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해의 카이스트로스 연안에 위치한 에페소에서 431년에 개최된 세계 제3차 공의회.
[배 경] 테오토코스 논쟁과 네스토리우스 :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되어 부임할 때 데리고 온 비서 아나타시우스(Anathasius) 신부 때문이었다. 아나타시우스는 "아무도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단지 한 여인에 지나지 않으며, 하느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Θεὸτoκoς, 하느님을 낳으신 분, 천주의 모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회가 약 200년 동안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으로 '테오토코스' 를 사용해 오자, 신자들이 반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지나친 열의를 갖고 마리아에 대한 호칭에 대하여, 마리아론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도론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아나타시우스를 두둔하는 일련의 강론을 하면서, '테오토코스' 라는 호칭은 '안트로포토코스 (άνθρωπωτoκoς, 사람을 낳으신 분, 사람의 어머니)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토코스' (Xριστὀτoκoς,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네스토리우스는 '테오토코스' 라는 호칭보다는 '테오도코스' (Θεὸδoκoς, 하느님을 맞아들이신 분,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가 더 선호했던 호칭은 '크리스토토코스' 였다.
그런데 논란이 된 '테오토코스' 란 호칭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 호칭이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의 재현이라고 판단하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네스토리우스가 안티오키아의 주교(260~268)였던 사모사타의 바오로(Paulus Samosa-tenus)가 주장한 그리스도 양자설(adoptianismus)을 믿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기 전부터 이미 '테오토코스' 호칭에 대한 분쟁을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테오토코스'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네스토리우스가 아니다. 그는 단지 이 분쟁의 중재 역할을 하고자 했다. 즉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안트로포토코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테오토코스 호칭의 사용을 반대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테오토코스 호칭이 아리우스주의적으로, 아폴리나리우스주의적으로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었다. 아리우스주의자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부정할 때, 테오토코스 호칭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기 위해서 테오토코스 호칭을 널리 보급시켰다. 둘째로, 이단 즉 아리우스주의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척결에 온 힘을 기울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 (412~444)를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로 간주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치릴로를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은, 그가 자신의 신학 사상을 발전시킬 때 아타나시우스의 책이라고 믿고 그 책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사실 그 책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이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첫째 '테오토코스' 호칭이 아리우스주의와 아폴리나리우스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둘째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잉태하지 않았고, 셋째 이 호칭이 이교도의 여신 즉 신모(神母) 사상을 정당화시킬 위험이 있고, 넷째 이 호칭이 비성서적이고, 다섯째 이 호칭이 니체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리고 '테오토코스' 라는 호칭은 '안트로포토코스' 라는 호칭과 같이 사용될 때에만 용납될 수 있으며, 더 적절한 호칭은 '크리스토토코스' 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호칭이 가장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적인 요소는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크리스토토코스' 만이 테 오토코스 와 '안트로포토코스' 의 모호성과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테오토코스' 호칭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 (인성의 비인성화)할 위험이 있으며, '안트로포토코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 (신성의 인성화)할 위험성이 있다. 둘째, '크리스토토코스' 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의 신성의 일치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명칭이다. 셋째, 네스토리우스는 니체아 신경이 신성과 인성을 다 지적하는 '그리스도'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이지 하느님이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치릴로의 대응 : '테오토코스' 호칭을 반대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교회의 전통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통적인 교의를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문제는 '테오토코스' 라는 호칭이 육화(incarnatio)에 대한 신앙의 핵심적인 표현이라는 데 있었다. 주교들과 신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교회와 신앙의 핵심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교회의 교의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고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수난하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의는 신학적인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사도 전승에 따른 교회의 믿음이고 고백이었다. 따라서 '테오토코스 호칭에 대한 네스토리우스의 비난은 의도가 좋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당시 교의의 발전과 신학적인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200년 동안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온 전승의 역사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호칭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었으며, 속성의 교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없애는 것이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치릴로가 이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치릴로가 이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신학적인 전통에서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했는데 양 학파는 서로 경쟁적인 입장에 있었다. 둘째, 신학적인 전통의 권위를 자랑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부상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언제나 경쟁 의식이 강했다. 치릴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권위를 다시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두 번째 총대주교좌였던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세 번째 총대주교좌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셋째,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가 신앙의 정결성을 흐려 놓고 있다고 믿었다. 즉,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라고 부르기를 거절하는 네스토리우스의 태도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적 풍토에 있는 치릴로에게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넷째, 428년경 치릴로에게 불만을 품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간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4명이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408~450)에게 치릴로가 자신들에게 부당한 처사를 했다고 고발하자, 황제는 이 사건을 네스토리우스에게 처리하도록 위임하였다. 다섯째, 치릴로는 갑자기 세력이 커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행동에 대해 재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일 네스토리우스가 재판관이 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수치가 된다고 생각하고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나타시우스가 '테오토코스 에 대한 반대 설교를 하였고, 네스토리우스가 아나타시우스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만일 네스토리우스가 정통이 아니라면, 비정통인 네스토리우스가 정통인 자신의 문제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치릴로는 생각하였다. 이처럼 신학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가 결부되어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치릴로는 이집트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428)와 교구 사제들에게 보낸 부활 대축일 편지(429)에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429년 봄에 알렉산드리아의 에우세비오는 네스토리우스의 설교에서 발췌한 구절들과 3세기의 이단인 사모사타의 바오로의 주장을 나란히 비교한 벽보를 콘스탄티노플에 붙였다. 이것은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고 고발하는 직접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 치릴로는 잘못을 시인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냈다.
로마 교회 회의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 : 당시의 교황인 철레스티노 1세(422~432)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단죄를 받은 펠라지우스(Pelagius, 350?~425?)의 추종자들을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남에 따라 긴장은 더해 갔다. 치릴로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하면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황실의 후원을 끊어 버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황제와 황실의 귀부인들에게 네스토리우스의 글을 발췌한 편지를 보내어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비난하였다.
430년 8월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치릴로의 입장을 지지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교황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치릴로에게 주면서 네스토리우스의 문제에 대한 집행권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교황의 편지에 의하면, 교황의 결정 통고를 받은 지 10일 이내에 네스토리우스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면 단죄하겠다는 단호한 내용이었다.치릴로도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12개 항목의
파문 조항(anathema)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파문조항과 교황의 최후 통첩을 11월 30일에 네스토리우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치릴로를 반박하는 12개의 대립 파문 조항(counter anathema)을 만들어 반박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치릴로의 12개 파문 조항 안에 아폴리나리우스주의적인 경향이 들어 있다고 판단하고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되기를 기다렸다.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되면 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치릴로를 피해 망명해 온 4명의 사제들을 통해서 그를 반대하고 단죄하려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로마 교회 회의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고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요한 1세(428-441/442)를 비롯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공의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공의회의 소집과 진행〕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으로,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로마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423~455)와 함께 431년 성령 강림 대축일(6월 7일)에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포하였다. 그리고 430년 11월 19일(혹은 17일)에 동로마 제국에 있는 모든 대주교들과 철레스티노 1세 교황과 히포의 아우구스티노(354-430)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430년 8월 28일에 이미 사망한 뒤였다.
제일 먼저 네스토리우스가 주교 10명을 이끌고 에페소에 도착하였고, 황제의 사절단도 도착하였다. 치릴로는 이집트 주교 50명과 수사 등 많은 일행과 함께 '마르 코 사도' 의 깃발과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라는 깃발을 들고 에페소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의 주교 주베날리스(Juvenalis, 422~458)도 팔레스티나의 주교들을 이끌고, 필립비의 플라비아누스도 마체도니아의 주교들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교회의 대표로 베술라스(Besulas) 부제가 도착하였다.
431년 6월 7일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었으나 많은 주교들이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요한 1세 일행(6월 26일 도착)과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많은 주교들과 교황 사절단(주교 2명과 사제 1명, 7월 10일 도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네스토리우스는 멜리테네(Melitene)의 아카치우스와 안치라의 테오도투스를 만나 토의를 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요한 일행을 기다리던 치릴로는 6월 21일에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는 아파메아의 알렉산데르와 히에라폴리스의 알렉산데르가 가져왔는데, 요한이 계속해서 한 달 간 여행 중에 있으므로 닷새나 엿새 후에 "당신(치릴로)을 포옹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이었다(Ep. 83). 그러자 "더 기다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공의회를 개최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황제의 권한 대리인인 칸디디아누스와 네스토리우스는 요한 일행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치릴로와 그를 따르는 많은 주교들과 에페소 시민들은 즉시 공의회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소환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치릴로는 이 같은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6월 22일 에페소의 가장 큰 성당으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에서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하였을 당시에 참석한 주교는 150~160명이었으나, 회의 도중에 숫자가 증가하여 197명이 참석하였다. 황제 사절단은 황제의 편지를 낭독하면서 공의회 개최를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에페소의 멤논 주교와 50명의 소아시아의 주교들과 팜필리아에서 온 12명의 주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를 지지하였다. 멤논 주교와 소아시아의 많은 주교들 과 예루살렘의 주베날리스 주교와 팔레스티나의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가 자신들에 대하여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참석한 대다수의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니체아 신경(325)을 낭독한 후,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와 치릴로가 작성한 12개의 파문 조항과 네스토리우스가 치릴로에게 보낸 편지와 교황이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등 네스토리우스 논쟁에 관련된 많은 증거들을 검토한 후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요청을 거부한 죄와 불경스러운 내용을 가르쳤다는 죄로 단죄받았다.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와 황제의 사절단 대표 칸디디아누스는 즉시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대립 공의회와 황제의 개입〕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요한 1세와 동방의 주교 42명이 6월 26일 에페소에 도착하였다. 요한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대립 공의회를 개회하였는데, 여기에는 43명의 주교와 황제 권한 대리인인 칸디디아누스가 참석하였다. 그들은 치릴로와 에페소의 멤논 주교를 '이단과 무질서의 장본인' 으로 단죄하고, 치릴로를 동조한 주교들에게도 치릴로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의 12개 파문 조항을 취소하기 전까지는 모두 단죄한다고 선언하였다. 요한 일행은 치릴로가 작성한 12개의 파문 조항 안에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의 위험성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칸디디아누스는 즉시 이 같은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6월 29일 황제의 칙서가 도착하였는데, 황제는 치릴로의 성급함을 책망하면서 6월 22일에 치릴로가 개최한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황제의 대리권자가 에페소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주교들은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황제는 양측이 모두 참석하는 새로운 공의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치릴로 일행은 거절하였다.
황제의 대리권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폭풍우 때문에 도착이 늦어진 교황 사절단(아르카디오 주교, 프로이토주교, 필립보 신부)이 7월 10일 도착하였다(필립보는 아주 늦게 도착했다). 교황은 430년 8월에 개최되었던 로마 교회 회의의 결정에 의거하여, 교황 사절단에게 치릴로와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미리 당부하였다. 치릴로가 개최한 제2차 회기에서 교황이 에페소 공의회에 보낸 편지(5월 8일자)가 낭독되었다. 다음날인 7월 11일의 제3차 회기에서는 제1차 회기의 회의록이 낭독되었다. 교황 사절단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 모든 결정을 교황이 승인한다고 선언하고, 이 같은 내용을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보냈다. 7월 16일의 제4차 회기에서는 안티오키아의 요한 일행을 소환하였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7월 17일의 제5차 회기에 치릴로 일행과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요한의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치릴로 일행은 요한 일행이 개최한 대립 공의회를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34명의 동방 주교들을 단죄하였다. 치루스의 테오도레트도 단죄를 받았다. 이 내용을 황제와 교황에게 보냈다. 치릴로 일행은 7월 22일(제 6차 회기)과 31일(제7차 회기)에 각각 한 차례씩 더 회의를 개최하여, 325년 니체아 신경이 아닌 또 다른 신경을 작성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월 22일의 결정을 다시 확인하였다.
8월 초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새로운 권한 대리인인 요한 백작이 세 사람(치릴로, 멤논, 네스토리우스)을 모두 해임한다는 황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황제는 에페소에서 내려진 모든 결정들을 반대하고, 에페소 공의회를 폐회한다고 선언하였다. 치릴로와 멤논 그리고 네스토리우스가 모두 체포되었다. 치릴로는 거액의 뇌물을 황궁에 있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보냈는데, 시민들이 동요하여 소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이를 두려워하여 치릴로와 멤논을 석방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서 파면하고 안티오키아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추방하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들이 칼체돈에 모여 12개의 파문 조항에 대해 토론하였으나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교들 사이에 갈등만 더 커졌다. 마침내 9월 11일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소 공의회를 완전히 폐회한다고 선언하면서, 치릴로를 제외한 모든 주교들은 에페소를 떠나 자기 교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편지가 에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치릴로는 에페소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가고 있었다. 10월 30일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승리자처럼 환영을 받았다.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를 안티오키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돌려보내고 막시미아노(Maximianus, 431~434)를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435년 8월 황제는 네스토리우스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네스토리우스는
옛날 자신이 기거했던 수도원에서 4년 동안(431~435) 머무르다가 안티오키아의 요한의 요청에 의해 아라비아로, 그리고 436년에는 이집트프톨레마이스에 있는 오아시스로 추방되었다.
새 교황 식스토 3세(432~440)와 황제는 네스토리우스 사건으로 분열된 교회의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치릴로와 안티오키아의 요한 총대주교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오랜 교섭 끝에 433년 4월 합의에 도달하여 각서가 교환되었는데, 이 합의는 상호 양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안티오키아측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단죄를 승인하였고, 알렉산드리아측은 치릴로가 안티오키아측에서 작성한 신조를 받아들이고 이 신조가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 신조에 그의 사상을 첨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결과 및 평가〕 에페소 공의회에는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심리적 · 철학적 · 신학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정치와 시민들의 분위기도 작용하였다. 결국 아 무런 결실도 없이 10월에 에페소 공의회는 끝났다. 이같은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였으며 분열만 초래하고 말았다. 치릴로는 에페소 공 의회에서 의장보다는 네스토리우스를 벌주려는 심판자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도착하기를 좀더 기다렸어야만 했다. 물론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는 에페소 공의회에 불참함으로써 공의회를 무시하였다. 또한 그는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을 기다리면서도 계속 비타협적인 태도 로 상대방을 거슬리게 하는 발언을 하였다. 황제도 이 사건에서 매우 비열한 면을 보였다. 오래 전부터 네스토리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입장을 바꾸어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려는 모든 노력을 봉쇄해 버렸다. 또 에페소 시민들이 동요하여 난동을 일으키자, 황제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네스토리우스 · 치릴로 · 멤논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가 시민들의 여론 때문에 치릴로와 멤논을 석방하고 네스토리우스만 추방시켰다.
한편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취한 행동도 부당하였다. 그들은 에페소에 도착한 직후 공의회를 부정하고 또 다른 대립 공의회를 열어 43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릴로와 멤논을 파면시켰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만 치릴로가 주도한 에페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파면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에페소 공의회에서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체계 있게 조사하지 못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본 사상과 개념들을 조사할 능력과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론에 대한 새로운 신조를 만들거나, 구체적인 토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 네스토리우스주의)
※ 참고문헌 A. Grillmeier, Christ in Christian Tradition, trans. by J.S Bowden, New York, A.R. Mowbray, 1965/ - Nestorianism, 《SM》 4/G.R. Driver · L. Hodgson, Nestorius : The Bazaar ofHeracleides, Oxford,Clarendon Press, 1925/ J.W.C. Wand,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Bologna, 1991/ -, Doctors and Coumcils, London, The Faith Press, 1962/F. Loofs, Nestorius and His Plase in the History ofChristian Doctrine, Cam-brige, Cambrige Univ. Press, 1914/ G. Alberigo ed., Storia dei Concili Ecu-menici, Brescia, 1990, 1993/ J.F. Bethune-Baker, Nestorius and His Teach-ing, Cambrige, Cambrige Univ. Press, 1908/ L. Scipioni, Nestorio e il conciliodi Efeso, Milan, 1974/ M. Simonetti, Efeso, Dizionario Patristico e di Anti-chit Cristiane 1, Roma, 1994/ 노성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 광주 가톨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2/ H.R. 드롭너, 하성수 역,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변종찬, <칼체돈 공의회 신앙 정식(Definitio Fidei)에 관한 연구>, 가톨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3. [盧成起]
에페소 공의회
公議會
〔라〕Concilum Ephesinum · 〔영〕Council of Ephesus
글자 크기
9권

1 / 2
431년 6월 22일부터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성모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