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1431~1447). 본래의 이름은 가브리엘레 콘둘마로(Gabriele Condulmaro).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바젤 공의회(1431)를 개최한 인물.
〔생애와 활동〕 1383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의 조카이며,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던 수도자였다. 그리고 1408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 교황 즉위 전까지 안코나(Ancona)와 볼로냐(Bologna)를 관할하였다. 선임 교황이었던 마르티노 5세(1417~1431)가 사망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모인 선거인단은 교황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즉 선거인단은 향후 발표될 모든 교황의 교서에 "추기경들의 동의를 통하여" 라는 문구를 삽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자신들의 승인 없이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나아가 교회가 소유한 모든 재산이나 수입을 자신들에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결정된 뒤 에우제니오 4세가 1431년 3월 11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문제에 동의하였던 그는, 교황이 되자 자신의 기존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주요한 도시 국가들에 파견된 대사들을 소집하여 내전을 종식시킬 해결책을 제시하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모든 제후들을 파문시키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고 있던 비스콘티(Filippo-Maria Visconti, 1392~1447)는 교황의 이러한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시에나 왕국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소집하였다. 나아가 그는 만약 교황이 베네치아와 피렌체 왕국을 원조할 경우 로마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와 같이 전쟁이라는 외적인 문제와 더불어 또 다른 내적인 문제가 제기되면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즉 로마인들은 밀라노와의 충돌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점을 내세워 교황에게 불쾌감을 표시하였으며, 그들이 겪은 각종 재난의 원인을 교황에게 전가시키려고까지 하였다. 특히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선임 교황이 사망한 날에 일식이 있었으며, 에우제니오 4세가 착좌식 직후 개최한 최초의 공식 회의에서 대성전의 회랑들이 붕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깔렸다고 하면서 이는 "일개 서자가 교황의 직위에 올라선 것에 대해 하느님이 불쾌감을 표명하는 것" 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콜론나(Colonna) 가문을 중심으로 교황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졌으나, 실행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고, 주동자들은 간신히 로마를 탈출하였다. 교황은 이 음모에 가담한 한 수도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사형 과정을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교황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반역 기도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의도와는 달리 로마인들의 저항은 더 거세어졌으며, 교황은 독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계속된 살해 음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반대자들은 교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확실한 움직임이 나타난 곳은 1431년 7월 23일에 소집된 바젤 공의회였다. 교황은 체사리니(Juliano Cesarini) 추기경을 의장으로 임명하여 공의회를 개막하게 했으나, 참석한 주교 혹은 수도원 원장은 14명에 불과하였다. 이 공의회를 교회 일치를 위한 회의로 선포한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채택된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 원칙을 폐기하였으며, 나아가 이 공의회의 목적은 교회를 개혁하고 후스파(Hussites) 문제를 처리하며, 선임 교황의 뜻을 이어받아 동방 교회와의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하여 교황과 공의회 참석자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첫 번째 회기부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교황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면서 공의회 우위설을 강조하였으며,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등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또한 교부들은 교황을 참석시켜 해명을 요구하려 하였고, 교회의 최고 재판소인 동시에 최고 행정부로 자처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 해 12월 18일 자신이 직접 공의회를 주재하기 위해 회의 장소를 볼로냐로 옮길 것을 명령하였으나, 교부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지기스문트(Sigismund, 1410~1437)의 지원을 받아 바젤에서 공의회를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교황은 공의회에 교서를 내려 자신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칙령들과 절차들 혹은 소환들은 무효라고 표명하였지만, 급진적 공의회주의자들의 행동을 염려하여 적극적인 반박은 하지 않았다. 교부들은 교황에게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하여 교황이 교회의 유일한 합법적 권력인 공의회에 대하여 의무를 태만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 대사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나아가 만약 교황청이 내린 모든 칙령들과 교서들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교황을 퇴임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추기경들, 그리고 밀라노의 비스콘티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 교황은 일시적으로 교부들의 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스콘티의 사위였던 스포르자(Francesco I Sforza, 1401~1466)가 군대를 동원하여 교황령 내로 진격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교황은 즉각적으로 밀라노를 파문하고 스포르자의 군대에 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결국 교황은 시민들의 난동을 피해 피렌체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은 피렌체에 있는 동안 바젤의 교부들과 지기스문트 황제에게 밀라노와의 전쟁에 개입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비스콘티와 로마인들에게는 평화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의 여왕 잔느 2세(JeanneII , 1414~1435)의 지원을 얻어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도울 수 있었으나, 잔느 2세가 사망하자 교황은 나폴리의 제후들에게 새로운 군주의 선출을 권유하면서, 레카나티(Recanati)의 주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비텔레스키(J. Vitteleschi)를 파견하여 나폴리 왕국의 재산을 소유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나폴리의 제후들은 교황 대사를 거부하고 앙주의 르네(René d' Anjou, 1409~1480)에게 국왕 등극을 요청하였다. 이에 바로 자신의 영지를 떠날 수 없었던 르네를 대신하여 나폴리에 도착한 부인 이사벨(Isabelle)이 무질서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사이 나폴리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밀라노 공작과 나바르(Navarre) 왕 및 아라곤(Aragon) 왕자들이 나폴리를 공격하였다. 비스콘티는 아라곤 왕에게 나폴리의 지배권을 양도하였으며, 르네와 그를 지지하는 교황에 반대하면서 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젤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각종 칙령들을 발표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가 1274년에 반포한 교황 선출에 관한 규정을 의무화할 것을 표명하였다. 또한 교부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구스(Joannes Ⅶ Paleologus, 1390/1399~1448)의 사절들과 회담을 갖기도하였는데, 그들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해 서방 국가의 왕들이 군대를 파견한다면 서방 교회와 일치하겠다고 하자, 즉시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플을 얻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군대 소집에 반대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이 회담에 참석할 수 있도록 공의회 장소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공의회 교부들은 대사를 파견하여 이 문제를 교황과 의논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장소를 변경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공의회를 계속할 것이며, 공의회의 모든 결정 사항들은 자신의 동의를 받아 발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부들은 교황의 제안을 거부하고 회의를 그대로 지속하기로 결정한 다음, 동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대사를 보내 바젤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으면 약속하였던 군대 파견을 취소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교황은 1437년 12월 30일에 공의회를 페라라(Ferara)로 옮겨 속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급진적 공의회주의자들은 1449년까지 바젤에 남아 독자적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교황은 페라라 공의회를 자신이 직접 주재함으로써 모든 칙령들을 통제하고 다른 적대자들과의 화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라곤의 알퐁스 5세(Alphonse V , 1396~1458)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이사벨과 교황 대사를 축출하였으며 나아가 교황에 대항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칙서를 반포하여 나폴리, 시칠리아 및 아라곤의 모든 주교들에게 바젤에 모여 교황을 심판할 것을 촉구하였다. 교부들은 교황이 성직 매매를 부추기고 사치를 조장했으며, 교황청의 성직자들 역시 그리스도교적인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고 비난하면서, 모든 추기경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권고하였다. 결국 교황이 부재중 재판을 열어 페라라 공의회를 강력하게 비난한 교부들은 교황의 퇴임을 결정하고 1439년 11월 5일 사부아(Savoie)의 공작이었던 아마데우스(Amadeus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가 펠릭스 5세(1439~1449)이다. 이는 교회 역사상 마지막 이교였다. 하지만 점점 지위가 확고해진 교황 에우제니오 4세 앞에서 바젤 공의회와 대립 교황은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1449년에 펠릭스 5세는 퇴임하였으며, 동시에 교회 내에서 급진적인 공의회 우위설 역시 종식되었다.
한편 1439년 페스트의 창궐로 공의회는 피렌체로 옮겨 속개되었다. 여기에서 교황과 동로마 제국 황제 사이에 연옥, 성령의 발출(processio), 로마 교회의 수위권 및 성체성사에 관련된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7월 5일 일치 교령 <레텐투르 첼리>(Laetentur coeli)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 콥트, 시리아, 갈대아, 키프로스의 마론파는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교황이 이 합의를 위해 수많은 돈을 지불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 진위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 황제가 동방으로 돌아간 후 두 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문은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또한 동방 교회가 기대하였던 군사 원조가 이루어지지 않자 일치는 무효화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교황에 대한 비난 역시 커져 갔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47년 2월 23일 사망하였다.
〔평 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로마 제국 황제와의 회의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원칙, 즉 신앙이 동일하면 예식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의회 우위설을 차단하고 교회의 전통적인 규정을 변경할 수 없게 만든 공로 역시 인정받고 있다.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수도 규칙을 바탕으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던 그는, 빈민들에 대한 자선 활동과 교회의 쇄신을 위해 활동하는 수도원을 적극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 바젤 공의회)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pp.199~214/ Gaston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iirich, Fraumunster, 1944, pp. 293~305/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241~243/ J. Gill, 《NCE》 5, pp. 626~627/ P. Paschini, 《EC》 5, pp.802~804/ P. de Vooght, 《DHGE》 15, pp. 1355~1359/ A. Franzen, 최석우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邊琪燦〕
에우제니오 4세 (1383~1447)
〔라〕Eugenius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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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에우제니오 4세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