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도 (1003~1066)

〔라〕Edu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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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 에두아르도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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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 에두아르도 성인.

성인. 증거자. 영국의 왕(1042~1066) 앵글로 색슨족의 마지막 왕으로, 축일은 10월 13일. [생 애] 1003년 영국 옥스퍼드(Oxford) 주(州)의 이슬 립(Islip)에서 영국의 왕 에설레드 2세(Ethelred Ⅱ, 978~ 1016)와 노르망디의 대공 리샤르 1세(Richard I, 942~ 996)의 딸인 엠마(Emma)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용맹왕' 이라고 불린 에드먼드 2세(Edmund IIronside, 1016)와 이복 형제였는데, 에드먼드는 에설레드 2세의 첫째 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에두아르도의 어머 니 엠마는 에설레드 2세가 사망한 뒤 덴마크와 노르웨이 의 왕 크누트 2세(Knud Ⅱ , 1018~1035)와 재혼하여 후에 크누트 3세(1035~1042)가 된 하르데크누트(Handelmud)를 낳았다. 에두아르도는 10세까지 엘리(Ely) 수도원에서 자라다 가 덴마크의 침공 때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형제 알프레 드(Alfred)에게 가서 머물렀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역경 들 때문에 그는 세속적인 야망의 덧없음을 깨닫고 순결 한 삶을 살고자 하였으며, 미사 참례와 성사 생활에 열심 하였고, 수도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삼 았다. 1035년 크누트 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적자(嫡 子)가 아닌 해럴드 1세(Harold 1 Harefoot, 1035~1040)가 왕권을 탈취하였다. 당시 크누트 3세는 덴마크에 있었으 므로 주위 사람들은 에두아르도와 엘프레드에게 왕권을 되찾으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여 앨 프레드는 죽임을 당하고 에두아르도는 노르망디로 돌아 갔다. 1042년 크누트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에두아르 도는 왕위에 오르라는 부름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갔는 데, 덴마크에서는 그의 인자하고 거룩한 성품을 존경하 여 그의 즉위를 환영하였다. 에두아르도가 왕위에 오른 시기는 적대적 세력이 많고 민심은 분열되어 있던 때였다. 그런 속에서 그는 경건하 고 관대하고 야심이 없었으며 거의 수도자와 같은 생활 을 했으므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요청되는 거침없고 과감한 왕의 면모를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 람들은 그의 세속적이지 않고 자비로운 인품을 존경하였 다. 그는 많은 노르만의 수도자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그 중에서 주미에즈(Jumiegees) 대수도원의 아빠스인 로베르 (Robert)는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에두아르 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웨식스(Wessex) 출신 고드원(Earl Godwin, +1053) 백작의 딸 이디스(Edit)와 결 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디스와 결혼할 당시 자신은 정 결을 서약했으므로 자신과 오누이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겠다는 동의하에서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에두아르도는 성덕이 출중하였으며, 그의 통치로 국가 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오로지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 을 추구하였으며, 당시까지 지속되던 덴마크에 대한 악 명 높은 세금을 감면하고 왕실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 들과 수도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금을 내놓았다. '어진 성 에두아르도의 법' (Good St. Edward'sLaws)에 근거하여 이러한 일들을 단행하였으며, 후대 사람들도 억울한 일 을 당할 때는 이 법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 곤 하였다고 한다. 또 에두아르도는 영국 교회와 교황과 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1049년 교황 레오 9세(1049~ 1054)가 랭스(Reims)에서 개최한 교회 회의에 영국 교회 의 주교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자 출신의 주교 들이 주교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구 사제들의 양성을 권장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수도 생활의 가치를 격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에두아르 도는 616년경에 파괴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폐허 위에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을 재건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는 데, 이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한때 자기 재산의 10분 의 1을 바쳤으며, 여러 지방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리 고 베네딕도회의 관할권을 확대시켜 주었다. 1051년 12월 캔터베리의 대주교 로베르가 고드윈이 법을 어겼다고 선언하자, 고드윈이 이에 반발하여 분쟁 이 일어났다. 이 문제로 인하여 로베르는 영국을 떠났으 며, 에두아르도의 왕권도 적잖이 타격을 받았다. 1065 년 12월 28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내에 웅장한 로마 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봉헌되었는데, 이듬해 1월 4일(흑 은 5일)에 에두아르도가 사망하여 이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후대에도 영국 왕이나 여왕의 즉위식을 거행 하고, 그들이 죽은 후 묻히는 장소가 되었다. [영향과 공경] 에두아르도는 자신의 후계자로 노르망 디의 대공 기음(Guillaume le Conquerant, 1028?~1087)을 지목하였으나, 앵글로 색슨의 혈통을 우선시하여 1053 년에 고드윈이 사망한 후 뒤를 잇고 있던 그의 아들 해 럴드 2세(Harold II , 1066)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러 나 곧 기름이 해럴드 2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 여 월리엄 1세(1066~1087)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에두아르도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자처하면서, 국민들 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수도자들로 하여금 에두아 르도의 유해를 보존하도록 장려하였다. 에두아르도는 노르만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 후원이 그다지 광범위한 것은 아 니었다. 그는 사후에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에 대한 공경으로 여러 가지 기적을 경 험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에 대한 공 경이 널리 확산되지 않았던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었다. 1102년 그의 유해가 부패되지 않고 있음이 확인 되었다. 1138년 그의 시성이 시도되었으나, 교황 인노천시오 2세(1130~1143)는 결정을 늦추면서 웨스트민스 터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더 많은 자료를 모으라고 지 시하였다. 1160년에 헨리 2세(Henry Ⅱ, ,1154~1189가 강 력하게 시성을 다시 추진하였고, 이듬해 2월 7일 마침내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1181)에 의해 시성되었다. 중세 시대에 에두아르도는 영국의 성인들 중에서 가장 공경받는 성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중세 미술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였다. 헨리 7세(Henry Ⅶ, 1485~1509) 때에 등장한 바이외 벽걸이 융단(Bayeux tapestry)에 그려진 그의 모습이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 인노천시오 11세(1676~1689)는 10월 13일을 보편 교회에서 기념하는 성 에두아르도의 축일로 제정하였다. (→ 영국)

※ 참고문헌 H. Farmer, 5, PP. 180~181/ J. Dubois, O.S.B., 3, p. 1382/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m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159/ 《ODCC》, 532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p. 133~135.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