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베르첼리의 주교.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한 인물. 축일은 8월 2일.
〔생 애〕 3세기 말 혹은 4세기 초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에서 교육받던 중 훗날 교황이 된 리베리오(352~366)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를 알게 되었다. 로마에서 독서직을 받은 후 340년 혹은 345년 2월 15일에 교황 율리오 1세(337~352)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베르철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사도로서 강론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토리노의 주교 막시모(MaximusTaurinensis, +470)는 에우세비오를 현명한 목자요 지칠 줄 모르는 유능한 설교가라고 전하였다.
베르철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교구의 모든 성직자들과 함께 기도 · 노동 · 연구 · 고행 등의 공동 규칙을 지키며 수도 생활을 한 그는, 이 때문에 의전 사제단(Canonicus re-gularius)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는 에우세비오가 주교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수도 생활을 한 서방 교회의 첫 주교였다고 기록하였다(<서간> 63). 에우세비오는 사제직을 열망하는 이들을 받아들여 원로 수도자로부터 교육을 받게하였으며, 그 역시 개인적으로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자 수도원 외에 누이인 에우세비아(Eusebia)의 도움을 받아 베르철리에 수녀원을 창립하였다. 371년 8월 1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테오네스토(Theonestus) 순교자의 무덤 위에 자신이 건축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주교직 수행 및 교회사적인 배경〕 353년 아를(Arles) 교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의 단죄를 결의하자, 교황 리베리오는 이듬해 에우세비오에게 칼리아리(Cagliari)의 루치페로(Luciferus, +370/371?)와 함께 아를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를 방문하여 아리우스주의와 가톨릭 정통 신앙 사이의 논쟁점을 해결할 새 교회 회의의 소집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아리우스주의 지지자였던 황제는 서방에서도 아리우스주의가 확산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355년 봄 밀라노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많지 않은 주교들, 그것도 대다수가 서방의 주교들이 참석한 이 교회 회의를 통해 황제는 다시 아타나시오를 단죄하기를 원하였다. 무르시아(Murcia)의 주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도움을 받은 황제는 참석한 주교들에게 아타나시오 단죄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강력하게 반대한 에우세비오는 그 해 팔레스티나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로 유배되어 360년까지 친아리우스파 주교인 파트로필루스(Patrophilus)의 밑에 있게 되었다. 이후 가빠도기아(Cappadocia)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집트의 테베로 보내졌다. 이렇게 이동되는 동안 에우세비오는 당시 교회가 분열되어 있던 안티오키아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고, 테베에서는 스페인 엘비라(Elvira)의 주교인 그레고리오에게 니체아 신경에 충실함을 칭송하는 편지를 썼다.
361년 콘스탄스(Constans, 337~350) 황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율리아누스(Julianus, 361~363)는 유배된 모든 주교들이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자유를 되찾은 에우세비오는 알렉산드리아로 가 아타나시오와 함께 362년 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라비아 · 리비아 · 이집트에서 온 2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이 교회 회의에서 니체아 신앙을 복원하고, 성령의 신성과 육화의 신비를 부정하는 이단에 맞서 싸우는 문제와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루피노(Rufinus Tyrannius, 345~410)가 '증거자들의 회의' 라고 일컬은 이 교회 회의의 결정 사항들은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낸 교의 서한》(Tomus ad Antiochenos)에 남아 있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한 에우세비오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자, 안티오키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동방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가톨릭 정통 신앙을 설파하였다. 363년 봄 이탈리아로 돌아온 에우세비오는 리베리오 교황에게 자신의 선교 활동을 보고한 뒤, 8년 간 비웠던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갔다. 이후 사목 활동을 재개한 그는, 자신의 교구 내에 여러 공동체를 건설하였으며, 인근 도시를 방문하고 일리리쿰(Illyricum) 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탈리아 주교들을 모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 엠브룬(Embrun)을 방문하여 이 도시의 주교로 임명된 마르첼리노(Marcellinus Ebredunensis, +374)의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는 등 토르토나(Tortona)의 주교 선거와 토리노, 그리고 피에몬테 지방의 다른 도시의 주교 선거를장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성 할라리오(Hilarius, 315~368)와 함께 아리우스주의에 물든 밀라노의 주교들에 반대하여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반아리우스주의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 서〕 현재 에우세비오가 쓴 세 통의 편지가 전해지는데,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Ad Constanti-um Augustum)와 <이탈리아 시민들과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Ad Presbyteros et plebem Italiae), 그리고 <스페인 엘비라의 주교 그레고리오에게 보낸 편지>(Ad Gregorium epis-copum Spanensem) 등이다. 또한 베르첼리 주교좌 성당 도서관에 있는 고대 라틴어 복음 사본인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 codex a)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는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 96항에서, 에우세비오가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가 저술한 《시편 주해》(In psalmos commentarios)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고 적고 있으나, 현재 이 번역본들은 전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친저성이 의심되나 그의 작품들로 간주되는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아타나시오 신경>(Symbolum Athanasianum ; Symbolum Quicumque), 가(假)아타나시오(Pseudo-Athana-sius)의 《삼위 일체론》(De Trinitate) , 《삼위 일체에 대한 고백》(De Sancta trinitate confessio) , 《성 암브로시오 주교가 신입 교우들에게 행한 신경에 대한 권고》(Exortatio sancti Ambrosii episcopi ad neophytos de Symbolo) 등이 그것이다.
〔공 경〕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에는 에우세비오의 축일이 8월 1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는 1969년까지 12월 15일을 그의 축일로 지냈는데, 이 날짜는 그의 주교 성성일에서 기인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순교자로 공경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다가 겪었던 수난 때문이었다. (→ 리베리오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참고문헌 《ODCC》, p. 575/E. Crovella, Bibliotheca Sanctorum V , pp. 263~270/L. Dattrino, 《DPAC》 1, p. 1300/ J.LL. Davies, A Dictionary of Christian Biography, ed. by H. Wace · W.C. Piercy, Massachusetts, 1994, pp. 343~344/ D. Farmer, 《ODS》, pp. 170~171/ P. Godet, 《DTC》 5, pp.1553~1554/ S. Gennaro, 《EC》 5, pp. 858~859. 〔邊宗燦〕
에우세비오, 베르첼리의 (?~371)
〔라〕Eusebius Vercell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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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