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코팔리즘

〔라〕episcopalismmus · 〔영〕episcop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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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전체 주교들 또는 공의회에서의 주교들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한 이론 또는 그 운동.
에피스코팔리즘을 직역하면 '주교주의' (主敎主義)이며, '주교단 우위설' (主敎團優悅)이라고도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에피스코팔리즘은 '감독 제도주의' 를 뜻하 는데, 가톨릭 교회사에서 언급되는 에피스코팔리즘과는 차이가 있다.
〔발 생〕 교황권은 11세기 교황들의 성공적인 교회 개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황의 보편적 주교직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3세기부터는 서구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교황권은 절정에달하였다. 이러한 당시 교황 세력의 정치적인 발전에 대한 반동으로 에피스코팔리즘이 발생하였다. 이 반동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함께 작용하였으며, 또한 에피스코팔리즘을 발전시켰다.
그 이유들 가운데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치프리아노(?~258)와 아우구스티노(354-430) 등에게로 소급되는 교회 중심적인 고대의 영성적인 교회 이념이 12세기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각성되었다. 이 교회 개념은 중세 시기의 교황 중심적인 교회 개념과 차이가 있었다. 둘째, 11~13세기에 걸쳐 서구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난 단체적 교회 이념에 대한 의식이 존속하였다. 이러한 교회 이념들은 교황의 중앙 집권주의에 반발하는 기초 구실을 하였다. 셋째, 13세기에 교황 권력의 증대와 교황의 전권(plenitudo potestatis)까지 주장하는 교황청 교회법 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이 반발이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da Padova, 1280?~1343)와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에 의해 극단적인 공의회 우위설로 발전하면서, 에피스코팔리즘은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넷째, 14세기에 프랑스의 필리프 4세(Philipe Ⅳ,V,1314)와 독일의 루드비히 4세(Ludwig IV der Bayer, +1347)가 국교회적이고 왕권 절대주의적인 이념을 관철시킴으로써 에피스코팔리즘은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구 대이교(1378~1429)로 인한 교회 분열은 3명의 교황을 해임하고 교회의 일치를 재건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갈망에서, 공의회 우위설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아이(P. d'Ailly, 1350~1420)와 제르송(J. de Ger-son, 1363~1429)에 의해 공의회 우위설이 일치의 해결책으로 제의되었다. 나아가 그것을 지지하는 유명한 교령<헥 상타>(Haec sancta, 1415)와 교회 개혁을 위해 교황에게 정기적인 공의회의 개최를 의무 지우는 교령 <프레구엔스>(Frequens, 1417)가 의결됨으로써 하나의 이론으로 제 시되었다. 그러나 이 교령들은 신조 교령으로 교황의 승인을 받지는 못하였다. 아마 공의회의 대부분 교부들이 그것을 다만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를 회복하는
비상 수단으로 간주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전세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신병에 걸리거나 이단에 떨어진 교황을 공의회에서 심의할 수 있다는 법 이론 역시 비상 수단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공위회 우위설은 그 후 바젤 공의회(1431~1437)에서 다시 한번 잠시나마 교회를 분열시켰다. 그러나 교황권은 얼마 안 가서 재치권적인 수위권을 새롭게 강화하고, 16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이던 에피스코팔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발 전] 그렇지만 에피스코팔리즘은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에 영향을 미치면서 재연되었다. 프랑스에서의 교황권의 제한을 표방한 국교회주의적인 갈리아주의는, 15세기에 강력한 왕권의 보호하에 정치적인 갈리아주의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1438년에 부르주(Bourges) 의회에서는, 이른바 '국왕의 칙령' (Pragmatique Sanction)을 통하여 프랑스 왕권의 완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 전개된 교회 내에서의 갈리아주의 운동은 교황의 재치권 제한으로 교구에서 주교직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데 그쳤으므로 훨씬 온건적이었다.
에피스코팔리즘은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와 요셉주의(Josephinismus)에서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페브로니우스주의란 1763년에 출판된 《교회의 상황과 로마 주교의 적법한 권한》(Uber den Zustand der Kirche und die rechtmaisige Gewalt des romischen Bischofs)의 저자가 사용한 '유스티노 페브로니우스' (J. Febronius)라는 가명에서 유래한다. 당시 트리어의 보좌 주교였던 그의 본명은 혼타임(J.N. von Hontheim, 1701~1790)이었다. 그 당시 성행하던 계몽주의와 얀센주의(Jansenismus)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이 책에서 교황의 군주적인 체제 대신에 교회를 대표하는 신자단과 교회의 최고 기관인 공의회로 대치(代置)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은 각 주교보다는 상위에 있지만 주교 전체보다는 하위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교황은 교회 안에서 수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를 초월해서 수위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교황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주교들의 동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편 공의회 역시 교황보다 우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교황을 반대하는 상소를 공의회에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교회적이고 민족 교회적인 이 주장은 급속히 보급되어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이 극단주의자들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은 1786년 엠스 회의(Emser Kon-gress)의 결정과 피스토아 교회 회의(Synodus Pistoriensis) 였다. 독일의 쾰른을 비롯한 3명의 대주교들은 엠스 협정에 자극을 받아 독일 땅에서 교황의 전권을 격퇴한다는 의도에서 공동으로 뮌헨의 교황 대사관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같은 해에 열린 피스토아 교회 회의에서는, 얀센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이러한 이념을 알리고 이탈리아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려는 대담한 시도가 있었다.
요셉주의는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나타났는데, 황제 요제프 2세(1780~1790)의 이름을 따라 요셉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요셉주의는 그의 어머니인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때 이미 20년 동안(1760~1780) 실시되었으므로 사실상 그의
창작은 아니다. 아무튼 계몽주의자로서 1780년에 세습령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되고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는, 계몽 · 전제주의적인 국가 권력으로 교황의 재치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수도원이나 교회시설을 폐지하는 등 교회 전반에 걸쳐 대규모의 개혁을 독단적으로 강행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이 정책은1850년까지 60년 동안이나 계속 적용되었다.
에피스코팔리즘적 조류들은 19세기에 와서도 존속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의 부흥과 더불어 그 의의를 잃었고, 공격의 대상이었던 교황 재치권의 수위권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조로 선언됨으로써 소멸되고 말았다. (→ 요셉주의 ; 주교단 우위설 ; 페브로니우스주의 ; → 갈리아주의 ; 공의회 우위설 ; 바젤 공의회 ; 콘스탄츠공의회)
※ 참고문헌  Fr. Hofmann, Der Kirchenbegriff des hl. Augustinus, Miinchen, 1933/ W. Ullman, Medieval papalism. The Political Theories of the Medieval Canonists, London, 1949/ A. Verminghoff, Nationalkirchliche Bestrebungen im deutschen Mittelalter, Stuttgart, 1910/ J. Haller, Papsttumund Kirchenrefom, Berlin, 1903/ G.J. Jordan, The Inner History ofthe Great Schism ofthe West. A problem in Church Unity, London, 1930/ A. Franzen, 최석우 역, 《敎會史》, 분도출판사, 1982, pp. 375~376.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