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텔베르토 (?~616)

〔게〕Ethelbertus

글자 크기
9
597년 신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에텔베르토 성인.

597년 신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에텔베르토 성인.

성인. 영국 켄트 왕국의 왕(560~616). 축일은 2월 26일. 영국의 사도로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Cantuariensis, ?~604/605)에게서 세례를 받고 앵글로 색슨족 중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자 왕이 된 그는,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도록 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하였다.
[생애와 활동] 에텔베르토는 5세기에 브리타니아를 침입한 게르만족 중 하나인 주트족(Jutes) 헹기스트(Hen-gest, ?~488?)의 후손인 에오르멘릭(Eormeric-Irminricus)의 아들이다. 560년 아버지로부터 켄트의 왕위를 이어받은 그는 집권 초기에 웨식스(Wesex)의 시올린(Ceawlin)으로부터 브리타니아 전체 통치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프랑크족 메로빙거 가문의 샤리베르(Charibert, 561~567)의 딸 베르타(Bertha)와 결혼함으로써 정치적인 입지를 크게 강화하였다. 베르타는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므로 결혼 조건으로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베르타는 상리(Senlis)의 루이다르(Luidhard) 주교를 대동하여 왔으며, 에텔베르토는 그에게 왕국의 수도인 캔터베리(Canterbury)의 옛 성당인 '성 마르티노 성당' 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루이다르 주교가 이곳에서 주교직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영국은 일곱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종족끼리 연합체를 형성하고 또 그 연합 왕국의 대표를 뽑게 되어 있었는데, 대표로 켄트 왕국의 왕인 에텔베르토가 뽑혔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영국 브리타니아족을 침략한 픽트족 · 앵글족 · 색슨족 ·주트족 등 이교 민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라는 사명을 주어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를 켄트로 파견하였다. 에텔베르토는 597년 켄트 해안에 도착한 아우구스티노를 정중하게 맞이하였고, 그에게 영지도 하사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설교와 사도직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에텔베르토 왕은 같은 해 예수 성탄 대축일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당시 왕권이 절정에 다다랐던 에텔베르토는 세례를 받은 후, 앵글로 색슨 교회의 선교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황의 선교 정책을 따라 캔터베리의 이교도 신전을 없애려 하지 않고 단지 우상만을 없앴으며, 순수한 이교도 예식은 그리스도교 전례에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혼 성직자들을 자신의 대교구에 수용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황으로부터 옛 로마 통치의 행정 구역을 답습하여 각각 12개의 관할 교구를 거느리는 교회 조직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그는 가장 문명화되고 영국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교화된 앵글로 색슨의 켄트 왕국에 대주교좌를 설정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좌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좌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 을 설립하였다. 또한 에텔베르토의 영향을 받아 에식스의 왕과 앵글리아의 왕도 신자가 되었다.
에텔베르토는 604년경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아 '에텔베르토 법전' 을 편찬하였다. 대중 언어로 편찬된 이 법전에는 죄와 그에 따른 보속을 규정해 놓은 부분도 있는데, 예컨대 누군가 하느님이나 교회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12번 기도해야 한다거나, 주교의 물건을 훔쳤다면 11번, 신부의 것을 훔쳤을 경우에는 9번, 부제의 것을 훔쳤으면 6번, 신학생의 것을 훔치면 3번을 기도해야 한다는 규정 등이었다. 에텔베르토는 로마의 모범을 따라서 켄트 자체의 법을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에텔베르토는 616년에 사망하였다.
[의의와 영향] 에텔베르토는 2세기 이후 브리타니아족에게 전파되었으나 여러 이교 민족들의 침략으로 파괴된 영국의 그리스도교를 복원하고, 캔터베리의 성 아우 구스티노를 도와 영국 내에 그리스도교가 확립되도록 하는 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왕이다. 그가 사망한 뒤, 브리타니아의 통치권은 평생 이교도로 살았던 그의 아들 에드버트(Edbert)에게 넘어가지 않고,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 레드왈드(Redwald)에게로 넘어갔으며 다시 신자인 노섬브리아의 에두아르도(Eduardus, 584~633)에게로 넘어갔다. 에두아르도는 켄트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으나 브리타니아 전체 통치권을 소유하였었다. 그는 에텔베르토의 딸 에텔부르가(Ethelburga, +647)와 결혼하고 북쪽의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부족의 개종을 도왔으며, 후에 과부가 된 에텔부르가는 수녀가 되었다. 에텔베르토가 이룩해 놓은 영국의 그리스도교 전파의 업적은 이렇게 명맥을 이어 갔다. 에텔베르토의 유해는 캔터베리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 성당에 베르타 왕비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 아우구스티노, 캔터베리의 ; 에두아르도 ; 영국)

※ 참고문헌  J.L. Druse, 《NCE》 5, p. 566/ G. Marsot, 《Cath》 4, pp.561~563/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elgique, Brepols, 1991, p. 271 《ODCC》, p. 564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p. 146~147.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