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데시데리우스 (1466/1469?~1536)
〔라〕Erasmus, Desid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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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인문주의의 왕자' 로 불리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이자 인문주의 자. '인문주의 왕자' 라고 불리는 그는 '인문주의' 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에라스무스는 중세 교회 의 권위와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원천적인 철학적 물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 아가는 것이 인간 존엄성을 확인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고전적 의미의 인문주의를 표방하였다. [생 애] 1466년 혹은 1469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Rotherdam) 혹은 호우다(Gouda)에서 로헤르(Rotger Gerrit)와 마르가리타(Margareta)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 다. 서자 출신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멍에처럼 따라 다녔던 그의 본래 이름은 헤르트 헤르츠(Geent Geertsz)였 으며, 에라스무스는 세례명이다. 호우다에서 초등 교육 을 받은 그는 1483년에 부모가 사망한 후, 후견인의 도 움으로 1487년 호우다 지방의 스테인(Steyn)에 있는 아 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훗 날 이때의 수도원 생활에 대해 많은 불만을 터뜨렸는데,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형제들이 고전 연구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이해해 주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 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수도원 도서관의 장서들을 통해 고전 연구에 몰두한 반면에, 수도 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 편이었다. 1492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캄브라이의 주교였던 베 르겐(Henry Bergen)으로부터 비서직을 제의받으면서 로 마 유학을 꿈꾸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대신 1495년에 파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할 기 회를 얻었지만, 대학이 침체되면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하 였다. 1499년 영국으로 간 그는 당시 영국 르네상스 지 도자들이었던 콜릿(John Colet, 1466~1519) · 모어(Thomas More, 1477~1535) · 피셔(John Fisher, 1469~1535)를 만났는 데, 그중에서 콜릿은 에라스무스에게 개혁을 위한 열망 을 갖고 성서에 근거하여 새롭게 신학에 접근하도록 하 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500년부터 1514년까지는 프랑스 · 이탈리아 · 영국 등을 여행하면서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1506년에 프 랑스 투랭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으로 돌아가 《우신 예찬》(Encomium Moriae, 1511)을 저술하였 다. 이 작품에서 그는 16세기 유럽 사회와 교회의 모든 제도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쇄신을 촉구하였다. 영국 에 있을 때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그리스어와 신학을 강 의하였는데 그의 명성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된 것도 바로 그 당시였다. 1514년에는 스위스 바젤에 머무르면서 저 술 활동에 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부르군디 왕국 황태 자의 지도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 황태자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V , 1519~1556)가 되었다. 1517년부터 1521년까지 루뱅에 머물면서 불가타 성 서의 개정된 본문을 포함시켜 신약성서를 그리스어로 출 판하였다. 그는 이 성서의 출판으로 루뱅 신학자들의 공 격을 받았고, 1521년에 바젤로 이주하였다. 이후 교회 의 신학자들과 루터파 양측 모두의 계속된 공격에 시달 리다 1524년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자유 의지 론》(De libero arbitrio)을 저술 · 출판하였다. 1536년 바젤 에서 사망하였다. [저 서] 에라스무스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술들은 당대 지성계를 강타한 역사적 산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그리스도교 군인 교본》 (Enchiridion Militus Christiani, 1503), 《금언록>(Proverbii, 1508), 《우신 예찬》, 《자유 의지론》, 교부학의 원조들인 치프리아노(Cypianus, +258), 암브로시오(Ambrsius, 3397~ 397), 이레네오(Irenaeus, 130~200),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 등 교부들에 관한 글들과 특히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 본문의 교정판(1514~1516) 및 번역본들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에라스무스의 저서들은 당대의 이성적 인본주의를 표 방한 걸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주 저인 《우신 예찬》은 더욱 그러하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작품은 당대인들의 태도와 습관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가 비웃듯이 칭송했던 우신(偶 神)들이란 금욕적인 삶을 하면서 헛된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의 우신과, 이단자들을 화형시키고 금서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진리와 덕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교 황과 사제들의 우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대해 교 회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때 그의 저서들이 금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사 상] 온건하면서도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에라 스무스는 명백하고 올바른 사고를 중시하였으며 관용적 이지 못한 태도와 계속되는 박해에 대해서는 증오감을 금치 못하였다. 누구보다도 당대 교회의 개혁을 열망하 였던 그는 교의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종교의 초월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강조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게 있어서 종교는 영원한 삶과 관련된 믿음의 체계나 천 상에 들 수 있는 방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윤리 혹은 사회적 행동과 직결된 문제였다. 이렇게 볼 때 그에게 있 어서 초자연적인 요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실적 삶 보다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 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나 칼뱅(Jean Calvin, 1509~1564)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교회 안에서 개혁을 원했던 사람들보다도 훨씬 앞 서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귀족주의적인 그의 태도는 믿음만을 고집하며 투쟁을 능사로 여긴 프로테스탄트적 특성과는 달리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결정적인 교 회 쇄신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종교 개혁과의 관계 :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무엇보다 도 교회의 성직자들과 르네상스적 교회 앞에서 조심스런 태도와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준 인물로 고발하고 있을 정도로, 그가 루터의 입장들을 이 미 앞서 취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역시도 많은 사제들과 신학자들이 예수의 단순한 복음을 왜곡시켰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를 해명하고자 신 약성서를 그리스어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와 교회 간의 날카로운 투쟁이 있은 다음 에라스무스는 더 이상 루터측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서, 비록 자발적이 아니라 동료들 의 설득에 의한 것이지만, 《자유 의지론》을 저술 · 출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회측에 가담한 것도 아니 었다. 그는 모호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단지 자기 자신에게 속하기만을 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에라 스무스는 교회 개혁의 뛰어난 기수로서 초기 프로테스탄 트 개혁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당시의 종교 개혁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으면서 교회 내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철학 사상 : 에라스무스는 형이상학과 물리학 그리고 변증론에 치중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과 중세 스콜 라학적 구조의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전통 철학의 형식들에 대해 《우신 예찬》에서 거의 능멸적인 언사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철학을 제시하고자 하 였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소크라데스(Soraites, 기원전 470/469~399)나 고대인들의 경우처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삶에 관한 지혜로운 지식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적 삶의 지혜이며 실천이어야만 한다. 그리스교도적 지혜는 복잡한 삼단 논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약간의 책으로 충분한 것인데, 그 책 들은 복음서들과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이다.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분이 재생이라고 칭하는 잘 창조된 본성으로의 복귀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은 "잘 창조된 본성으로의 복귀"인 재생함이다. 그런데 이교도들의 훌륭한 저서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 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철학의 대혁신이란 곧 "교회 권력과 스콜라주의자들의 논쟁이 혼란시키고 복잡하게 만든 복음적 진리의 단순성에 첨가된 그 모든 것을 제거 하는 일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통 해 가르친 길은 최고로 단순한 것이다. 즉 성실한 신앙과 위선적이지 않은 사랑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희 망이다. 위대한 성인들을 대할 때 그들이 진정한 복음적 인 가르침을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 것만을 찾 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삶의 양식은 수도 생활이 처음 시작될 때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원천으로 복귀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약성서의 교정판과 번역본을 출간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손에 들고 다니기를 바랐으며, 고 대 교부들에 관한 책을 펴내었다. 그가 시도한 철학의 재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인 작업이나 재능을 넘어선 정밀한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신학 사상 : 에라스무스는 뛰어난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정확하지 못한 사상과 오류들을 젊은 시절의 작품 들 안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종교 사상 즉 신학 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비판가들과 학자들을 피해 관조된 정통성을 고집하며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바리사이파를 경멸하고 그리 스도교 순수 영성을 사랑하며 수호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루터를 적대시하면서 복음의 온화함과 개혁가들의 투쟁적 기질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일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은총의 도움 없이 인간은 선(善)을 취할 수 없고 그 안에서 발전할 수도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연 구와 노력의 여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펠 라지우스(Pelagius)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루터적 필연성은 도덕적 가치들의 가능성을 압박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종으로 남게 하며 또 하느님을 잔인한 폭군이 되게끔 한다. 자유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에라스무스는 한 편으로는 복음과 교부 그리고 스콜라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주의(humanisimus)의 보편적 유산을 서로 합치시킴으로써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통한 참된 자유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 르네상스 ; 모어, 토마스 ; 인문주의)
※ 참고문헌 AA.VV., 《EF》 3, Epidem, Roma, 1979, pp. 169~170/E. Craig ed.,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3, Routledge, London, 1998, pp. 396~400/ The Catholic Encyclopedia.for School and Home, vol. 4, Grolier, New York, 1985, pp. 94~961 C. Augustin, Erasmus : His Life, Works and Influence, Univ. ofToronto, Toronto, 1991/ E. Ponzalli, Storia della Filosofia Occidentale, vol. 2, Borla, Roma, 1987/ G. Reale . A. Antiseri, Il Pensiero Occidentale dalle Origini ad Oggi, Edittrice La Scuola, Brescia, 1983. 〔金顯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