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황(654~657).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us)을 단죄한 인물. 축일은 6월 2일.
〔시대적 상황〕 에우제니오 1세가 654년 8월 10일 교황으로 즉위하던 당시의 교회는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문제로 각종 종교적 논쟁과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둘러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와의 대립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두 교회 사이의 일치를 어렵게 만들고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1세의 선임 교황들은 동방 교회 내에 만연된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us)과 그리스도 단의설 혹은 단활설(單活說, monenergis-mus)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칼체돈 공의회(451)의 결정 사항과 가르침을 전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그리스도 단성설의 수용을 통해 제국의 일치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세르지우스(Sergius, 610~638)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제국 교회와 화합시키고자 그리스도 양성(兩性)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는 양성의 결합 대신 의지의 결합을 주장하였는데, 즉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실제로 단지 하나의 신인적 힘과 하나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그리스도 단의설 주장은 사실상 그리스도 단성설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당시 아랍의 위협을 받고 있던 황제 헤라클리우스(610~641)는 이러한 주장이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수용 ·확산되자 이를 기회로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당시 교황으로 재임하고 있었지만 동방 교회의 신학에는 그리 밝지 못했던 교황 호노리오 1세(625~638)는 그리스도의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그리스도 단의설적인 세르지우스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한 각종 반박문들이 제출되면서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교황 에우제니오 1세의 선임 교황이었던 마르티노 1세(649~653)가 콘스탄스 2세(641~668)의 명령을 받은 군대의 추격을 피해 낙소스(Naxos)로 피신하였다가 654년 9월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1세는 갖은 모욕을 당한 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바오로(641~653)의 간청으로 사형을 면하고 크리미아(Crimea)의 케르소네소(Chersone-sus)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중에 에우제니오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생애 및 활동〕 교황 에우제니오 1세는 로마의 귀족이었던 루피니아노(Rufinianus)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출생 연도와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낙소스에 피신해 있을 무렵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로마의 성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후임 교황의 선출은 정당하지 않으며 대부제나 대사제 등 고위 성직자들이 자신의 부재 기간 중 자신을 대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마르티노 1세의 사임을 종용하는 동시에 교회법에 근거하여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희망하는 콘스탄스 2세의 강요에 직면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 단의설자인 교황을 맞이하기 보다는 그 논의를 반박할 교황의 선출을 갈망하였다. 결국 에우제니오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마르티노 1세는 그의 선출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교황이 모든 이단들의 확산을 방지해 주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즉위한 지 1년 후인 655년 9월 마르티노 1세 교황이 사망하자 에우제니오 1세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1세는 즉위한 직후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플로 특사를 파견하여 그리스도 단의설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베드로를 인정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다. 한편 그 시기에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 수도원의 원장이자 신학자였던 막시모(Maximus Confessor, 580~662)는 그리스도단의설을 내세우는 이단의 확산에 대해 저항하다가 콘스탄스 2세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였으며 재판을 받게 되었다. 막시모는 재판관들 앞에서 그리스도 단의설에 관한 논의를 포기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교황이 그러한 논의에 대해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비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재판관들은 그에게 교황 특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으며, 교황은 그 특사들을 통해 그리스도 단의설에 관한 논의를 수용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막시모는 아무런 동조자들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막시모는 "내가 추구하고 있는 규칙은 성령의 규칙이다. 그 성령은 만약 교황들이나 천사들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신앙과 다른 신앙을 믿는다면 사도의 입을 통해 그들을 파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교리에 대한 확신을 거듭 강조하였다. 결국 그는 도시 한복판에서 채찍질과 혀와 오른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교황 에우제니오 1세는 콘스탄스 2세의 음모에 대해 반대하면서 황제가 선임 교황에게 저질렀던 행위를 유럽의 각 왕실에 알렸다. 이렇게 교황은 선임 교황들처럼 콘스탄스 2세에게 저항하였으며, 베드로 총대주교의 서한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의지가 있다는 모호한 표현을 거부하며 그 주장을 공적으로 단죄하였다. 이에 콘스탄스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교황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마침 아랍인들의 침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밖에도 교황은 모든 성직자들이 순결을 준수해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외의 교황 활동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교황 에우제니오 1세는 657년 6월 2일에 사망하여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후대 로마의 성직자들은 확실히 그곳에 교황의 유해가 매장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반면에 포르투갈의 수도자들은 그의 유해가 그의 출신 지역으로 이장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그리스도 단의설 ; 마르티노 1세 ; 막시모 콘페소르)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pp.153~155/ Gaston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ürich, Fraumunster, 1944, pp. 103~104/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1996, p. 75/ C.M. Aherne, 《NCE》 5, p. 624/ H. Marot, 《DHGE》 15, p. 1346/P. Burchi, 《BSS》 5, p. 194/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邊琪燦〕
에우제니오 1세 (?~657)
〔라〕Eugeni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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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에우제니오 1세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