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 요한 (1486~1543)

〔네〕Eck, J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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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에크 신부.

요한 에크 신부.

신부. 종교 개혁에 맞서 당대의 개혁 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한 논쟁 신학자.
[생애와 활동] 1486년 11월 13일 독일 슈바벤의 에크(Ekk)에서 태어나 로텐부르크 본당 신부였던 삼촌으로부터 철학과 신학 그리고 고전을 배웠다. 12세 되던 149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시작으로 튀빙겐, 쾰른 그리고 1502년부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전문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철학과 신학을 연구한 그는, 1508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510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해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에 신학 교수로 부임한 에크는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대학 교육 개혁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인문주의(humanismus)에 충실한 신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상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이자와 신용 관계에 관한 경제학적 문제에 대해 글을 집필하였는데, 그로 인해 1514년부터 적절한 이자를 지지하는 입장을 피력하게 되었다. 이로써 당대의 최고 부유한 귀족인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의 노예' (Fuggerknecht)라고 불려지는 모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에크는 예정설과 은총론에 관한 첫 신학 저서인 《크리소파수스》(Chrysopassus)를 저술하였다.
1517년까지 루터(M. Luther, 1483~1546)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던 에크는 이듬해 루터의 <95개조 명제>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제기하면서, 루터와의 좋았던 관계가 깨졌다. 그리고 루터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인 카를슈타트(A.R.B. von Karlstadt, 1480~1541)가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부터 공개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에크는 1519년부터 잉골슈타트에서 본당 사목을 하면서 열정적인 설교와 영적 지도를 하였다. 본당 사목자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가 하느님 말씀의 선포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사목 일지에 수시로 설교의 내용에 관해 기록해 두고 구상하곤 하였다. 에크는 자신의 설교를 한데 모아 1530~1539년에 5권으로 된 독일어 《설교집》을 출판했으며, 1537년에는 엠저 (H. Emser, 1478~1527)의 신약성서 번역이 포함된 독일어 성서를 편찬하였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심한 열병을 앓다가 잉골슈타트에 돌아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목 활동을 한 에크는, 결국 병이 악화되어 1543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개혁파와의 논쟁 및 신학적 입장] 카를슈타트는 루터의 <95개조 명제>에 대한 에크의 논평에 반대하는 공격적인 문건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계속된 이른바 '라이프치히 토론'(Leipziger Disputation)으로 연결되었고, 이후 이들 사이에 많은 논쟁적 문건들이 오고 갔다. 에크는 이 논쟁을 통해서 가톨릭 교회와 그 교회가 지닌 하느님 전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우선 카를슈타트에 이어 루터와 논쟁을 하였고, 카를슈타트에 반대해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동의를 전제하여 의화(義化, Recht-fertigung)를 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루터에 반대해서는 교황의 수위권이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정리한 《베드로의 수위권》(De primatu Petri, 1521)을 출판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사변 신학에서 실증 신학으로의 전환을 보여 준다. 즉 여기서 그는 종교 개혁이 교황권에 대한 전통적인 합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강조하였다. 1520년 초교황청의 초청을 받은 이후 에크는 루터에게 파문을 경고하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의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 1520. 6. 15)의 작성을 돕고, 추기경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1480~1542)와 함께 그 교서를 독일에서 발표하였다. 에크의 논쟁적 문건들은 그 후 계속해서 편찬되었는데, 주로 가톨릭의 주요 교리인 고해성사, 연옥 교리, 성화상 공경, 성체성사에 있어서의 실체적 현존, 그리고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의 성격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종교 개혁의 논쟁점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저서 《편람》(Enchiridion locurum communium adversus Lutherumetalios hostes ecclesiae)이 1525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는 16세기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저서였다. 이 책에서 에크는 종교 개혁자들과 벌인 논쟁의 주요 사안들을 다루었고, 성서와 교회 전통으로부터 가톨릭 교회의 정당성에 대한 전거를 이끌어 내었다. 이 저서의 내용 중에서 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강조는 근대 가톨릭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에크는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을 위해 '404개 조항' 의 이단 목록을 작성하였다. 여기에 나타난 종교 개혁자들에 대한 그의 공격적인 입장은, 비텐베르크의 개혁 신학자들에게 신앙론을 거론하도록 유도하였다. 한편, 이를 계기로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은 전승된 신앙 고백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내용을 담은 종교 개혁자들의 근본적 합의를 28개 항목으로 정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Confessio Augustana)이다. 에크는 1530년 8월 5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응답으로서 '가톨릭측의 반박문' (Confutatio)을 작성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 문건에서는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고 개혁파들과 최대한의 합의를 이루려는 신학적인 노력이 보인다. 또한 그는 반박문 작성 이후 8월 16일에서 30일까지 개혁파와의 조정 협상을 위해 특히 의화 문제에 대해 합의할 의사가 있음을 비추었다. 종교 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1540년과 1541년의 보름스(Worms) 종교 협상에도 참석하였다. 여기에서도 에크는 합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중심적인 위치에서 협상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의 의] 논쟁 신학자로서 에크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의 왕성한 활동 능력과 부지런함, 신속한 이해와 정리, 그리고 교황청과 그 대리자들과의 밀접한 공동 협력에 기인한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성서 해석의 잣대이며 그리스도교 전승과 위계 질서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크는 상당히 일찍 루터의 입장을 간파한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 즉 루터에게는 처음부터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의 혁명, 즉 완전한 변화가 핵심 관건이었음을 간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성서와 초대 교부들의 사상과 같은 정통 가르침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에크는 저술에서도 원전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인문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또한 실증 신학의 선구자로 도 평가될 수 있다. (→ 루터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종교 개혁)
※ 참고문헌  《ARCEG》6/ 《RGG》2,p. 1047/ Alois M. Haas, 《LThK》 3, pp. 443~446/ Erwin Iserloh, 《TRE》 9, pp. 249~258/ -, Johannes Eck(1486~1543), Scholatiker, Humanist, Komtroversetheologe, Münster, 1985/ Wilhelm Gussmann, Melanchthon und Eck. Ein Beitrag zur Entste-hungsgeschichte der Augustana, Neue kirchliche Zeitschrift 41, 1930, pp. 289~314/ W. Gussmann Hrsg., D. Johann Ecks 404 Artikel zum Reichstag von Augsburg 1530, Quellen und Forschungen zur Geschichte des Augs-burgischen Bekenntnisses, Bd. 2, Kassel, 1930/ Otto Hiltbrunner, Die Titel der ersten Streitschriften zwischen Eck und Luther, (ZKG) 64, 1952~1953,pp. 312~320/ Klaus Rischar, Johann Eck aut dem Reichstag zu Augsburg 1530, Miinster, 1968. 〔吳敏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