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오, 살라미스의 (310/320~402/403)

〔그〕Epiphanius Samim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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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 성인.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 성인.

성인. 살라미스(오늘날의 파마구스타)의 주교(366/367~402/403). 축일은 5월 12일.
〔생애와 활동〕 310~320년 사이에 남부 팔레스티나의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 근방에서 태어났으며, 수도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가자(Gaza)의 힐라리온(Hilarion, 291~371)에게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로 이집트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그노시스주의자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세에 자신의 고향인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수도원을 세우고 30년 동안 수도원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철저한 니체아 공의회파였던 에피파니오는 셀레우키아 교회 회의(359) 때 아리우스주의자인 체사레아의 아카치우스(Acacius, +365)의 지지자였던 엘레우테로폴리스의 주교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의 관계가 나빠지자, 키프로스(Cyprus)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주교직의 수행 : 에피파니오는 366/367년 키프로스 동쪽 해안에 있는 살라미스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수도복을 입고 생활하면서 수도 생활 방식을 고수하였다. 35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그는 신자들로부터 매우 큰 존경을 받아 371년 발렌스(Valens, 364~378) 황제 치세때 일어난 아리우스파의 압박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수도원 제도의 촉진과 정통 교리의 옹호였다. 374년에 그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정박자》(碇泊者, Ανκοράτους)를 저술하였으며, 374~377년에는 여러 이단을 반박하는 《약 상자》(ITαναρoν)를 저술하였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Laodiceae, 315~392?)의 오류를 가장 일찍 알아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아폴리나리스의 그리스도론 문제와 멜리티우스(Melitius) 이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72년에 토론을 벌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에피파니오는 니체아 공의회파인 바울리노(Paulinus Antiochi, +382)와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와 함께 교황 다마소 1세(366~384)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또한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던 그는 393년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성화가 그려진 장막을 찢어버리고,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 앞에서 오리제네스주의를 격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요한 주교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에피파니오는 반(反) 오리제네스 입장을 취한 예로니모와 함께 국부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그것은 예로니모가 설립한 베들레헴 수도원의 수도자 한 사람이 그곳의 관할권을 가진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의 허락 없이 에피파니오에게서 부제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요한은 이 수도원을 파문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에우세비오는 요한에게 사죄하는 동시에, 그에게 오리제네스주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요한은 39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 384~412)에게 중재를 요구하였고, 테오필루스는 에피파니오를 교황 시리치오(384~399)에게 고소하였다.
이로써 논쟁은 서방으로 넘어갔다. 또한 400년에 에피파니오는 오리제네스주의 논쟁을 구실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그리소스토모(Joanmes Chrysosto-mus, 347~407)의 경쟁자인 테오필루스를 부추겼다. 이 당시 니트리아(Nitria) 사막에서 온 네 명의 수도자들(일명 키다리 형제들)이 테오필루스의 성직 수행과 생활 방식을 비판하였다. 이에 테오필루스는 자신의 확신에 기초하여 이단으로 비판한 오리제네스주의를 따르는 그들을 고발하였다. 이 수도자들이 요한 그리소스토모에게 지지를 요청하자 요한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테오필루스는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결정을 미리 막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팔레스티나와 키프로스의 주교들에게도 지역 교회 회의를 열 것을 권유하였다. 에피파니오는 이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402년 가을 자신의 의향에 맞는 교회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여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환대를 거절하고 오리제네스주의에 대한 단죄와 오리제네스파인 키다리 형제들의 추방을 요구하였다. 더구나 에피파니오는 요한 그리소스토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그와 함께 성찬례를 지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요한의 허락 없이 부제품을 주었으며, 요한의 적대자들과 협의하고, 요한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면서 공개적으로 그를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에피파니오는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선의를 이해하고, 키다리 형제들과 대화하면서 냉정을 되찾아 참나무 교회 회의(403)가 열리기 바로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에피파니오는 돌아가는 도중인 403년 5월 초,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가 그의 축일로 거행하는 12일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저 서〕 에피파니오는 알렉산드리아, 가빠도기아의 교부들과는 달리 독창적으로 신학을 전개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특히 성서에 매우 박식함을 드러냈다. 에피파니오는 주로 이단론을 다루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는 《약 상자》에서 아가서 6장 8절에 따라 80개에 이르는 모든 이단에 알맞는 처방(약)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 작품을 저술하기 위하여 히폴리토(Hippolytus, +235?)의 《모든 이단에 대한 논박》(Refutatioomnium haeresium),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Irenaeus, 130~200)의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외에도 그가 접할 수 있는 이단에 관한 여러 작품을 참조하였다. 이러한 인용 때문에 《약 상자》에는 그렇지 않으면 없어졌을 이단자의 작품들과 귀중한 단편들이 남아 있게 되었다.
팜필리아(Pamphilia) 지방에 있는 시에드라의 공동체가 자신들에게 삼위 일체 신앙, 특히 성령론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하자, 에피파니오는 《정박자》에서 수많은 이단, 특히 세례 신앙과 성서의 증언을 토대로 아리우스주의자와 성령 적대론자들을 논박하였다. 이 이단들은 《약 상자》에서 다시 상세히 서술되고 비판되었다. 《약 상자》는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던 스토아 학파 · 플라톤주의 · 에세네파 · 사마리아주의 등을 다루며, 그리스도교 이단에 관해서는 시몬에서 시작하여 메살리아파 혹은 기도파로 끝나고 있다. 이 책의 각 권 앞에 있지만 에피파니오가 저술하지 않은 《발췌한 개요》(Ανακεόαλαωις)는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알고 있을 정도로, 출판되자 곧 널리 유포되었다. 에피파니오의 박식함은 일종의 성서 백과 사전인 《성서의 척도와 중량》(De mensuris et ponderibus), 대사제의 흉갑에 있는 열두 보석에 관한 작품으로 티로의 주교 디오도로(Diodorus)에게 헌정한 《열두 보석》(De duodecim gemmis)에서 나타난다. 그 밖에 모든 사변 신학 · 철학과 마찬가지로 오리제네스 주의를 격렬히 논박하는 편지들이 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가 오리제네스의 로고스론에서 그리스도의 종속적 입장을 증거로 끌어내기 때문에 오리제네스의 로고스론을 논박했으며, 《약 상자》에서 그를 이단자로 다루었다.
※ 참고문헌  R. Gögler, 《LThK》 3, 1959, pp. 944~9461 W.A. Bienert, 《LThK》 3, 1995, pp. 723~7251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Freiburg-Basel-Wien, 2000.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