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영〕Est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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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북동부에 있는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은 에스토니아 공화국(Eesti Vabariik) 북쪽으로 핀란드 만, 동쪽으로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 라트비아, 서쪽으로 발트 해와접해 있으며, 본토와 8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45,227k㎡이고, 인구는 1,430,000명(1998)이며, 수도는 탈린(Tallinn)이다. 공용어는 에스토니아어이고, 국민은 에스토니아인과 러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인 · 벨로루시아인 · 핀란드인이 소수 존재한다. 국교는 없고, 프로테스탄트와 러시아 정교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에스토니아 교회 · 가톨릭 · 이슬람교 등이 신봉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에는 기원전부터 에스토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6~7세기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게르만인 · 슬라브인 · 노르만인의 침략을 받았다. 9세기 이후부터는 덴마크 · 스웨덴 ·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으며, 1346년에 덴마크 왕실이 발트 해의 섬들과 에스토니아 북부에 대한 주권을 리보니아(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 기사 수도회(Teutonic Knights)에 팔아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이 지역은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독일 기사 수도회가 해체되면서 에스토니아의 북부 지역은 스웨덴에, 리보니아는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 협정(Truce of Altmark)이 체결되면서 폴란드는 리보니아 대부분을 스웨덴에 양도했다. 1721년에는 북방 전쟁(1700~1721) 후 뉘스타드 조약(Peace of Nystad)에 따라 리보니아를 스웨덴으로부터 양도받은 러시아가 이 지역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쿠를란트로 분리하였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독립을 선포하였고, 1940년 7월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소련을 이루는 연방 공화국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시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다시 소련으로 넘어갔다. 1990년 3월 30일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이듬해 8월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복음의 역사〕 민족 대이동기 게르만인 · 슬라브인 ·노르만인들이 에스토니아 지역에 정착할 무렵, 독일인과 덴마크인은 가톨릭을, 러시아인은 러시아 정교회를 전파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두 종교간의 충돌이 군사적 · 정치적 이해 관계를 수반하면서 되풀이되었다. 12세기 중반부터는 뤼베크와 브레멘에서 온 독일 상인들이 드비나 강 어귀 주변 지역에서 상권을 장악하자 독일인들이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뒤 1202년에 리가(Riga)의 주교 알베르트 1세(Albert I , 1165~1229)가 리보니아 지역에 대한 교회의 기득권을 지키고, 지역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강제 개종시키기 위해 '칼의 기사 수도회' (Knights of Sword)를 설립하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리보니아 교회는 교황청 직속이 되었으나, 주교와 기사단은 교황청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개종된 지역들을 임의대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칼의 기사 수도회는 1217년경 드비나 강 북쪽에 있던 이웃 라트비아 부족들과 남부 에스토니아를 정복하면서 이 지역을 점차 그리스도교화시켰다. 그러나 1223년경부터 이교도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이교도와 개종자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질책을 받게 되었다. 1237년 이 수도회는 '독일 기사수도회' 와 통합됨으로써 독일 기사 수도회의 한 지부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독일 상인들이 이주하여 도시를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칼의 기사 수도회는에스토니아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419년 입법 의회가 결성됨으로써 기사단과 봉신들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단합되지 못하였고, 주교나 자치 도시 시민들과도 자주 충돌하였다.
독일 기사 수도회와 에스토니아 주교들 또한 서로간의 불신과 상충된 이해 관계로 계속 대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전국에 걸쳐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는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가톨릭은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어 갔다. 30년 전쟁(1618~1648)을 계기로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와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스웨덴이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결과 스웨덴이 승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1721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1917년까지는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독립 이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1924년에는 최초로 교구장 서리가 탈린에 파견되었다. 소련에 합병되었던 1940~1991년 동안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는 소련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독립 이후에는 신학 이론과 가톨릭 교육을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99년 교황청과 에스토니아 정부는 주교 임명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합의점에 도달하였다.
1998년 현재 가톨릭 신자는 4,000여 명이고, 본당 5개에, 교구장 서리 1, 사제 9(교구 소속 5, 수도회 소속 4),수녀 17명이 있다. (→ 기사 수도회)
※ 참고문헌  B.J. Comaskey, 《NCE》 5, pp. 558~560/ 《EB》8, pp. 733~737/ 2001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317/ Annua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 《EU》 Les Chiffres du Monde, pp. 209~210.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