · 영〕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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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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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하고 비탈진 산지로 이루어진 에돔 전경(왼쪽)과 그곳에 있는 고대 성읍의 폐허인 페트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땅과 민족의 이름. 요르단 동편에 있던 세 나라 중 구약성서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나라이다. 창세기 25장 25절에는 암몬과 함께 에 돔의 어원론적인 설명이 있고, 36장 31-39절에는 역사 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여덟 명의 에돔 왕 명단이 나 온다. 뿐만 아니라 출애급한 이스라엘에 땅의 통과를 허 용하지 않았다는 기사도 나온다(민수 20, 14-21). "에돔"은 구약성서에 100번 등장하며, 형용사 "에돔 의"(אדומי)는 12번 나온다. 에돔은 '붉음' (red)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히브리어의 '달레트' ( ד)와 '레스' (ר)의 형태가 비슷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에돔이 아람으 로 잘못 기록된 부분도 있다(2열왕 16, 6 : 2역대 20, 2). 따라서 이들 본문에서 아람(אֲרָם)은 에돔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에돔의 영토는 나할 제레드(Nahal Zered) 이남부터 아카바 만까지의 지역이며, 유다 왕국 말기에 아라바(Arabah) 서쪽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에돔은 거대하고 비탈진 산지이며, 단단한 사암으로 부식과 물이 스며들지 않는 지역으로 아름다운 절벽을 많이 형성하고 있다. 강수량이 충분한 지역에서는 '누비아 사암' (Nubian sandstone)에 함유된 구리 퇴적물로 인해 식물이 잘 자란다. 〔고고학적 발굴〕 에돔에 관한 기록은 구약성서 외에도 고고학적 발굴로 다양한 종류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에 돔은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 자료들은 직접적으로 '에돔' 이라는 표 현을 사용한 것과 '세일' 로 언급된 것이 있다. 전자의 예 로는 아나스타시 파피루스(Anastasi Papyrus)에 나오는 "에돔의 베두인"이라는 표현이다. 후자의 예로는 라므세 스 3세(기원전 1194~1163)의 기록에 나오는, 그가 "베두 인 부족들 가운데 세일 사람들을 멸망시켰다"라는 기록 이다. 또한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에서도 '세일'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일'과 '에돔' 이 같은 집단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베두인들에 대한 호칭으로서의 '샤수' (Shasu) 가 에돔 사람을 지칭하는 기록도 있다. 세티 1세(Seti I, 기원전 1302~1290)의 기록에 의하면 "샤수에 속한 적이 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투트모세 4세(Thutmoses IV, 기원 전 1400~1390)의 기록과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 기원전 1390~1353)의 기록, 라므세스 3세의 기록, 그리고 비교적 후대의 기록인 시샤크(Shishak)의 기록에서 '샤 수 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 로 할 때 이집트는 세티 1세 때부터 라므세스 3세 시대 까지 에돔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네겝 지역에 있 는 구리 광산을 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돔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기원전 13세 기 중엽 이후의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발 견물은 기원전 700~600년 사이의 것이었다. 따라서 에 돔이 이 기간 중에 가장 문화적으로 번성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호르바트 우자(Horvat Uza) 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 토 기 조각(ostraka) 하나와 16개의 에돔어로 기록된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카우쉬" 혹은 "코 스”(קוס)라는 에돔의 신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이 에돔어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기록의 발견으로 에돔이 유 다의 남쪽 지역을 정복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에 돔어로 된 인장 및 인장 각인도 많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카우쉬가브리(Qaushigabri)의 도장 각인이 움 엘-비아라(Umm el-Biyara)에서 발견되었으며, 텔 엘-케레이페(Tel el-Kheleifeh)에서도 기원전 6세 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돔의 도장 각인이 발견되었는 데, 여기에는 "왕의 종(신하) 카우쉬아넬리에게" (המלך לקוסענל עבד)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세이라(Buseirah)에서도 기원전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도장 각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왕의 종 말키바알에게" (המלך למלכל בע עבד)라고 기록되어 있다. 에돔에 관한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은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Ⅲ)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다. 이후 계속되는 팔레스티나 지방에 대한 아시리아 · 바빌론의 영향력 행사와 가나안의 군소 세력들의 메소포 타미아 세력에 대한 봉신(封臣, vassal) 관계 수립과 이에 따른 정기적인 조공 상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티글라 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Ⅲ, 기원전 747~727)의 기 록에는 에돔의 왕 '카우쉬말라쿠' (Kaushmalaku)의 이름 이, 산헤립(기원전 704~681)의 기록에서는 '아이아라무' (Aiarammu)의 이름이, 에사르하돈(Eartaddon, 기원전 680~ 669)과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기원전 668~627)의 기 록에는 '카우쉬가브리' 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 록을 통하여 에돔 왕의 명단을 만들 수 있다. 에돔에 관 한 성서의 기록은 창세기 25장 25절 이하부터 이스라 엘 · 유다의 멸망 때까지 요르단 동편의 다른 두 나라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최근 고고학의 발전으로 몇몇 에돔 지역에 대한 발굴 결과 모두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후의 도시로 밝혀졌다. 텔 엘-케레이페에는 기원전 735년 이후부터 에돔 사람 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움 엘-비아라에는 기원전 8세기 부터 정착이 시작된 뒤 기원전 7세기경부터 광범위한 지 역에서 거주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월란(Tawilan) 에서도 기원전 7세기 초의 주거층을 발견하였다. 또한 이 도시들과 부세이라에서 발견된 토기들은 독특한 특징 을 가지고 있다. 즉 채색되어 있고 무늬가 조각되어 있 다. 이들 토기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8~7세기의 것으 로 추정된다. 따라서 에돔의 문화적 · 정치적 황금 시기 가 기원전 8~7세기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기원전 8~7세기의 에돔 문화 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13세기경부 터 기원전 9~8세기까지의 문화 유물을 발견하지 못하 여 에돔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에는 제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에돔의 종교〕 구약성서에는 에돔의 국가 신인 '카우 쉬' 혹은 '코스' 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지만, 에돔어 나 아카드어 기록에는 카우쉬를 포함한 이름을 많이 발 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우쉬아넬리' 혹은 '카우쉬말 라쿠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호르바트 우자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에 기록된 에돔어를 통하여 '코스' 가 숭배되었 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구체 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간추린 역사〕 다윗-솔로몬 이전 시대의 어느 시기에 에돔이 정치적 공동체로 가나안에 등장하여 이스라엘 역 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성서 기록과 이집트의 기록 등을 통해서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정치적 공동체로 등장하였 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출애급하여 에 돔의 경계를 통과하는 문제를 놓고 한차례 마찰을 빚은 이후, 정착 당시에는 별다른 큰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왕정을 시작하면서 가나안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에돔과의 관계가 대립적 · 적대적 관계로 성서에 등장하고 있다. 사울은 요르단 동편의 세력을 점령하면서 에돔도 함께 영향권 아래에 두었다(1사무 14, 47). 다윗 시대에는 암 몬에 대한 정벌로 시작된 주변 세력에 대한 정벌 과정에 서 다윗은 사해 근처에서 18,000명의 에돔 사람을 죽이 고 수비대를 에돔에 설치하였으며, 에돔 사람들을 종으 로 삼았다(2사무 8, 13-14). 이러한 군사적 우위는 솔로 몬 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솔로몬 때에는 에돔 지역을 통과하여 아라비아 사막에 있는 스바(현재의 예멘 근처)의 여왕과 무역하였다(1열왕 10, 1 이하). 다윗 시대에 이스 라엘의 봉신국이 된 에돔은 이스라엘에 많은 조공을 바 친 것으로 추정된다(2사무 8, 14). 이처럼 버거운 조공의 부과는 솔로몬의 통치 말기에 에돔의 왕 하다드(Hadad) 가 솔로몬에게 반역한 사건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1열 왕 11, 14). 그러나 하다드의 반란 이후에도 에돔은 이스라엘에 대해 정치적 독립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분열 왕국 당시 에돔은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주로 요르단 서편의 유다와 정치적 · 외교적 관계를 가졌다. 왕 국 분열 이후 에돔을 포함한 요르단 동편의 세 나라에 대 한 정치적 독립의 계기는 이집트 왕 시샤크의 가나안 침 략 사건과 왕국 분열 이후 얼마 동안 지속된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잦은 군사적 마찰이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은 주변 세력에 관심을 쏟지 못 하였고, 이러한 기회를 틈타 에돔은 얼마 동안 정치적 독 립을 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 왕 여호 사밧(기원전 870~846)이 에돔을 재정복하는 기사(1열왕 22, 47)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기원전 9세기 중엽 에돔의 메사 왕 때에 에돔은 이스라엘 · 유다의 군사와 함께 모 압을 공격하였다(2열왕 3, 7 이하). 그러나 유다 왕 여호 람(기원전 848~841) 때 에돔은 유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2열왕 8, 20), 이때부터 에돔은 아마지야(기원 전 811~782)가 셀라(Sela)의 남쪽 지역을 부분적으로 재 정복하기까지(2열왕 14, 7) 60여 년 간 두 번째 정치적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2열왕 8, 20).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셀라는 움 엘-비아라로 밝혀졌는데, 기원전 7세기 중 엽에 파괴된 흔적만이 발견되어 아마지야의 에돔 정복에 대한 역사성은 회의적이다. 성서 기록에 의하면 아마지 야의 아들 우찌야(기원전 781~740) 때 유다는 엘랏 지역 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2열왕 14, 22). 그러나 기원전 735년경 에돔은 유다의 허약한 왕 아 하즈(기원전 735~716?) 때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을 뿐만 아니라(2열왕 16, 6) 유다를 공격하여 유다 사람들을 잡 아갔다(2역대 28, 17).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왕 베가 (기원전 735~732)와 아람 왕 르신의 연합군이 유다를 침 공하여 유다가 에돔의 정치적 독립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에돔은 유다에 대하여 계 속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다. 특히 732년경 아 시리아의 왕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가나안으로 진출 한 뒤부터 시작된 아시리아 제국의 영향으로, 에돔은 아 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종신국이 되어 최고의 민족적 진흥기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바빌론으로 세력이 교체 된 후에도 바빌론의 종신국이 되어 유다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 유다 왕 국 말기에 에돔이 유다의 남쪽 영토를 점령하였음을 추 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텔-아라드(Tel Arad) 남 쪽 10km에 있는 호르바트 키트미트(Horvat Qitmit)에서 에돔의 신인 코스가 숭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르바트 우자에서 발견된 코스 신을 숭배하는 내용이 기록된 토 기 조각으로 확인되었다. 에돔은 바빌론 군대의 예루살 렘 멸망 때 참가하여 유다의 멸망을 도왔던 것이다(시편 137, 7 : 예레 4, 21-22 : 스바 1, 10-16 등). 에돔은 이스라엘과 비슷한 시기에 정치적 집단으로 등장하였으므로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왕정을 형성한 후 세력을 요르단 동편까지 확장한 이후부터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에돔에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요르단 동편의 세 나라는 이스라엘의 왕정 형성 이후, 영토 확장을 계기로 적대적 경쟁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우위를 고수하며이들 세 나라는 이스라엘의 내적인 정치적 혼란이나, 외적인 침략으로 인하여 요르단 동편에 관심을 쏟을 수 없 을 때인 기원전 10세기 후반, 즉 왕국의 분열과 기원전 925/924년을 전후한 시샤크의 침공, 기원전 853년의 카르카르 전쟁 등으로 일시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 하여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때 아람은 유다와 이 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하여 요르단 동편의 나라들의 독립을 음양으로 도왔다. 따라서 에돔 · 암몬 · 모압의 정치적 운명은 아람 · 이스라엘 · 유다와의 세력 균형에 의하여 좌우되었으며, 이러한 독립의 기간은 50~60여 년으로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732년 티글라 트 필레세르의 가나안 침공 이후부터는 이스라엘과 유다로부터 계속적인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 세력의 영향 하에서 이들 세 나라는 민족적 중흥기 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J.R. Bartlett, Edom and the Edomites, Sheffield, 1989/ I.Beit-Arieh · B. Cresson, An Edomite Ostracon from Horvat Uza, Tel-Aviv 12, 1985, pp. 96~101/ H. Misgav, Two Notes on the Ostraca from Horvat Uza, 《IEJ》 40, 1990, pp. 215~217. 〔金永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