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의 사상사(思想史)에서 아주 오래된 덕(德) 가운데 하나. 법이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법을 준수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형평법' (衡平法) 또는 '수의 해석법' (隨意解釋法)이라고도 한다.
〔개 념〕 에피케이아는 인정법에 대한 하나의 해석 방법으로서, 실정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불분명한 문제에 대해 법문(法文)에 따라서가 아니라 법 정신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즉 이 원리는 실정법이 모든 구체적인 경우 · 상황 · 조건 등을 고려하지 못하여 다소 명료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경우, 법의 정신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에피케이아는 인간 본성에 타고난 불문율이며 내적인 법으로서 성문화한 실정법보다 우월한 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에피케이아를 "법의 문자를 따지지 않고 정의(正義)의 이념과 공동선이 요구하는 바를 수행하게 이끌어 주는" (《신학대전》 Ⅱ-Ⅱ q. 120, a. 1) 덕이라고 정의하였다. 실정법의 경우에 이 덕은 최선의 법 해석자이며, 법만을 본위로 하는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심원한 형태로 정의를 구현하게 한다. 또한 이 덕은 법을 개별적으로 해석하게 해준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참으로 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그 요구가 법의 자구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무엇이 과연 의무에 해당하는가를 결정하게 해준다. 이런 형태의 법률 해석은 법을 글자 그대로 이행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처신이다. 이런 경우에 면제 사유를 결정하는 판단은 확실한 판단이어야 한다.
헤링(B. Haining)은 에피케이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에피케이아의 덕은 법문을 초월해서 법의 지향과 목적과 공동선이 요구하는 대로 법적 의무를 따르려는 마음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법의 의무를 어떤 환경에나 무차별하게 부과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는 적어도 법문에 규정된 대로만 부과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였었다면 그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법정 임금이 너무 적다면 에피케이아의 올바른 정신에 따라 고용주는 법문에 정한 것보다 임금을 더 인상하거나, 임금을 인상할 수 없으면 수당이나 다른 방법으로 지불해야 한다.
결국 에피케이아는 법의 기피가 아니라 법문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의미한다. 그 자유는 사도 바오로가 자주 강조하였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법문으로만 규정한 것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준법을 위한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에피케이아는 피지배자가 개인의 권위에 따라 법을 축소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에 법률의 순수한 의미에 따라서 자기에게 어떤 법의 의무를 면제하는 것이다. 윤리 교과서들은 에피케이아를 일반적으로 이 협의의 개념으로 제한하고 법률의 순수한 의미보다는 오히려 입법자의 진정한 의도에 따라서 법을 해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입법자는 자기가 제정한 법률을 너무 좁게 이해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입법자가 면제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합법적으로 면제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입법권자는 개인이 아니고 입법 기관이다. 법률은 여러 사람의 타협에 의해서 제정된다. 따라서 법률 내부에 숨어 있는 여러 입법자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떤 때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도 에피케이아의 덕을 실천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라고 선언하고(마르 2, 27), 안식일의 율법은 그 법문을 초월해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면제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려서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사제들만이 먹도록 되어 있는 성전에 차려진 빵을 먹은 적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어 반박하였다(마태 12, 1-8).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던 위선적인 유다인들의 율법을 무시하고 구원의 사명이라는 더 높은 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어울려식사하였다(마르 2, 15-17 : 루가 15, 1-2).
〔역 사〕 에피케이아에 대한 언급은 고대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의 발달과 함께 다양해진 사회 생활로 인해 그에 맞는 윤리적인 규범 설정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다양한 생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의 적용이 비정상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나타났다. 그래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학》(Politeia)에서 "현명한 철학의 왕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하고 변경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다"(294c)라고 하면서 법의 적용과 변경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노모이》(Nomoi)에서는 법적인 판단에 대한 이러한 자격을 확대하고 있다. 플라톤은 법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치 사회(국가)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참된 정의는 법에 대한 완전한 추종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에피케이아는 법의 적용을 완화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법이 작은 해악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았다(Leges Ⅵ 5, 757b).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는 특수한 상황에서 규정된 규범의 적용이 무의미할 경우, 모든 자유 시민은 일반적으로 규정된 규범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법의 일반적인 적용이 불완전한 경우에 법을 시정하는 것, 이것이 정확한 에피케이아의 존재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V, 14, 1137b)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케이아가 법을 개선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법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V,14, 1137b). 따라서 오류가 많은 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더 나은 정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몰락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피케이아 이론은 사회 전반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의 자유 시민은 없고 단지 통치자만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에피케이아는 이후 법적인 적용에 있어서 군주들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온건함과 겸손의 역할이 되었고, 법적인 적용이 군주의 자의에 의해서 처리됨을 의미하였다.
한편 로마인들은 법의 엄격한 준수가 최고의 불의(sum-mumjus, summum injuria)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제적으로 정의가 가능한 한 정확한 형평(衡平)에 의해서결정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에피케이아에 대한 고대의 사상을 다시 이어받은 학자가 알베르토(Albertus, 1200~1280)였다.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법의 전통적 유산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간결한 개념으로 통합하였다(《신학 대전》Ⅱ-Ⅱ , q. 120). 여기에서 그는 에피케이아와 형평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는 에피케이아를 인간의 행위에 대한 최고의 규칙으로 표현하였고, 덕(德)으로서 모든 여건을 종합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상위의 윤리적인 원칙 안에서 판단하는 자발적인 능력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에피케이아를 사실에 대한 정의를 넘어서 개인에 대한 정의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에피케이아의 본질적인 주체는 하느님이며, 그 이유는 그분만이 인격을 지닌 인간을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분은 인간의 처지를 판단하시는 분이며(시편 42, 1),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인 인간을 당신의 에피케이아와 형평에 참여시켰다고 하였다.
근세에 와서는 수아레스(F. Suarez, 1548~1617)의 에피케이아에 대한 이해가 특징적이다. 수아레스는 법의 확실성 때문에 에피케이아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경우로 제한하였다. 먼저 법을 지키는 것이 비윤리적인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경우에 에피케이아를 적용할수 있다. 또한 법의 준수가 시민들에게 어려울 경우 에피케이아가 허용될 수 있고, 입법자가 예외적인 경우에 있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경우 에피케이아가 허용될 수 있다. 정상적인 의미로 이러한 경우들은 입법자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성 알풍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Alphonsus Maria de Liguori, 1696~1787)는 광범위한 자연적 윤리 규범의 영역안에서 에피케이아의 정당성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The-ologia moralis, Bd. I , Nr. 201). 신스콜라 시대의 윤리 신학 교과서에서 에피케이아는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법의 다양한 규정 안에서 에피케이아는 외적으로 제한된 의미로만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에피케이아의 윤리적인 면과 덕으로서의 성격은 사라졌다. 에피케이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세계대전 이후에 다시 증대되었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적인 공포 정치 아래서 순종의 덕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에피케이아가 포기되어야만 했었고, 그로 인해 순종의 악습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잊혀졌고 매장되었던 에피케이아에 대한 서유럽 전통의 많은 요소들이 새로운 규범 설정을 위한 토론에서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에피케이아는 더 이상 현명한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질서한 삶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적으로는 법규범을 긍정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하였으며, 법적인 적용이 어려운 경우에는 양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해결책에 이르도록 이끌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인간의 조건(conditio personae)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역사와 위기 상황 속에서 인간에 의한 에피케이아의 남용에 대한 염려는 이해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두려워한다면 규범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법률적 엄격주의로 도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보기에는 더 많은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염려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 규정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을 초월하여 하느님 영의 이끄심으로, 역사 한가운데로, 그리고 종말에 오실 주님의 재림으로 우리를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정당성과 유의점〕 에피케이아의 내적 정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입법자는 개인들에게 일어날 모든 상황들을 예견할 수 없으며, 또 예견했다 하더라도 입법의 법문으로는 그 상황들을 모두 해결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둘째, 법률은 사회 생활의 발전과 변화를 신속히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과거의 환경 조건을 살리기 위해서는 잘 꾸며진 법문이 현재의 조건에는 불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에피케이아는 예외적인 해석 방법이기 때문에 개인의 합리화를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현명한 판단에 의해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음의 사용 조건과 주의를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첫째, 에피케이아는 실정법에만 적용된다. 둘째, 법을 지킴으로써 얻는 이익보다는 오히려 불이익과 곤란이 더 클 것이 확실한 때라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과의 상의가 매우 필요하다. 특히 법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일수록 그렇다. 넷째, 에피케이아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에는 장상에게 정확한 판단을 의뢰하는 것이 좋으며, 에피케이아의 사용이 정당하다고 판단되면 원칙적으로 장상에게 의뢰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행위를 무효시키는 행위 무효법(inalidaining laws)이나 특정한 법적 행위의 이행 자격을 무효시키는 자격 무효법(incapaci-tating laws)에는 에피케이아가 적용될 수 없다. 에피케이아는 통념적으로 개인적인 일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나 에피케이아의 권리는 공법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된다. 비상시에 민주주의 공동체의 정부는 그 공동체의 본질적 목적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헌법에 정해진 공권력을 초과해서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는 가능한 빨리 입법권자에게 전말을 밝혀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 양심)
※ 참고문헌 B. Haring, Das Gesetz. Christi, Bd. 1, Erich Wewel Ver-lag, 8. Auf., 1967/ K. Hörmann, Epikie, 《LCM》, pp. 358~362/ G. Virt, Epikie, Neues Lexikon der christlichen Moral, Innsbruck · Wien, Tyrolia Verlag, 1. Auf., 1990, pp. 147~149/ K.H. Peschke, Christian Ethics, vol. I, General Moral Theology, C. Goodlif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86, pp. 264~267(김 창훈 역, 《그리 스도교 윤리학-제1권, 기초 윤리 신학》, 분도출판사, 1990). [金政友]
에피케이아
〔라 · 영〕epik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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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