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우테로 (?~189?)

〔그〕Eleuthe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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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순교자. 교황(174~189?). 축일은 5월 26일. 문헌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에는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로 표기되어 있다.
[생애와 활동] 엘레우테로는 본래 그리스인으로 에피루스(Epirus)의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아분단시우스(Abundantius) 혹은 히분디우스(Hibundius)라고 전해진다. 해제시포(Hegesippus, 2세기)는 엘레우테로가 교황 아니체토(154/155~166?)의 부제였다고 하였다. 또한 교회사가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는 엘레우테로가 교황으로 선출된 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재위 17년인 177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엘레우테로가 교황으로 즉위한 연도를 174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가 교황으로 즉위하던 시기는 로마 교회의 권한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이단들이 성행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은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menaeus, 130~200)가 소위 "모든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저술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로마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그 교회가 발표한 계율이 주교들의 종교적 계승에 의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왔다는 점을 보여 줄 것이다. 이는 자기 만족이나 헛된 영예를 위하여 맹목적으로 혹은 오류로 인하여 추구할 필요가 없는 가르침들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혼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는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교회, 즉 전세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바로 로마 교회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신자들이 사도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바로 로마 교회 때문이다." 교황 엘레우테로는 교황직 수행 기간 동안에 당시 성행하던 이단들과 논쟁하고 맞서야 했는데, 즉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외 그노시스주의(Gnosticismus)였다.
엘레우테로 교황과 관련된 한 전설에 의하면, 그가 교황직을 수행하던 시기에 영국의 일부를 통치하고 있던 루치우스(Lucius) 왕이 교황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푸가시오(Fugatius)와 다미아노(Damianus)를 파견했다고 한다. 중세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루치우스의 개종과 관련된 이 전설을 플뢰리(Claude Fleury, 1640~1723)를 비롯한 몇몇 저자들은 전설이 아닌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국인들을 개종시키는 문제에 최초로 관심을 보였던 교황은 그레고리오 1세(590~604)이므로, 교황 엘레우테로가 루치우스의 요청을 받고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외에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엘레우테로의 업적으로는 주일에 지내던 부활 대축일을 그대로 고수하였다는 것과 일부 신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음식의 청결과 정결에 관한 유대 관습들을 폐지하였다는 것이다. 에우세비오는 그가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 126~193)에 의해 192년에 순교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콤모두스(Commodus, 180~192) 황제 재위 10년인 189년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 15년동안 매우 신중하게 교회를 이끌었던 교황 엘레우테로는 사망한 후, 다마소 1세(366~384)의 전기에 따르면, 바티칸에 묻혔다. 하지만 최근 발굴에 따르면 그곳에 묻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황이 순교하였던 상황을 확실하게 전해 주는 기록은 많지 않으나, 오늘날의 순교자 전기와 시간 전례서 등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칭송하고 있다.
[이단 논쟁] 교황 엘레우테로가 즉위 초기에 대면하여야 했던 몬타누스주의는 교회가 이미 세속화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보편적인 교회를 배척하였던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엄격한 윤리적 개혁과 금욕 혹은 동정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순교를 열망하고 자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천년 왕국을 내세워 종말론적인 내용을 설파하였는데 '라틴 신학의 아버지' 라 불리는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220?)조차도 훗날 이 설을 신봉할 정도였다. 엘레우테로 교황이 즉위하였을 당시 몬타누스주의는 소아시아의 신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었으며, 갈리아 지역까지 확산될 위험성이 있었다. 포티노(Pothinus, +177)가 사망한 뒤 리용의 주교로 선출된 이레네오는 177/178년에 교황을 방문하여 갈리아 지역의 순교자들과 리용의 신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단으로 성장하고 있던 몬타누스주의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테르툴리아노를 비롯한 여러 저자들에 의하면, 교황은 초기에 몬타누스의 주장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심지어는 그 주장을 추종할 정도였으나 몬타누스주의의 활성화는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몬타누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영적 준비를 위하여 모든 신자들이 2주간 동안 채식 위주의 음식만을 먹으며 항상 엄격한 극기를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친 반면에, 교황은 신자들에게 모든 종류의 육식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로 보아 교황이 몬타누스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교황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소위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주의를 주장했던 발렌티누스주의 (Valentianismus)였다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2-497/496)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그리스 철학 및 세트파(Sethoitae)의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주의를 혼합하면서 성서를 그노시스적 의미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체계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영적 존재들 즉 '에온' (aeon)들이 유출되는데, 30개의 에온이 형성되었을 때 최하층에 속하는 에온이 물질과 결합되어 지상 세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은 암흑의 세계이며, 구원이란 그 암흑으로부터 광명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에온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의 육체를 빌려 활동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기 전에 그 육체로부터 떠났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구원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그노시스주의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교회제도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엘레우테로 교황은, 교회가 카리스마가 아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는 사도적 전승에 기초한 제도에 의해서 운영되기를 바랐기에, 몬타누스주의보다도 그노시스주의를 더 위협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 그노시스 ; 몬타누스주의)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pp. 115~117/ Gaston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urich, Fraumunster, 1944, pp. 24~25/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1996, pp. 11~12/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김성태, 《세계 교회사》 I,성바오로출판사, 1990.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