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해의 카이스트로스 연안(현재의 Küciük Menderè)에 위치한 도시. 현재 터키에 속해 있으며,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 있던 그리스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다.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2, 1-7).
〔역 사〕 기원전 1000년경부터 그리스인들이 지금의 터키 서남부 에게 해 주변으로 몰려와 이오니아 도시들을 세울 때 에페소 항도 건설하였다. 기원전 550년경부터 에페소는 사르디스에 도읍을 정한 리디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546년부터는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34 년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런데 대왕이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대왕의 막료 리시마쿠스(Lysimachus, 기원전 355?~281) 장군이베르가모 일대를 차지하고 에페소를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조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기원전 133년 베르가모 왕국의 마지막 임금 아탈로스 3세(Atttalos Ⅲ Philometor Euergetes, 기원전 138~133)가 죽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넘겨줌으로써 에페소는 로마 공화국에 병합되었다. 기원전 88년 에페소 시민들이 로마인들을 혐오하여 라틴어
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 후 다시 로마의 통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 14)의 통치하에서 에 페소는 아시아 속주 제1의 도시가 되었으며,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이로 인해 에페소는 그리 스 영토에서 가장 대표적인 제국 시대의 도시가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의 마리아가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35~107)가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스미르나에서 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에페소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350년경 예술원 자리에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이 건축되었고, 38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 395)가 제국 내의 모든 이교도 신전들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에페소의 명물이었던 아르테미스 신전도 문을 닫았다. 431년 에페소의 마리아 성당에서 제3 차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ὀκος)라는 교리가 선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 몇 년 뒤 "에페소의 7인의 잠든 자" (Septem Domi-nientes)들이 부활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데치우스 황제(249~251) 때 군인이었는데, 250년의 박해를 피해 고향인 에페소 근처의 한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가 후에 입구가 막혀 버리자 잠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 시기에 잠에서 깨어났고, 동굴 입구가 다시 열렸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설명한 뒤 죽었고, 황제는 이들의 유해를 성당에 안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죽은 자의 부활의 교리를 입증하는 것이었기에, 이후 널리 퍼졌다(H.Leclerg, 15, pp. 1251~1261). 그리고 이들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7월 27일을 이들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527~565) 때에는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길이가 130m나 되는 거대한 성당이 건축되었다. 에페소는 7세기 이후 무슬림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426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선교〕 초세기에 에페소는 그리스 최대의 도시로서 주민이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유다인들도 상당히 많아서 자신들 고유의 법정을 갖고 있었고(요세푸스, 《유대 고사기》 14. 10, 19), 사도 바오로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사도 18, 24-28).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에페소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지만 오래 활동하지는 않았다(사도 18, 19-21). 그러나 53~58년에 행한 제3차 전도 여행 중에는 무려 27개월 가까이 머무르면서 대대적으로 선교를 하였다(사도 19장). 처음 석 달 동안은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유다인들에게 전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후에 디란노 학원에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였다. 문이 활짝 열렸다고 바오로 자신이 말할 만큼 에페소에서는 이방인 선교가 잘되었다(1고린 16, 9). 사도 행전에 따르면, 아르테미스 신전 참배자들이 줄어들 정도로 개종자가 많았다고 한다(사도 19, 24-40).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는데, 에페소에 도착하여 유대교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단자들이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와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 또 에게 해 건너 고린토 교회에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세 차례 편지를 써 보냈는데, 첫째 편지(1고린 5, 9-10)는 분실되었고, 둘째 편지(지금의 고린토 전서)는 고스란히 전해 오며, 셋째 편지(눈물 편지, 2고린 2, 4 ; 7, 8)는 단편(지금의 2고린 10-13장)만 전해 온다. 그리고 바오로는 에페소 주둔 로마군 부대에 갇혀 있는 동안에(필립 1, 13 ; 2고린 1, 8-10) 필립비 교회에, 또 골로사이 교회 책임자 필레몬에게 각각 편지를 써 보냈다.
〔요한계 신학파의 요람〕 에페소는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 시기에 에페소에서 파트모스(Patmos)로 유배되었으며(묵시 1, 9), 이 기간 중에 묵시록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네르바 황제(96~98) 시기에는 에페소로 돌아와 서간과 복음서를 저술하였고, 선교와 사목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페소를 요한계 문헌을 펴낸 요한계 신학파의 요람으로 여기고 있다. 요한계 문헌이 1세기 말엽에 활동하였던 어느 신학파의 산물이라는 주장에는 신약학계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신학파의 창시자 또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통설조차 없는 실정이다. 요한계 문헌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한 학설에 너무나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첫째,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제자들 중 예수로부터 각별히 사랑을 받은 애제자를 가장 존경한다(13, 23-26 ; 18, 15-16 ; 19, 26-27 ; 20, 2-10 ; 21, 7. 20-23). 이 름도 전해지지 않는 애제자가 요한 복음서에 채록된 예수 전승의 첫 번째 전수자라고 생각된다.
둘째, 요한의 둘째 편지와 셋째 편지의 발신인이 "원로인데, 그는 요한 복음의 "애제자"와 같은 인물일 것이다.
셋째, 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주교인 파피아스(Papias, 2세기경)는 130년경에 저술한 《주님의 어록 해설집》에서, 사도 요한과 주님의 제자이며 원로 (ὀπpoσβύτεpoς)인 요한을 구분했다(에우세비오, <교회사>3. 39, 4). 한편 프랑스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130~200) 는 로마의 사제 플로리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어려서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70-155)의 집에서 주교님의 말씀을 즐겨 듣곤 했는데, 폴리카르포는 예수를 본 요한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하였다(에우세비오,《교회사》 5. 20, 5-7). 또한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98~117) 시대까지 살았다고 증언했다(에우세비오, 《교회사》 2. 22,59). 이레네오는 폴리카르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 주었다. 사람들이 폴리카르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주님의 제자 요한이 어느 날 에페소 목욕탕에 갔다가 그노시스주의자인 케린토스를 보았다. 요한은 목욕도 하지 않고 급히 뛰쳐나오면서 "목욕탕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니 달아납시다. 진리의 원수 케린토스가 목욕탕에 있으니까요" 라고 외쳤다(이레네오, 《반이단론》 3. 3, 4).
이상의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요한계 신학파의 창시자 겸 대표는 애제자, 원로, 주님의 제자이고 원로이며, 폴리카르포의 스승이요 에페소에서 활약한 주님의 제자 요한일 것이다. 이 사람은 많은 제자를 길러 냈고, 그의 제자들은 100년경에 스승의 이름을 빌려 요한계 문헌들을 펴냈다고 여겨진다.
〔유 적〕 성 요한 성당 :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이른바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십자형 대성전이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81~96)
는 허세가 대단해서 자신을 '주님이요 하느님' (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했다. 에페소에서는 도미티아누스와 플라비우스 가문에 성전을 지어 바침으로써 신격화된 황제 숭배에 열성을 보였다. 만일 이를 거부하면 로마의 적이기 전에 도시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사실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는 초세기 말엽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황제 숭배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묵시록 13장에 언급된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은 황제 또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지방 관리들을 표상한다. 지방 관리들이 황제 숭배에 노력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왜냐하면 황제 숭배를 통하여 식민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동방 지역에 황제의 신전이 건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천 극장 : 클라우디우스 황제(34~41) 때 짓기 시작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때 완공된, 터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야외 극장이다. 본래 이 극장의 규모는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성모 성당 : 350년경 예술원 자리에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축되었고,
이 장소에서 431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집 : 에페소 앞산 너머 능선 아래 지점(파나기아 카플루)에 성모 마리아가 살았다는 집이 있다.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에서 1950년에 지은 집이다. (→ 에페소 공의회 ; 요한, 사도)
※ 참고문헌 정 양모, 《위대한 여행-사도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 생활성서사, 1997, pp. 116~130. 〔鄭良謨〕
에페소
〔그〕Ἐφεσος · 〔영〕Eph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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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십자 형태의 성 요한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