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아의 주교.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사가. '교회사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생 애〕 260~265년경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며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185?~254)가 세운 도서관과 학교가 있는 이 도시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아가피오(Agapius)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스승은 오리제네스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명망 높던 팜필로(Pamphilos, +310)였다. 에우세비오는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자신을 '자유인이 된 노예' 라고 자칭하며, 자신을 '팜필로의 에우세비오' (Εὐσέβιος τοῦΠαμφιλον)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는 팜필로가 순교한 갈레리우스(Galerius, 305~311) 황제의 박해 기간 동안 티로(Tiro)와 이집트 테베 사막으로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그곳에서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311년 밀라노 관용령으로 팔레스티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313년경 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의 발생 초기부터 논쟁에 휩쓸린 그는 아리우스주의의 극단적인 내용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동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리우스주의가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us)와 유사하다고 생각한 그는, 성부의 본질과 동일한 본체의 성자라는 '동질론' (ὁμοούσιος)에 반대하여 아리우스(Arius, 256?~336)의 가르침을 단죄한 정식 문안에 동의하기를 거부하였다가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로부터 325년에 파문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본심과는 다르게 그를 대단히 신임하였던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뜻에 따라 그 해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단죄와 신앙 고백서에 형식적으로 서명하면서 복권되었다.
니체아 공의회에서 우발적인 태도를 보인 에우세비오는 교리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었다.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 우호적으로 접촉했으며,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시오(Eustathius, +337?),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us, +375) 등 니체아 신앙을 옹호하는 주교들을 파면하려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Nicomediae, ?~341/342)에게 동조했다. 자신을 매우 신임하는 콘스탄틴 대제를 위하여 에우세비오는 박해에 종지부를 찍은 대제의 출현이 대망의 '구원의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헌신적으로 섬기며 여러 번 송사(頌辭)를 바치기도 하였다.
〔저서 및 사상〕 역사에 관한 저서들 : 에우세비오는 박해 시대에도 학문 연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서 가능한 한 순교 및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한 모든 소식을 많이 수집하였다. 303년 이전에 편집된 《연대기》(Χρονικοί)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은 갈대아인 · 아시리아인 · 히브리인 · 이집트인 · 그리스인, 로마인 등 저명한 고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요약이다. 둘째 부분에는 아브라함의 탄생(기원전 2016~2015)부터 서기 303년까지 성서의 역사와 세속 역사의 중요한 사실에 관한 간단한 언급과 함께 병행 형식의 공관표(共觀表)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의 호교적인 의도는 거룩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병립시켜 그리스도교의 준비 과정인 유대교의 고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그리스도교가 결코 신흥 종교가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의 증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공경할 만한 종교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역사의 최종 시기를 열었고, 그 최종 시기가 교회의 역사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특성을 지닌 역사적인 서술이라기보다 오히려 자료집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책은 그 안에 인용되어 있는 수많은 문서들과,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초대 교회의 작품들에 대한 단편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에우세비오의 세밀한 비판적 방법론과 언어학적 감수성은 그의 선대 저술가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리스어로 쓰여진 《연대기》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약간의 단편들과 발췌본들이 남아 있다.
보다 중요한 역사적 저술은 교회 창립부터 324년 리치니우스(Licinius, +324)와의 전쟁에서 콘스탄틴 대제의 승리와 그의 치하에서 제국의 일치까지를 다룬 10권으로 된 《교회사》(Εκκλησιαστική ιστορία)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요약된 기록과 초기 교회 문헌에 대한 방대한 논제들을 편집하였으며, 초기 교회 때 중요한 공동체 주교들의 명단과 교부들 및 저자들과 이단자들에 대하여, 히브리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순교자들과 그리스도교의 최후 승리를 입증하려 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책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이전에 몇 년 동안 모두 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사》는 교회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창설되어 세속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최후의 승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함을 설명하려는 다분히 호교적인 목표를 두고 집필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호교론이 합법적인 명백한 증거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의 이러한 호교론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는 여러 가지 결점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없었다면 초기 교회 주교들의 명단과 순교자들 및 이단자들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이 누락되었을 것이므로, 이는 재론할 여지없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예를 들면 《교회사》에서 28명의 교황 즉위 연대를 동 시대 황제의 연대와 관련시켰는데, 베드로가 25년 간 로마의 주교로 재임했다는 사실도 에우세비오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또한 목격 증언에 의하여 팔레스티나 지방 순교자들에 대해 쓴 <팔레스티나의 순교자들>이라는 그의 논문에는 303~311년 사이의 모든 박해 상황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팔레스티나 지방 박해의 역사와 순교자의 숫자에 대한 자료가 전해지게 되었다.
에우세비오는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틴 대제가 사망한 직후 그를 찬양하는 《콘스탄틴의 생애》(De Vita Cons-tantini)를 저술하였는데, 현재까지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서 콘스탄틴 대제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모든 저명한 인사들의 모범인 경건한 신앙인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후세의 학자간에 여러 가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에우세비오에게 있어서 콘스탄틴 대제는 하느님이 원수들을 타파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친구'요 '새로운 모세' 로 부각되었다. 《콘스탄틴의 생애》나송사(頌辭)에서 그는 대제의 제국을 지상에서 하느님 지배의 모상(模像)으로 생각하였고, 대제는 하느님의 대리인 · 하느님의 모상 ·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이념을 창안하였다. 이 이념이 바탕이 되어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보는 동방 교회의 전통이 생겨났으며, 러시아에서도 1917년 혁명 때까지 이러한 전통이 존속되었다. 네 권으로 된 《콘스탄틴의 생애》는 정통성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되는 논란이 계속되어 재확인 과정을 거쳤지만, 오늘날 정통성을 인정하는 더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 전기는 콘스탄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 채 긍정적인 면만을 과장된 찬사 일변도의 내용으로 쓰여졌다고 평가된다. 《콘스탄틴의 생애》 필사본에 <성도들의 모임에서 행한 콘스탄틴 대제의 담화>가 첨부되었는데, 이 부분은 간혹 제5권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콘스탄틴의 생애》 제4권에 첨부된 것이다. 이 글은 전쟁에서 콘스탄틴 대제가 자기에게 승리를 안겨 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이는 데 초점을 맞춘 일종의 호교론이다. 이 '담화' 다음에 나오는 <콘스탄틴에 대한 찬미>에서는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황제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콘스탄틴의 생애》에서는 콘스탄틴 대제를 그 이상적인 황제상에 적합한 인물로소개하고 있다.
호교서들 : 에우세비오의 대부분의 저서들은 호교론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 가운데 어떤 저서들은 더욱 뚜렷하게 호교론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10권으로 된 《일반적 원리에 대한 개론》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예언적 목가(牧歌), 라는 제목으로 6권부터 9권까지 전해진다. 이 네 권의 책에는 구약성서의 메시아 예언에 대한 이야기와 본질적인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공격에 대한 대답으로 신플라톤 학파의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233~304/305)와 히에로클레스(Hierocles)의 저서를 논박하였다. 본래 25권인 《포르피리오 논박》은 약간의 단편으로만 남아 있고, 원본과 두 권으로 된 《논박과 변호》라는 저서도 모두 분실되었다. 에우세비오가 팜필로와 함께 편찬한 6권으로 된 《오리제네스를 위한 호교론》은 팜필로가 순교한 후에 제6권이 덧붙여졌으나, 현재 루피노(Rufinus Tyrannius, 345~410)가 출간한 제1권만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호교론 작품은 312~320년 사이에 쓰여져 테오도투스(Theodotus Laodicae)에게 헌정된 《복음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와 《복음의 증명》(Demonstratio evangelica)일 것이다. 15권으로 된 《복음의 준비》 전편에서 그는 유다인들에게 계시된 종교가 이방인들의 종교보다 분명히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데, 모두 원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복음의 증명》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보다 우수하며 계시 종교로서 탁월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의 증명》을 포함하고 있는 20권의 책 가운데 제1~10권과 제15권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복음의 증명》에서 그리스도인은 대부분이 세상에서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데 참여하며, 하느님은 이 교회를 보호하고 이 교회로 하여금 하느님 백성의 빛으로서 승리하도록 역사한다는 역사관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교회사》를 저술하였다.
에우세비오는 《복음의 증명》의 남아 있는 열 권의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왜곡하였다고 비난하는 유다인들에 대해 응답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에서 성취되는 것처럼 성조(聖祖)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사이에 모세 법이과도기와 같은 잠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복음의 준비》와 《복음의 증명》은 의도적으로 한편은 이 교인들에게, 다른 한편은 유다인들을 겨냥하여 쓴 글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러서》라는 포르피리오스의 글에 대한 논박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였다. 에우세비오의 생애 말기에 대중적이고 수사학적으로 쓰여진 다섯권으로 된 《신현》(神顯, Theophania)의 원본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으며, 완본으로는 시리아어 번역본이 있다. 이는 이미 저술된 호교론의 두 저서에서 이용하였던 자료들을 재정리하면서 피조물과 우주의 보존, 인간의 양심 , 강생을 통한 말씀의 현현(顯現)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성서와 주석에 관한 저서들 : 에우세비오는 전문적인 주석이라고 볼 수 있는 박학하고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에 관한 작품에 열중하였으며, 팜필로와 함께 신구약 성서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네 부분으로 구성된 지리적이고 성서 지형학적인 광범한 논증이 그리스어본과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가 번역한 라틴어본의 넷째 부분에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유명한 책은 《고유 명사론》 혹은 성서에서 언급된 장소들에 대한 저서이다. 카르피아노(Carpiano)에게 헌정된 《복음적 기준들》은 각 표마다 병행 비교 목록이 포함된 10개의 표를 만들어 4복음서의 공관표를 제공하였다.
아주 폭 넓게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복음적인 문제와 해결》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년기와 관련하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복음서의 내용들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졌고,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차이점들이 설명되었다. 주석서에 있어서 에우세비오는 오리제네스의 체계에 의존하였다. 그 밖에 에우세비오의 《시편 주해》도 빼놓을 수 없는 역작이다. 교의적 저서들 : 에우세비오는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어떤 논제에 한해서는 오리제네스에게 의존한 것으로 평가된다. 초기의 교의 논쟁에 있어서 중도의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였던 그는, 니체아 신경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니체아 신경을 지지하는이들 특히 아타나시오와 안치라의 마르첼로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2권으로 된 《마르첼로 논박》(Contra Mar-cellum)과 336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3권으로 된 《교회 신학에 대해서》(De ecclesiastica theologia)에서그는 마르첼로를 공박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에우세비오가 늘 염려한 것은 사벨리우스주의였음이 드러난다.
에우세비오의 교의적인 사상은 본질적으로 오리제네스적이며 중용적이다. 정통파인 성부와 성자와의 '동질론 을 배척하는 동시에 아리우스주의도 배척하며 아타나시오 신학을 '사벨리우스주의' 라고 비난하였다. 삼위 일체론에 있어서 비록 에우세비오가 교리의 극단적인 내용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교리적 어떤 요소들은 아리우스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창조된 성자의 종속성 교리에 있어서 삼위의 위계적인 개념을 수용하며,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을 부정하면서 반아리우스파들의 교의적인 노선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평 가〕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오리제네스를 제외하고 연구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학식으로 그리스 교회의 모든 교부들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 대인들이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에우세비오는 항상 황제의 정책에 충성하고 추종한 주교로 여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교회사가 부르크하르트(Jakob Burkhardt, 1818~1897)는 에우세비오를 기본적으로 부정직하고 불의한 고대의 첫 역사가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황제 추종적인 태도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참혹한 박해를 체험한 이후 예기치 않게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황제로부터 공개적으로 호의적인 종교로 받아들여진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왜 에우세비오가 콘스탄틴 대제를 거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부각시켰으며, 그의 제국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상을 보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수 있게 할 것이다. (→ 교회사학 ; 아리우스주의 )
※ 참고문헌 K. Bihlmeyer · H. Tüichle, Church History I , Newman Press, 1966/ C. Curti, 《DPAC》 I pp. 1285~1293/ R. Farina, L'Impero eL'Imperatore cristiano in Eusebio Cesarea, Pas Verlas, 1966/ A. Flich · V.Martin ed., Storia della Chiesa, Ⅲ -1, Torino, 1972/ H. Jedin ed., History of the Church Ⅱ , New York, 1980/ J. Quasten, Patrologia II , trad. N. Beghin, Marietti, 1973/ M. Simonetti, Profilo storico dell esegesi patristica, Roma,1981/ ―, La Crisi ariana nel IV secolo, Roma, 1975/ Eusebio di Cesarea, Storia Ecclesiastica e I Martiri della Palestina, trad. G. Del Ton, Roma, 1964(에우세비오, 《교회사》, 성요셉출판사, 1985)/ H.F. von Campen-hausen, 김 광식 역, 《희랍 교부 연구》,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金喜中〕
에우세비오, 체사레아의 (260/265?~339)
〔라〕Eusebius Caesar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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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