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부제. 교회 학자. 성서 주해자. 축일은 6월 9일(동방 교회에서는 1월 28일). 시리아인 에프렘, 또는 니시비스의 에프렘이라고도 불린다.
〔생애와 활동〕 306년경 니시비스(Nisibis) 또는 그 근방의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금욕주의자들과 니시비스의 초대 주교 야고보(303~338)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다. 니시비스의 주교 아브라함, 에데사의 주교 바르세스(Bares) 하란(Haran)의 주교 비토(Vitus)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에프렘은 세례를 받은 후 '계약의 아들들' 이라는 금욕 단체에 들어갔다가 그 뒤 야고보 주교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니시비스의 노래》(Carmina Nisibena)의 대부분과 찬가집 《낙원》(Hymni de Paradiso), , 《이단 논박》(Confutationes), 《신앙론》(Memre de Fide) 등을 저술하였다.
297년부터 로마 제국에 속하였던 니시비스는 338년 · 346년 · 350년에 사산 왕조의 황제 샤푸르 2세(Shapur Ⅱ,310~379)의 공격을 받았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361~363)가 363년 4~6월 페르시아 출정 중에 사망한 뒤, 그의 후계자 요비아누스(363~364)는 니시비스를 페르시아인들에게 넘겨주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요비아누스와의 평화 조약에서 로마 제국의 국민은 니시비스에서 떠나야 한다고 요구하였을 때, 에프렘도 363/364년 에데사로 이주하였다. 이후 에프렘은 에데사에서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성서 주석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때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는데, 타시아노(Tatianus)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 주석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신앙 찬가》(Hymni de Fide adversus scru-tatores) 등을 펴냈다. 후에 에프렘이 저술한 《교회 찬가집》(Hymni de Ecclesia)과 《율리아누스 논박가》(Hymni con-tra Julianum)는 우상 숭배로 되돌아간 율리아누스의 종교 정책과 그의 원정 결과를 노래한 것이다. 그는 372~373년에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호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그만 373년 6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저 서] 에프렘은 시리아 교회에서 가장 많은 저서들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모든 작품은 시리아어로 쓰여졌다.
산문 작품 : 《창세기 주석서》, 《출애굽기 주석서》, 《디아테사론 주석서》에는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행한 성서 주석 방법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 마지막 작품은 아르메니아어로 완전하게 전해지나, 시리아어로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전해진다. 마르치온(Marcion) 그노시스주의자 바르데사네스(Bardesanes), 마니교, 점성술을 반박하는 논쟁서인 《이단 논박》은 시리아 교회의 상황과 철학적 · 신학적 논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에프렘은 《우리 주님에 대한 설교》(Sermo de Domino Nostro)에서 육화를 구원에 관한 전통적 표상과 함께 자신의 특유한 표상으로 연결시킨다.
운문 형식의 설교 : 《신앙에 관한 설교》(Sermones de Fide)는 아리우스 논쟁을 다루고 있으며, 《니코메디아에 관한 설교》(Memre sur Nicomédie)는 단편적으로 아르메니아어로만 남아 있다.
교훈적 찬가 : 바르데사네스가 시리아어에서 최초로 발전시킨 시(詩) 형태의 교훈적 찬가는 에프렘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에프렘은 15권으로 이루어진 <낙원>에서 유대 전승을 바꾸어 전개하였으며, 《신앙론》에서는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자신의 그리스도론과 삼위 일체론을 전개하였다. 《교회 찬가집》, 《예수 성탄 대축일 찬가》(Hymni de Nativitate), 《주의 공현 대축일 찬가》(Hymni de Epiphania), 《단식 찬가》(Hymni de Ieiunio), 《과월절 찬가》 (Hymni de Azymis), 《동정성 찬가》(Hymni de Virginitate)등은 축일과 축일 시기 및 그리스도교적 삶과 사고를 다루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전해 주는 작품으로는 신학적 · 종말론적 주제와 더불어 니시비스, 에데사, 하란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과 교회의 사건을 다룬 《니시비스의 노래》와 《율리아누스 논박가》가 있다.
〔신 학〕 당시 그리스 신학자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에프렘 신학의 토대는, 그가 명상을 통해 얻은 성서 전체에 관한 지식이었다. 바르데사네스가 시리아 교회에도입한 위격 · 본질 · 본성과 같은 신학적 · 철학적 개념들이 그에게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철학적 · 합리주의적 사고로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모
든 신학적 오류의 근원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개념과 추론적 논증이 아니라 표상어와 상징어로 전개되었다.
에프렘은 표상 · 상징과 더불어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두 '계시서' , 곧 성서와 본성으로 하느님을 인식하려고 하였다. 그는 아리우스파의 맹목적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상징과 상징적 명칭으로 여겼다. 그래서 에프렘은 그리스도론에서는 그리스도를 일컫는 성서의 명칭(왕, 목자, 신랑, 의사)을, 삼위 일체론에서는 자연(해, 불, 빛, 열, 나무와 열매인 아버지와 아들)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구원론에서 에덴 동산을 노아의 방주와 시나이 산과 비교하였으며, 구원을 "나무에서 나무로 가는 길" 즉 에덴 동산의 나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는 길로 묘사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구원사를 낙원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교회를 거쳐 하느님 나라로 통하는 큰길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표상어는 그리스 교부와 서방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나지만 풍부한 표상어 · 시적 특성 · 주로 신학을 전개하는 데 사용한 점에서, 에프렘은 다른 교부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평가와 영향〕 많은 문헌에는 그가 '페르시아 학파' 를 창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그가 사망한 지 몇 년 후 에피파니오가 그를 '시리아의 현인' 이라고 부를 만큼 그의 명성은 매우 드높았다. 에프렘은 교부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이외의 유일한 시인 신학자일 것이다. 그는 후대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전의 전승을 요약하였다.
그가 사망한 뒤에, 네스토리우스파인 나르사이(Narsai, 309~502)와 그리스도 단성설파인 사룩(Sang)의 야고보(Jacobus, 451~521)는 각기 다른 입장에서 에프렘의 개념 · 주제 · 신학적 강조점을 받아들였다. 그 밖에 시적 기교의 관점에서 선율가 로마누스(Romanus Melodus, +555/565?)가 에프렘의 교훈적 찬가의 주제를 물려받았다. 에프렘은 시리아어권 밖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명성 또한 자자하였다. 그 자신은 시리아어로만 작품을 저술하였지만, 그가 생존해 있을 때 그리스 교회뿐만 아니라 라틴 교회에서도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는 《명인록》(De viris illustibus)에서 에프렘을 거론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교회에서 성서 봉독 후에 낭독되었다고 하였다. 예로니모는 성령에 관한 에프렘의 작품을 그리스어 번역으로 읽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교회사가 소조메노(S.H. Sozomenus, 380?~?)는 5세기 초 대부분 에프렘의 작품을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갖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물론 에프렘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라는 폭 넓은 전승에는 진본이 아닌 다른 작품들도 있다. 이는 라틴어 본문 전승과 아르메니아 본문 전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가 1920년 10월 5일에 에프렘을 교회 학자로 선포한 것은 서방교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R. Murray, 《TRE》 9, pp. 755~7621 W. Cramer, 《LThK》 3, pp. 708~710/ H.R. Drobner, Lehrbueh der Patrologie, Freiburg-Bael-Wien, 2000. [河聖秀]
에프렘 (306?~373)
〔아〕Ephra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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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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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렘 성인(1973년 불가리아 우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