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과도르

〔영〕Republic of Eccu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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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나라로, 공식 명칭은 에콰도르 공화국. 북쪽으로 콜롬비아, 동쪽과 남쪽으로 페루, 서쪽으로 태평양과 접해 있다. 면적은 270,670km고, 인구는 12,170,000명((1998)이며, 수도는 키토(Quito)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고, 일부 인디언들은 케추아어를 사용한다. 국민은 메스티소와 원주민 인디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원래 에콰도르 지역에는 다신론을 신봉하던 퀴투족(Qui-tus), 카나리족(Canais), 만타족(Mantas) 등 여러 부족들이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부족 연합체를 이루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잉카인들은 에콰도르 전 지역을 정복하고 키토를 잉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1526년 잉카의 와이나 카팍(Huayna Cápac) 왕이 죽자 제국은 두 아들에 의해 쿠스코(Cuzco)와 키토로 분열되었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무렵 스페인은 에콰도르 지역을 탐험한 뒤, 1531년 피사로(F.Fizarro)를 잉카 지역의 총독과 사령관에 임명하면서 본격적인 정복 활동을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에콰도르 지역은 페루 부왕령(副王領)에 속해 있다가, 1739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현 콜롬비아 지역) 부왕령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으로부터 목축업 · 바나나 경작법 등이 도입되면서 점차 농업이 발달하였고, 키토 미술 학교를 중심으로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원주민과 메스티소들의 생활은 열악하였으므로 종종 반란이 일어났다.
1809년 몬투파르(J.Montúfar)가 처음으로 독립을 시도했으나 내부의 알력과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1820년 코르데로(F.Cordero)가 재차 독립을 선언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인 볼리바르(S. Bolivar)는 이 선언을 지지하면서 수크레(A. Sucre)를 파견하였는데, 1822년 그는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에과도르는 볼리바르의 지도 아래 대(大) 콜롬비아 연방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에 가입하였으나, 1830년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에콰도르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 키토와 교회에 기반을 둔 보수주의자들과 해안 도시 과야킬(Guayaquul)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으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1861년 보수주의자 모레노(G. Moreno)의 독재 정권이 수립되면서 특히 경제와 교육 분야에서 어느 정도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1875년 모레노가 암살된 뒤에는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895년 자유주의자 알파로(E. Alfaro)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나, 이후 여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20세기 초반까지 독재 정치가 계속되었다. 에콰도르에서는 1963년 최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1979년 민정 이양 때까지 군정이 되풀이되었다.
〔복음의 역사] 식민지 시대의 교회 : 에콰도르에서 가톨릭의 역사는 정복자 피사로 부대의 군종 신부였던 리케(J. Ricke)가 이끄는 플랑드르(중세 때 북해 연안의 저지대 남서부에 있던 공국)의 프란치스코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프란치스코회는 멕시코에서의 경험을 살려 산악 지역에 사는 인디언 부족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자비의 성모회(Order of 0ur Lady of Mercy)는 해안 지역 인디언 부족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541년 에콰도르에 온 도미니코회는 주로 아마존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서 선교하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예수회와 아우구스티노회가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여느 중남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선교는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황 바오로 3세(Paulus Ⅲ, 1534~1549)는 1545년에 키토 교구를 세우고 군종 신부였던 아리아스(G.Anas)를 교구장에 임명하였다.
독립 국가 시대의 교회 : 스페인 식민 통치기에 교회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1809년 키토의 쿠에로(José de Cueroy Caicedo) 주교가 독립 선언을 한 독립 운동의 부의장, 그리고 나중에 의장으로 활약하였다는 사실과 다수의 사제들이 제헌 의회 의원으로 선임되어 헌법 초안 작업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쿠앵카(Cuenca) 교구의 폰테(Andrés Quintián Ponte y Andrade) 주교는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의 입장에 서서 독립을 지지하는 사제들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에콰도르는 항상 페루 아니면 콜롬비아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민족 또는 국가 의식이나 훈련된 행정 관료가 없었고, 교회만이 일정한 조직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확고한 지지 기반이 없는 정치 지도자들은 교회나 교회 기구들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824년에 국가는 교회를 통제하기 위하여 교회 성직 임명권 · 신학 교재 선택권 등을 국가가 갖고, 사제나 수도자가 교계나 장상의 명령이나 지시에 대하여 민간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는 철저하게 국가에 종속되었고,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독립과 함께 프로테스탄트에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교회는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들을 전개하였으나, 1866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바티칸과 정교 협약을 맺고 상주 외교 사절을 받아들였다. 또한 예수회 · 그리스도 수사회 · 성심수녀회 등이 정부의 초청으로 분원을 설치하고 교육을 담당하였다.
자유주의 정부와 교회 : 1875년 보수주의 정부가 무너진 뒤 에콰도르에는 자유주의 물결이 몰아 닥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1년에 대통령령으로 교회의 십일조를 폐지한 후, 이를 토지 소유에 대한 3%의 세금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1895년 정권을 잡은 알파로 정부는 교황청과의 정교 협약을 파기하고 외국 수도회의 입국을 금지시켰으며, 교육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1902년 결혼을 민간 의례로 선언하고 이혼 역시 허용하였으며, 1906년에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나아가 1908년에는 아무런 보상 없이 교회 소유물을 몰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5년 에콰도르 정부는 바티칸과 새로운 협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1950년에 시성된 마리아나 데 헤수스 파레데스 이 플로레스(Mariana de Jestis Paredes y Flores) 성녀가 있고, 과풀로(Guapulo)와 킨체(Quinche) 성지가 알려져 있다. 1996년 현재 전체 인구의 93.8%인 11,203,000명의 신자가 있으며, 대교구 4,교구 11, 본당 1,109개에 추기경 1, 대주교 5, 주교 30, 사제 1,795(교구 소속 975, 수도회 소속 820), 수사 317, 수녀 4,838명이 있다. 한인 신자는 1999년 현재 73명이며, 본당 1개와 공소 2개에 사제는 1명이다.
※ 참고문헌  A. Tibesar, 《NCE》 5, pp. 89~951 《EB》 7, pp. 944~9571 2000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316~317/ Ramon Garcia-Pelayo y Gross, Pequeno Larousse Ilustrado, ed. Laro-usse, Paris, 1988/ Pablo Richard, Morte das Cristandades e Nascimento da Igrejab, ed. Paulinas, São Paulo, 1984. [金沆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