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키엘서

〔라〕Prophetia Ezechielis · 〔영〕Book of Ezek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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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란에서 발견된 에제키엘서 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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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란에서 발견된 에제키엘서 단편 .

구약성서에 속한 예언서 중 하나로, 대예언서에 속한다. 예언자 에제키엘(יְחֶזְקֵאל)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언들을 전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활동 시기와 장소〕 에제키엘은 "제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1 1)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삼십년"이 어떤 햇수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유다 왕국의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이 종교 개혁을 실시한 해(기원전 621)를 기준으로 하였다든가, 신바빌로니아 왕국 느부갓네살(기원전 604~562)의 재위 기간이라는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크게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어서 "여호야긴 임금의 유배 제오년"(1,2)이라는 또 다른 연대가 언급되어 있다. 본디 1절의 말만으로 충분한데, 이 예언서의 형성 과정에서 어떤 말마디가 빠졌기 때문에 2절에 새 연대를 첨가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리제네스(?~254) 때부터 "삼십"이 에제키엘의 나이를 가리킨다는 추측이 제시되었다. 이 전통적인 추정이 맞을 경우, 에제키엘은 25세(기원전 597)에 바빌론으로 끌려가(2열왕 24, 14-16)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593년부터 572년경까지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이 유배 햇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시간 기준이다(8, 1 : 26, 1 : 30, 20 등과 특히 40, 1 참조). 그러나 이 유배는 서막에 불과하다. 조국의 멸망, 이 제1차 유배보다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데, 에제키엘은 그것들을 예고해야 한다.
에제키엘은 유배 제5년에 "유배자들과 함께 그발강 가에 있었다. 그때 ··· 환시를" 보았다(1, 1). 이 강은 바빌론 남부의 유프라테스 강 수로 가운데 하나이다. 에제키엘을 비롯한 유다인들은 "텔아비브" 라는 마을에 배치되어 (3, 15), 이 수로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특히 1-24장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유배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바빌론 유배살이가 틀을 이루지만, 속으로는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또 장차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관심의 초점이다. 그렇지만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의 거리가 멀어 단기간에 오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유배자는 장소를 쉽게 옮길 수도 없다. 이로써 에제키엘의 활동 장소가 문제로 떠오른다.
먼저 에제키엘이 바빌론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는 가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이를 수정한 이른바 '두 활동지(活動地) 가설' 이 등장하였다. 예언자가 초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후기에는 바빌론에서(또는 역순으로), 혹은 두 곳을 오가며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가설이 다양하게 제기되지만, 많은 학자들은 에제키엘서 본문 내용에 따른 전통적 설명을 여전히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에제키엘은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다(3, 11). 그들은 한 곳에 살면서 정해진 작업을 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 에제키엘은 원로들이 모일 정도의 집도 소유하고 있었다(8, 1). 유다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유배살이가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예레 29, 5-7). 유배자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조국을 간절히 그리워한다(시편 137편). 그런데 고국은 지금 격동에 휩싸여 있다.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서로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에제키엘은 현재의 유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운명이 고국과 동족을 기다리고 있음을 내다본다. 그래서 그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배자들의 관심의 초점인 예루살렘에 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 왕국의 운명적인 시간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약하였다. 예레미야는 유배자들에게 서신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고(예레 29장), 에제키엘도 편지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예언하였다.
〔역사적 배경〕 당시 근동의 패자(覇者)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이었다. 그는 기원전 605년 왕자의 신분으로, 전 근동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르그미스 전 투에서 경쟁국 이집트의 파라오인 느고(기원전 610~595)를 쳐부순 적이 있다. 그런데 느고가 609년에 자기에게 대항하다 전사한 요시야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린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은(2열왕 23, 29. 34), 예언자까지 죽이면서 자기의 안락과 호사만 좇는 이기주의자였으며(예레 22, 13-17 : 26, 20-23) 국제 정치도 옳게 판단하지 못하는 우둔한 군주였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기원전 601년 대제국에 반기를 드는 무모한 짓을 한다(2열왕 4, 1). 유다가 자그마한 왕국이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로서는 그러한 저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이웃 나라들을 시켜 유다를 침공하게 한다. 그 와중에 여호야킴이 전사하고 여호야긴(기원전 598~597)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기원전 598~597년 느부갓네살이 직접 공격해 들어가자 여호야긴은 투항한다(2열왕 24, 12). 예루살렘을 함락한 적군은 왕궁과 성전의 기물들을 빼앗아 간다. 또 임금과 모후와 왕비들을 비롯하여 지도층 인사들도 많이 끌어 갔는데, 에제키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새 지배 계급으로 부상한 자들은 우유부단한 시드키야 임금(기원전 597~587)을 끼고 반바빌로니아-친이집트 정책을 편다. 이집트의 사주 속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예레미야만 이런 정치적, 특히 종교적 오판과 광신적 민족주의에 맞서 고군 분투한다(예레 27장). 그러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다 왕국은 끝내 바빌로니아에 다시 반기를 든다. 결국 기원전 587년 8월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왕자들은 처형되고 임금은 눈이 뽑힌 채 귀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으며 궁궐과 성전은 약탈된다. 유다 왕국이 멸망한 것이다. 그리고 성전은 잿더미로 변한다. 하느님에게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악의 충격과 불행이 닥친 것이다(2열왕 25, 1-21).
〔예언자 에제키엘〕 에제키엘은 이 사건을 전후로 20여 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서는 48개 장으로 이루어진 긴 책이면서도, 그 개인에 관한 내용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에제키엘은 "부지" 라는 사제의 아들이다(1, 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사제' 가 에제키엘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는 혼인도하고, 자기 집에 원로들을 모아 놓고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8, 1 : 20, 1).
그런데 에제키엘서를 보면 그가 매우 독특한 예언자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신비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는, 환시들을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 홀경에 빠진다(1, 1. 4-28 : 3, 10-15 ; 37, 1-10 등). 많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나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집에 앉아 있으면서 환시 속에 예루살렘을돌아다니기도 한다(8장). 이런 특이한 현상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으로는 에제키엘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 없다.
에제키엘은 하느님과 동족에 대하여 열정을 지닌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동시에 냉철하게 심사숙고하고 자기의 생각을 엄격한 논리에 따라 전개시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였다.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성전과 그 의식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40장 이하), 민족의 역사와 전통도 자기의 독창적 역사관을 내세울 정도로 깊이 알고 있었다(16장 · 20장 · 23장 참조) .
그는 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나 동화 같은 것을 과감히 받아들여 자기의 가르침에 적용시키는 개방된 신학자였다. '버려진 아기' 동화라든가(16장), '원초적 인간' 에 관한 신화(28, 12-19), '거대한 나무' 에 관한 신화(31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계 정세(25-32장)는 물론,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티로의 교역 내용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27, 12-25). 또한 조선 기술도 거침없이 서술할 수 있는 폭 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27, 3-11).
이러한 박식함은 예언자의 사명 수행에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유다인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국제적으로 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스라엘은 '반항의 집안' 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듯, 에제키엘의 청중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다(2, 3). 그래서 그들을 회개시키려고(18, 30) 예언자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하였을 뿐더러,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그 구성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려는 노력이었다.
사실 에제키엘은 사목자였다. 그는 "파수꾼" 으로 세워졌다(3, 16-21 : 33, 1-9). 파수꾼은 성안에 있는 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주변을 살피고, 작은 위험이라도 닥쳐오면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 준비를 갖추고 재난을 막거나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언자 파수꾼 은 외부의 위험만 알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개별적으로 해야 한다. 누가 이 파수꾼에게서 경고를 듣지 못한 탓으로 죽으면, 파수꾼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하느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악인에게는 악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이 파수꾼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과 죽음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사목자인 것이다.
이 점이 에제키엘을 그 이전의 예언자들과 구분 짓게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공동체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부르짖으며 또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의 시대는 기존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때였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종교 · 정치 ·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더욱이 민족 전체가 불행에 빠지면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18장). 그래서 예언자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각 구성원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예언자상도 바뀐 것이다. 에제키엘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달라진 예언직에 과감히 투신한다. 어떤 면에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그는 주저 없이 말씀의 선포에 모든 것을 바친다.
교회에서는 에제키엘을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으며, 축일은 4월 10일이다.
〔에제키엘서의 형성과 구성〕 에제키엘서는 1장 3절을 빼고 화자(話者)가 계속 예언자 자신으로 되어 있다. 에제키엘이 늘 1인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언자가 이 책의 말씀을 전부 선포하거나 기록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자기가 선포한 말씀과 자기가 본 환시와 자기가 한 행동 등을 사후(事後)에 기록해 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현재 예언서의 많은 부분을 직접 기록하고 연대나 내용에 따라 일정한 구조 속에 배치한다. 그리하여 에제키엘서가 다른 어떤 예언서보다도 계획성과 일관성을 더 갖추게 된다. 그러나 추후에 에제키엘의 제자들이 첨가한 부분들도 적지 않다. 어떤 것들이 그러한지 밝혀 내는 작업은 복잡할 뿐만 아니라 항상 명료하지도 않다. 편집 또는 수정 작업이 몇 차례, 또 마지막 손질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의 답은 가설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전개된다.
도입부 : 1-3장
1장 : 환시
2-3장 : 소명
I . 예루살렘 멸망 이전-심판 예고 : 4-24장
4-5장 : 상징 행동
6장 :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7장 : 이스라엘의 종말
8-11장 :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환시
12장 :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상징 행동
13장 : 거짓 예언자들
14장 : 우상 숭배자들
15장 : 예루살렘-쓸모 없는 포도나무
16장 : 예루살렘의 역사-부정한 아내의 역사
17장 : 불충한 임금
18장 : 하느님의 정의와 개인의 책임
19장 : 임금들의 죽음
20장 :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
21장 : 주님의 징벌
22장 :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
23장 :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두 음녀의 죄와 심판
24, 1-14 : 예루살렘 공략
24, 15-27 : 아내의 죽음과 그 의미
II .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고 : 25-32장
25, 1-7 : 암몬
25, 8-11 : 모압
25, 12-14 : 에돔
25, 15-17 : 불레셋
26장 : 티로
27장 : 티로를 위한 애가
28, 1-10 : 티로 임금
28, 11-19 : 티로 임금을 위한 애가
28, 20-24 : 시돈
28, 25-26 : 간주곡-이스라엘의 복구
29장 : 파라오와 이집트
30장 : 이집트
31장 : 파라오
32장 : 파라오를 위한 애가
Ⅲ . 예루살렘 멸망 이후-구원 예고 : 33-48장
33, 1-20 : 예언자- 파수꾼
33, 21-33 : 예루살렘의 함락
34장 : 이스라엘의 목자
35장 : 에돔에 내리는 심판
36장 :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
37, 1-14 : 이스라엘의 부활에 관한 환시
37, 15-28 : 남북 왕국의 통일
38, 1-39, 20 : 마곡과 그 임금 곡
39, 21-29 : 이스라엘의 구원
40-48장 : 미래의 새 공동체
이렇게 도입부를 빼고 세 단계로 이루어진 에제키엘서는 전체적으로 첫째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 곧 심판의 예고에서 약속의 예언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 전환점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비할 데 없이 슬픈 사건이다. 이는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지평이 열림을 뜻한다. 이웃 민족들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 비극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유다 왕국에 불행을 끼치고 슬픔에 빠진 유다인들을 두고 기뻐하는 민족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다.
〔에제키엘서의 신학〕 에제키엘서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이 예언자를 매우 빈번히 부르신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아니라, 90여 차례에 걸쳐 그냥 "벤-아담" (בֵּן־אָדָם, 사람의 아들)이라고만 부르신다. "아담"은 흙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간의 무상함과 나약함을 상기시킨다(창세 2. 7). 에제키엘은 바로 약하고 덧없는 "아담"의 대표자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과 소명을 받는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지존하고 지엄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 인간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시 는 분으로밖에 여겨질 수 없다. 사실 예언자는 영광스러운 하느님 현존의 한 면을 접하고서는 힘없이 땅바닥에쓰러지고 만다(1, 28).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마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존엄성을, 에제키엘은 자주 되풀이되는 "주님(또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특별한 표현으로 나타낸다. 예루살렘 성전 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자리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건물에 묶이실 수 없다는 생각에서(1열왕 8, 27), 성전을 그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불렀다(1열왕 8, 29). 에제키엘은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가 성소를 "주님 영광의 자리"라고 말한다(10, 18 등). 하느님의 현존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근접할 수 없는 지엄한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지존하심은 에제키엘이 자기가 본 환시를 말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1장). 이 환시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갑갑한 느낌까지 줄 수 있는 이른바 '근접 서술' 로 이루어져 있다. 곧 '무엇이다' 라고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상징과 더불어 '같은 것' , '···과 같다' , '···는 것 같다' , '모습' , '생김새' , '형상' 과 같은 표현으로 빗대어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언어로 드러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그 실체는 고사하고 그 현존이 발하는 영광조차 제대로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지존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지엄하신 하느님은 인간적인 그 어떤 것으로도 제약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한된다고 생 각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성전에 관한 노래조차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부정(不淨)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바빌론 땅(시편 137편)에 나타나신다(1장). 이스라엘 의 하느님은 어떤 땅에도, 어떤 집단에도, 어떤 규정에도 얽매이지 않으신 지존하고 자유로우신 분인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듯 인간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이 초월적이며 초현세적인 위엄을 지니셨으면서도, 사람들 가운데에 계시고 싶어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접근을 배제하
는 영광을 지니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당신에게 끌어들이시고 그들 사이에 머무르시려는 확고한 뜻을 지니신 분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판단할 때, 서로 융합할 수 없을 듯한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지니신 하느님의 신비이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하고 무상하면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자기에게서 밀어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역겨운 짓들"을 저지름으로써, 자신들 가운데 머무르시 려는 그분을 당신 성전에서 멀어지게 하였다(8, 6). 결국 하느님의 영광은, 더 이상 그분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온갖 부정과 불의를 자행하는 예루살렘, 또 더 이상 그분만 을 섬기는 곳이 아니라 갖가지 우상 숭배의 장소로 전락해 버린 성전을 떠나게 된다(10, 18). 하느님은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죄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근접을 막는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이 인간을 몰아내시는 것 이 아니라,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을 내쫓는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진정 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에제키엘서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낱말 가 운데 하나가 '알다' 라는 동사이다. 특히 "그제야 너희는(또는,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된다. 여기에서 앎은 어떤 지 적인 지식이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어떤 높은 진리를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앎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다. 그리고 이 만남의 장소는 하느님이 과거와 현재의 역사 안에 이루시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이 과거에 그들을 위해서 이루신 구원의 행동 안에서 그분 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역겨운 짓"을 저지르고(7, 3 등), 그분을 저버린 채 온갖 우상 곧 "구역질 나는" 것들을 섬겼다(5, 11 등). 하느님은 이제 다시 행동하셔야 한다. 그제야 당신이 주님임을 당신 백성이 알게 된다. 그 행동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받아야 마땅한 징벌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은 끝이 아니라 정화이며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의지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중심인 마음을 바꾸어 주신다(36, 23-28). "새 마음"을 받은 하느님 백성이 온갖 부정(不淨)을 벗어난 새 거처를 마련할 때(40-42장),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으로 돌아온다(43, 4). 그러면 예루살렘도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곧 "야훼 삼마" (יְהוָה שָׁמָּה) , "야훼님께서 여기 계시다"가 그 이름이다(48,
35). 결국 에제키엘 예언자의 모든 활동은, 사람들이 새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 구약성서 ; 바빌론 유배 ; 예언서 ; 예언자)
※ 참고문헌  G.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Bd. Ⅱ, Miinchen, Chr. Kaiser Verlag, 1975, pp. 229~247(허혁 역, 《구약성서 신학》 2, 분도출판사, 1977, pp. 217~234) W. Zimmerli, Ezechiel, Biblischer Kommentar Altes Testament XIII -1-2, Neukirchen-Vluyn, Neuchirchener Verlag, 1979/ K. Koch, Die Profeten Ⅱ. Babylomish-persische Zeit, Urban-Taschenb cher Bd. 281, Kohlhammer, 1980, pp. 89~123/ L. Alonso Schöc-kel · J.L. Sicre Diaz, Profetas : I Isaias-Jeremias- II Ezequiel-Doce Profe-tas memores-Daniel-Baruc-Carta Jeremias, Ediciones Cristiandad, edi-zione italiana a cura di G. Ravasi, 1 Profeti, Roma, Borla, 1984, pp. 749~764/ 민영진 . 임승필, 《예언서》 2, 하느님과 사람의 말씀 시리즈 4, 생활성서사, 1999, pp. 31~86. 〔任承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