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세비오, 니코메디아의 (?~341/342)

〔그〕Eusebius Nicomedi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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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초 아리우스파의 지도자. 아리우스가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단죄받았을 때 피신시켜 주고 보호해 주는 등 아리우스(Arius, 256?~336)의 오랜 친구였다. 뿐만 아니라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 논쟁에서 아리우스파를 선두 지원하였다.
〔생애 및 활동〕 안티오키아 학파의 창시자인 루치아노(Lucianus, +312)의 지도를 받으며 아리우스와 함께 공부한 에우세비오는 베리투스(Berytus)의 주교가 되었고, 318년 이전에는 니코메디아의 주교가 되었다. 니코메디아는 당시 황제의 궁전이 있던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는 리치니우스(Licinius, 308~324) 황제의 처이자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동생인 콘스탄시아 황후의 비호 아래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교가 된 것이다. 아리우스가 니코메디아로 피신해 오자 에우세비오는 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Alexander, 250?~328?) 총대주교에 대항해 그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아리우스에게 내려진 처분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아시아와 동방 교회의 여러 주교들에게 편지를 썼고, 알렉산데르 총대주교에게는 아리우스에게내려진 단죄와 면직을 취소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325년 5월에 개최된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성자에 관한 자신의 '신조' 를 제출하였으나, 그 신조가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에 의해 거부되자 니체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앙 정식에 일단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공의회에서의 단죄를 모면하고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에 대항하는 데 앞장서기 위해 일보 후퇴한 것에 불과하였다. 사실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보다 더 극단적이었으며, 그의 반격 역시 맹렬하였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의 극단적인 태도 때문에 공의회가 끝난 지 3개월 후에 에우세비오를 갈리아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미망인이 된 콘스탄시아 황후의 간청에 못 이겨 3년 후인 328년에 그를 다시 불러들여 복직시켰다. 에우세비오는 콘스탄틴ㅡ 대제에게 호감을 얻은 뒤,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파 주역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즉 329년 말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Eustathius, +337?) 총대주교를, 335년에는 티로 교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295?~373) 총대주교를, 이듬해에는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us, +375)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리고 337년 새로이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us Ⅱ, 337~340)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황제의 장례식을 거행해 주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동쪽 부분을 차지한 콘스탄스(Constans, 337~350) 치세 초기인 338년 말에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를 면직시키고 대신 가빠도기아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45)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아타나시오는 로마로 피신하여 교황 율리오 1세(337~352)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자 에우세비오는 교황에게 티로 교회 회의에서 내려진 아타나시오의 단죄와 그레고리우스의 선출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교황은 교회 안에서 일치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교회 회의를 구상하였지만 성사시킬 수는 없었다. 에우세비오는 교황의 편지를 받지 못한 채 341년 말 혹은 342년에 사망하였다.
〔작품 및 평가〕 에우세비오의 저서는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른 문헌들을 통해 <티로의 바울리노에게 보낸 서간>, <아리우스에게 보낸 서간>, <아타나시오에게 보낸 서간>, <니체아 공의회의 주교들에게 보낸 서간> 등 4개의 서간 단편들이 전해 온다.
에우세비오는 신학자이기보다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서, 사실 세속적인 일들에 매우 능숙하였고, 야심이 많았으며, 어떠한 음모도 자행하는 인물이었다. 아리우스주의는 이집트 교회 안에서 발생하여 그 안에서 무마될 수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술수 때문에 교회 전체에 확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참고문헌  H. Leclercq, Histoire des Conciles I , Paris, 1907, pp. 639~647/ G. Bardy, Recherches sur Lucien d'Antioche et son école, Paris,1936/ P. Noutin, Note critique sur la lettre d' Eusébe de Nichomedie à Paulin de Tyr, 《VigChr》 17, 1973, pp. 24~27/ G. Luibheid, The Arianism of Eusebius of Nicomedia, 《IThQ》43, 1976, pp. 3~23. 〔李瀅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