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지오 (588~660)

〔라〕Elig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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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지오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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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지오 성인.

성인. 프랑스 누아용-투르네(Noyon-Tournai)의 주교. 금세공 기술자 · 대장장이 · 모든 금속 장인들의 주보 성인이며, 택시 운전 기사들도 주보로 모시고 있다. 축일은 12월 1일.
[생 애] 588년에 프랑스 중남부 지방에 있는 리모주 (Limoges)의 북쪽 샤틀라(Chaptlat, 현재의 Haute-Vienne)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프랑스 아키텐(Aquitaine) 지방 사람이거나 로마계 프랑스인인 에우케리오(Eucherius)와 테리지아(Terrigia)였다. 부유하지 않았던 그의 부모는 일찍 엘리지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리모주의 유명한 화폐 제조장인 아보(Abbo)에게 보내어 화폐 제조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그 시기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엘리지오는 파리로 가서 왕실 세공장인 보봉(Bobbon) 밑에서 일을 하였다. 보봉의 추천으로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타르 2세(Chlotar I , 584~628)는 값비싼 보석들을 박은 금관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이 일을 수행하는 동안 엘리지오의 성실하고 정직한 태도가 마음에 든 왕은 그를 마르세유(Marseille) 조폐소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예술 작품과 관계되는 많은 일을 했는데, 그중에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Marinus Tourenus, 316?~397) 무덤,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250)의 파리 무덤, 성 디오니시오 성당 성가대석의 십자가와 그 성당에 보관된 보물 중 하나인 벽옥 마차, 누아용의 성 루포성당에 있는 성작 등이 있다.
클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 605~639)는 629년에 아버지의 벗이었던 엘리지오를 자신의 참사 위원장으로 위촉하였다. 이후 엘리지오의 명성은 높아졌으며, 외국의 사절들은 왕을 알현하기 전에 먼저 그를 찾아와 만나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많은 자선 기금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한편, 로마인 · 갈리아인 · 브르타니아인 · 색슨인 · 무어인 등 날마다 마르세유로 끌려오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몇 군데에 수도원을 세우고, 왕의 허락을 얻어 하인들을 각 도시와 지방으로 보내서 처형당한 죄인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도 치러 주었다. 궁정에서 생활의 모범이 되었던 그는, 그의 동료요 훗날 루앙(Rouen)의 주교가 되는 우앙(Ouen, 610~684)과 함께 성 골롬바노(Columbanus, 543~615)가 프랑스에 도입한 아일랜드의 수도 규칙에 따라 생활하였다. 엘리지오는 632년 솔리낙(Solignac)에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이 수도원의 운영을 르마클(Remacle, +663)에게 맡겼는데, 후에 이 수도원은 스타블로(Stavelot)의 베네딕도 수도회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파리의 시테(Cite) 섬에 300명의 동정녀들이 아우레아(Aurea, +666) 수도원 원장의 지도 아래 생활하는 수녀원을 설립하여 리모주의 주보 성인인 성 마르티알리스(Marialis, +250)에게 봉헌하였다. 그리고 이 수녀회에 아일랜드의 수도 규칙을 도입시켰으며, 훗날 이 수녀회는 성 엘리지오 수녀회 혹은 성 아우레아 수녀회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또한 엘리지오는 성 바오로 성당을 건축하고 파리에 있는 성 마르티알리스 성당도 재건하였으며, 프랑크족의 수호 성인인 투르의 성 마르티노와 왕의 주보 성인이 된 성 디오니시오의 유해를 모시는 여러 개의 아름다운 성당들을 건립하였다. 다고베르트 1세가 사망하자 난틸드(Nanthide) 여왕이 섭정하게 되었고, 엘리지오와 그의 동료인 우앙은 궁정을 떠나 사제가 되었다. 640년 3월 13일 누아용-투르네의 주교가 사망하자, 교구의 모든 사제와 신자들의 만장 일치로 엘리지오가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특히 수도원을 세우는 일과 선교 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그의 관할 구역에 속한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플랑드르의안트웨르펜(Antwerpen) · 프리지아의 아일랜드 · 수에비(Suebi)의 사람들과 해안가에 흩어져 사는 여러 소수 부족들을 개종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654년에 그는 파리의 생 드니(Saint-Denis) 수도원을 면속 수도원으로 만들었으며, 자신의 주교좌가 있는 누아용 시에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녀원의 원장이 성녀 고데베르타(Gode-berta, +700)였다. 또한 성 귄시노(Quinctinus)의 유해를 발견하고 성인의 이름을 딴 성당을 짓고 부속 수도원을 세워 아일랜드의 수도 규칙에 따라 수도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성 피아토(Piatus +286)와 그 동료들의 유해도 발굴하였다. 엘리지오는 누아용에서 660년 12월 1일에 사망하였다.
[저서 및 공경] 엘리지오의 설교집이 전해 오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이교도 관습을 규탄하며 최후의 심판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645년에 쓴 서한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서한에서는 가오르(Chaors)의 주교 데시데리오(Desiderius, +655)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 외에도 14개의 설교들이 전해지나, 그의 설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특히 안트웨르펜 지방과 투르네, 겐트(Ghent)의 쿠르트레(Courtrai) 부르주(Bourges) , 두에(Douai) 지방에서 각별한 공경을 받고 있다. 중세 시대에 성인의 유해는 특별한 공경을 받았으며, 881년 · 1066년 · 1137년 · 1255년 · 1306년에 걸쳐 여러 곳으로 옮겨지면서 공경되었다. 그리고 1952년 7월 22일에는 네덜란드에 있던 성인의 유해를 누아용으로 이전하는 성대한 예식이 거행되었다.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에서 엘리지오는 대개 주교 복장에 오른손에는 십자가, 왼손에는 금으로 부조한 작은 교회를 든 모습으로 나온다.
※ 참고문헌  V.I.J. Flint, 5, p. 2741 G. Bardy, 《Cath》 4, pp.29~30/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maire hagiographique, Belgique, Brepols, 1991, p. 164/ 《ODCC》, pp. 538~539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p. 140~141.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