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람

〔히〕עֵילָם · 〔그〕Aιλαμ · 〔라〕Aelam · 〔영〕Elam

글자 크기
9
▲ 초가 잔빌에 있는 지구라트 형식의 신전(위)과 창을 들고 있는 엘람인 사수.
1 / 3

▲ 초가 잔빌에 있는 지구라트 형식의 신전(위)과 창을 들고 있는 엘람인 사수.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Khuzestan) 지역에 있었던 고대 국가. 좁은 의미에서 엘람은 이란의 남서 지역 파르스(Fars)를 말하며, 수도는 안산(Anshan)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엘람은 수사(Susa)가 전성기 때 영향력을 행사한 현재 이란의 대부분을 가리킨다.
기원전 2000년대 말에서 1000년대 초까지의 쐐기 문자 문헌에 의하면 엘람은 여러 주변 국가들의 집합체였다. 엘람 안에 아완(Awan), 쉬마스키(Shimashki), 안산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 엘람은 서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동부 · 카스피아 해 · 페르시아 만까지, 동쪽으로는 카비르(Kavir)와 루트(Lut)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기원전 7세기에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이 지역을 침공하였을 때 대거 수사 지역으로 피난하였다. 성서에 언급된 엘람은 이 당시의 수사를 지칭한다.
[역 사] 엘람의 역사는 고대 근동의 역사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엘람은 중앙 아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만, 아라비아 등과 활발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엘람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경제 활동에 필요한 금속 · 돌 · 나무 등 자원이 풍부하였고, 흑요석(黑曜石, lapis lazuli)과 동(銅)이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가기 위해서는 엘람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원 엘람 시대(기원전 3200~2700) : 기원전 4000년경에 세워진 엘람은 자그로스 산맥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간에 문화를 형성하였고, 기원전 3200년부터는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000년대 후반부터 수사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Uruk)와 교역하였다. 이 시기의 말기에 수사인들은 원통형 도장(cylinder seal)이 찍힌 토판 문서, 토판 문서 봉투(clay envelop)와 물표(clay token)를 이용하여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토판 문서 봉투에 물표가 상징하는 그림 문자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토판 문서 글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 당시 문서를 통하여 대대적인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엘람 시대(기원전 2400~1500) : 이 시대에는 아완, 쉬마스키, 그리고 수칼마(Sukalimah) 왕조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우르 제3 왕조, 고대 바빌론과 카시이트 제국의 시작과 대응된다. 이 시대는 엘람과 메소포타미아가 경제적인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갈등과 때때로 정략 결혼에 의한 화해의 연속이었다.
아완 시대(기원전 2400~2100)에는 아카드 왕조가 수사를 자신들의 연방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사르곤 대제(기원전 2334~2279)와 그의 아들 리무쉬(Rimush)는 케르만 지역까지 침공하였으며, 당시 아완의 왕이었던 루흐-이산(Luh-Ishan)과 히시프라시니(Hishiprasini)는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후 아카드의 나람신(Naram-Sin)은 아완과 조약을 맺고 엘람어와 아카드어로 쓴 이중 돌기둥 쐐기 문자 문헌을 남겼다. 최근 이신(Isin)에서 발견된 쐐기 문자 문헌에 의하면, 우르 제3 왕조의 창건자 우르남무(Ur-Nammu)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아완 왕조의 마지막 왕 푸추르-인수시나크(Puzur-Inshushinak)가 엘람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고원 지대 전체와 수사를 점령하였다.
쉬마스키 왕조(기원전 2050~1860)가 '고원 지대' 를 장악하고 있을 때 수사는 우르 제3 왕조의 연방이었다. 이왕조의 6대 왕인 킨다투는 기원전 2004년에 수사와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우르 제3 왕조를 종식시켰다. 우르 제3 왕조의 마지막 왕인 입비-신(Ibbi-Sin, 기원전 2028~2004)은 포로로 엘람에 잡혀 가 죽었다. 엘람의 승리는 <우르의 애곡>(Lamentations of Ur)이라는 수메르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엘람의 바빌로니아 지배는 함무라비 왕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엘람은 주변 국가들과 무역을 통해 견고한 외교망을 구축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문서상의 근거는 없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발루키스탄 그리고 페르시아 만과의 교역 물품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수칼마 왕조(기원전 1970~1500)는 쉬마스키의 9대 왕인 에바라트(Ebarat)가 수사에서 왕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안산과 수사의 왕' 이라고 하였으며, '왕' 이란 호칭 대신 '수칼마' (Sakkalmah) 즉 '위대한 섭정관' 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수칼마' 는 두 명의 수칼(Saukkal, 섭정관)을 두었다. 겨울에 수칼마가 수사에서 지내는 동안 엘람과 쉬마스키의 수칼들은 중앙 아시아를 다스리게 하였고, 수칼마가 안산이나 쉬마스키에서 지내는 동안은 수칼들이 수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수사가 이 왕조의 수도가 되었을 때 '고원 지대' 의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엘람의 왕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수사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경제 · 법률 문서는 아카드어로 쓰여졌다.
중기 엘람 시대(기원전 1500~1100) : 이 시기에는 키디누이드(Kidimides) 이기할키드(lgihalkides) , 그리고 슈트루키드(Shutrukides)라는 3개의 왕조가 있었다. 이 기간에 수사의 본격적인 '엘람화' 가 시작되었다. 키디누이드 시대에 텝티-아하르(Tepti-Ahar) 왕은 수사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던 것 같다. 기원전 14세기 카시이트 왕 쿠리갈추 1세(Kurigalzu I)에 의해 키디누이드가 멸망하였다. 이후 이기할키드가 카시이트족과 동맹하여 일어났다. 이 기간에는 특히 엘람어가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사용되었고, 고원 지대의 신들이 수사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보다 중요한 신으로 등장하였다.
운타쉬 나피르샤(Untash-Napirsha)는 초가 잔빌(Chogha Zanbil)에 지구라트 형식의 신전을 건축하였다. 이 신전은 수사의 최고신인 인수시나크(lnshushinak)에게 바쳐졌으며, 나피리샤(Napirisha) 신을 위한 신전도 지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엘람의 신들이 최고의 신들로 등장하였다. 초가 잔빌은 지구라트 · 신전 · 왕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엘람 건축 양식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카시이트와의 관계가 소홀해지면서 엘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슈트루키드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그의 아들슈트루크-나훈테(Shutruk-Nahhunte)는 메소포타미아의 카시이트에 적대적이었으며 수사를 침공하여 나람신 돌기둥(Naram-Sin stele), 마니쉬티쉬(Manishish) 조각상 비문, 함무라미 법전을 약탈하였다. 또 그의 아들 쿠티르-나훈테는 카시이트 제국을 멸망시켰다. 창세기 14장에나오는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Chedolaomel)은 바로 쿠티르-나훈테를 가리킨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생 실하크-인수시나크(Shilhak-Inshushinak)가 신전을 재건축하고 메소포타미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수사 지역에만 20개 신전을 복원하였다.
신 엘람 시대(기원전 1000~539) : 이 시기에 엘람은 서쪽으로는 아시리아 제국과 바빌론 제국의 전쟁, 북동쪽에서는 인도-유럽인들의 침입, 메데인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 확장으로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9~7세기에 엘람은 비옥한 초생달(Ferile Cres-cent) 지역의 패권 다툼에서 아시리아의 경쟁자로 등장하였다. 기원전 720년에 훔반-니카쉬(Humban-Nikash)는 데르(Der)에서 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기원전 721~705)와 전쟁을 하였다. 엘람은 바빌론 왕 메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사르곤 2세는 엘람의 북서쪽을 점령하였고, 그의 아들 산헤립(기원전 704~681)은 메로닥-발라-단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을 즉위시켰다. 할루슈-인수시나크(Halushu-Inshushinak, 기원전 698~693)는 바빌론을 점령하였다가 쿠두르-나훈테(Kudur-Nahhunte)에 의해 살해되었다. 뒤를 이은 훔반-니메나(Humban-N-Nimena, 기원전 692~689)는 군대를 정비하여 바빌론 · 메데와 힘을 모아 아시리아 제국과 전쟁을 하였다. 그 후에도 훔반-할타쉬 1세(Humban-Haltash 1, 기원전 688~681)와 훔반-할타쉬 2세(기원전 680~675)가 아시리아와 전쟁을 하는 동안 산헤립이 죽고 그의 아들 에사르하돈(Esarhaddon, 680~669)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당시 엘람의 왕 우르탁(Urtak, 기원전 674~665)과 외교 관계를 맺지만 에사르하돈의 뒤를 이은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 기원전 668~627)은 우르탁을 살해하였다. 그를 이어 텝티-훔반-인수시나크(Tepti-Humban-Inshushiak, 기원전 664~653)가 아수르바니팔과 울라이(Ulai)에서 싸웠지만 지고 말았다.
그 후에 그의 아들들이 바빌론의 왕 샤마쉬-슈무-킨(Shamash-shumu-kin)과 나부-벨-슈마티 (Nabu-bel-shumati)와 함께 아수르바니팔에게 대항하였지만 또다시 졌다. 기원전 649년 아수르바니팔은 엘람의 군대를 쳐부수고 수사를 초토화하였으며, 에즈라서 4장 9-10절의 기록대로 전쟁 포로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일부는 수사에 남아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후 엘람은 독립 국가로 행세하지 못하고 언제나 바빌로니아의 위성 국가로 남게 되었다.
아케메니드(Achaermenid) 시대(기원전 539~331) :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 고레스 대왕(기원전 559~530)에 의하면 그 당시 안산과 수사에는 다른 왕국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원전 539년 수사는 고레스에 의해 함락되고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가 즉위하면서 수사는 화려하게 재건되었고, 역대 페르시아 임금들이 사용한 겨울 궁전이 건축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침략할 때 수사는 교두보역할을 하였다.
이 기간에 아람어가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재정 문서는 모두 엘람어로 발견되었다. 이는 수사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경제 문서 서기관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재정 문서를 작성하였다는 증거이다.
[성서에서의 언급] 성서에서 엘람이 가장 잘 알려져있는 것은 창세기 14장이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포함한 여러 왕들은 사해 지역의 왕들과 전쟁을 하였다. 이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던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런데 성서에는 엘람이 아시리아 · 아르박삿 ·룻 · 아람 등과 함께 셈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다(창세 10, 22). 또한 엘람의 수도인 수사를 요새 도시라고 부르고있다(느헤 1, 1 : 다니 8, 2 : 에스 1, 2).
엘람은 활 쏘는 자들이 많은 땅으로 묘사되어 있다(이사 22, 6 : 예레 49, 35). 또한 메데와 함께 고레스 통치하의 바빌론을 공격하였으며(이사 21, 2. 9),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되었던 장소이기도 하였다(이사 11, 11). 예레미야는 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하는 나라 중 엘람을 꼽았고(예레 25, 25), 에제키엘은 엘람을 그 무덤 위에 애가가 슬피 불려질 나라라고 하였다(에제 32, 16. 24). 또한 엘람 사람들은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사마리아에 정착된 민족 중 하나이다(에즈 4, 9-10). 사도 행전 2장 9절에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엘람인도 포함시켰다.
[언어와 문자] 엘람어는 어떤 언어와도 연관이 없는 고립어이다. 엘람어는 고대 엘람어(기원전 2500~2000), 중기 엘람어(기원전 13~7세기), 아케메니드 엘람어(기원전 6~4세기)로 구분된다. 특히 아케메니드 엘람어는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 문서와 궁중 문서에 고대 페르시아어와 아카드어와 함께 쓰였다. 19세기 중엽 아케메니드 엘람어가 먼저 판독되었고, 20세기에 와서 중기 엘람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언어는 아직도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가장 오래된 엘람어 글자는 기원전 2000년대 초에 사용되었던 '원 엘람어' (Proto-Elamite)로, 아직 판독하지 못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는 직선형 쐐기 문자가 사용되었다. 아카드 왕조(기원전 24~23세기)부터는 이들 글자가 수메르-아카드 쐐기 문자에 의해 대치되었다. (→ 바빌론 ; 아시리아 ; 페르시아)
※ 참고문헌  P. Amiet, L'antiqite orientale, Paris, Presses Universitaire de France, 5th ed., 1995/ G.G. Cameron, History ofEarly Iran, New York, Greenwood Press, 1968/ -, Persepolis Treasury Tablets, Oriental Institute Publications, vol. 65,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48/ E. Carter . M.W. Stopler, Elam : Surveys ofPolitical History and Archaeology, Berker-ly, Univ. of California Press, 1984/ R.T. Hallock, Persepolis Treasury Tablets, Oriental Institute Publications, vol. 92,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69/ W. Hinz · H. Koch, Elamisches Woerterbuch. Achaeologische Mitteilungen aus Iran, Erganzungsband 17. 2 vols, Berlin, D. Reimer, 1987.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