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초 스페인의 엘비라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
[회의 개최 연도] 현재 전해지는 교회 회의록에는 이 회의가 5월 15일에 개최되었다고 적혀져 있을 뿐, 정확한 연도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324년
혹은 325년에 해당되는 "스페인 시대 364년"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스페인 시대라고 쓰는 것은 5세기부터 시작된 관습이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연대 결정에 있어서 학자들간에 논란이 일었다. 모랭 (P. Morin)은 코르도바의 호시오(Hosius Cordubensis, 257?~357)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219~250년 사이에 회의가 개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 회의록 역시 주요 인물로 호시오를 꼽고 있으며, 이 주교는 250년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틸레몽(LeNain de Tillemont) 역시 교회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였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엘비라 교회 회의에 참석한 코르도바의 호시오가 주교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295년 이후부터 아를 공의회가 개최된 314년 이전에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일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 이전인 300~303년 으로 보고, 다른 일부 학자는 그 이후라는 견해이다. 후자의 견해를 가진 학자들(H. Kocj, P. Hardouin)은, 증거자들에 관한 25조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고발한 이들에 관한 73조는 교회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306~314년 사이에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고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견해를 지닌 학자들(Tilemomnt, Ceillier, Hefele, Duchesne)은, 교회 회의가 박해 이후에 등장하는 문제인 배교자 문제를 다루지 않았음에 주목하였다. 일부 조항이 우상 숭배의 죄를 다루고 있지만, 박해 시대보다는 평화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이방인들과의 공존과 여기에서 발생하는 잘못이 의제로 등장하고 있는 점은 교회 회의가 박해 이전에 개최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300~303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며, 이 의견이 현재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회의 장소와 참석자] 장소 : 엘비라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 역시 논란거리이다. 플리노(Plino)에 따르면, 로마 제국 당시 엘비라라는 라틴어(Eliberis, 또는 Illiberis) 지명을 가진 곳은 두 곳이었다. 우선 갈리아(Gallia)의 나르본(Narbone) 지역의 카우코-일리베리스(Cauco-iliberis)로, 현재 루시용(Rousillon)의 콜리우르(Colioure)이다. 또 한 곳은 오늘날 안달루시아(Andalusia)의 그라나다(Granads)에서 멀지 않은 베티카(Betica) 지역의 일리베리스(Illibe-ris)이다.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후자의 지역에서 공의회가 개최된 것이 확실하다. 갈리아에 있는 엘비라에는 주교좌가 설립되어 있지 않았고 스페인 북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부 스페인에 있는 주교들이 모여 공의회를 개최하기에는 너무 부적절하다. 또 수 세기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980년경에야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티카 관구의 엘비라에는 이미 주교좌가 설립되어 있었고 지역 자체가 시에라 네바다(Siera Nevada) 초입에 있어 공권력의 관심을 끌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도 공의회를 개최하는 데적절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참석자 : 엘비라 교회 회의는 단순히 관구 공의회의 성격만을 띠지 않았다. 이는 참석자들의 명단을 통해 알수 있는데, 교회 회의록에는 "26명의 참석 신부들과 부제들,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주교들은 말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회의록에 서명한 명단을 통하여 이들이 베티카, 루시타니아(Lusitania) , 카르타고(Cartagine) 타라고네세(Taragonese), 갈리치아(Galina) 등 5개 관구에 속한 37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교들과 신부들과 부제들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시 스페인의 교구는 6개 관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마우레타니 틴지탄(Maureta-nieTingitane) 관구만이 불참하였다. 주교들은 19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주교들 중 펠릭스 (Felix Accitanux) 주교가 아마도 가장 연로하다는 이유로 이름이 맨 처음 나오고, 또 교회 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부는 26명이 참석하였고, 이 중 24명이 자신의 출신 지역과 함께 회의록에 서명하였다. 교회 회의 교부들 중 호시오는 그 당시의 주요 인물로, 훗날 콘스탄틴 대제의 친구요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되며, 니체아 공의회와 사르디카 교회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853년 수아송(Soissons) 교회 회의 또는 적어도 이 교회 회의사를 저술한 이는 엘비라 교회 회의의 조항을 인용하면서 교황
사절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관구 공의회나 국가 공의회에 교황이 자신의 사절을 보내는 것은 당시까지의 관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아무튼 엘비라 교회 회의는 스페인에서 개최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첫 교회 회의라고 할 수 있다.
[회의의 중요성] 엘비라 교회 회의의 중요성은 결정 사항들이 남아 있는 라틴 교회의 첫 교회 회의라는 점 외에도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상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스페인 교회 상황을 알 수 있다. 사실 왜 엘비라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교회 회의의 결정들은 교의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개최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결국 엘비라 교회 회의는 신앙에 관한 문제가 위험에 처해서가 아니라 스페인 교회의 종교적 필요에 따라 개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이베리아(Iberia) 반도 내에서, 특별히 베티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어 제사장(famines, 2~4
조, 55조), 이두(二頭) 정치가(duumvir, 56조), 전차 경기자와 코미디언(62조, 69조) 등 다양한 계층과 신분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자들 역 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고, 이는 충분히 그리스도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이 정한 조항들 중 일부는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도 용서해 주지 않을 정도로 매우 엄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엄격함은 우상 숭배, 간음 또는 사음(fornicatio) 그리고 살인죄와 같은 중대한 죄에 대해 당시까지 부과한 엄격한 규정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일부 학자들은 엘비라 교회 회의의 교부들이 지나치게 엄격주의에 빠졌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예를 들어 B. Gams). 또 공의회 교부들이 노바시아누스주의(Novatianismus)에 물들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P. Morin, J. Herzog)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적다. 초기 교회의 규율들에서도 엄격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노바시아누스주의와 엘비라 교부들 사이에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이 세상에서 이상적이고 흠 없는 교회의 구현을 추구한다면서 교회의 순수성을 더럽힐 수 있는 모든 죄인들을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더 나아가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대죄에 대해 교회가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엘비라 교부들은 당시의 교회 규율과 원칙에 따라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결정 내용] 현재 81개의 조항이 전해지고 있다. 이 조항들은 교회 규율에서 중요성을 지니며 9세기 이후 교회 안에 널리 알려졌다. 일부 조항은 해석에 있어 난점을 보이며, 교부들이 어떤 이유로 이 규정을 정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조항들도 있다. 또한 81개의 조항이 모두 다 엘비라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M. Meigne). 81개의 조항을 A그룹(1~21조), B그룹(63~75조), C그룹(그 외 조항들) 등으로 나누면서, A그룹은 엘비라 교회 회의가 정한 것이고 내용상 이 교회 회의가 300~303년에 개최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였다. B그룹은 니체아 공의회 이전의 공의회에서 찾을 수 있는 조항들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본다. C그룹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305)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81개의 조항은 후에 이루어진 법령 수집본(collection locale)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81개 조항은 크게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즉 성직자들의 삶, 초기 그리스도교 삶이 지닌 열정의 보존, 살인과 우상 숭배, 그 외의 중한 죄들에 대한 처벌 등이다.
3세기 말 스페인에서는 결혼한 남성 신자도 부제와 신부, 나아가 주교까지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품 전에 독신이었던 이는 수품 후에도 계속 이를 유지하도록 하 였다. 엘비라 교회 회의는 성직자들에게 독신 생활을 의무로 부과함으로써 신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33조). 이 조항은 서방 교회에서 성직자들에게 독 신 생활을 의무로 규정한 첫 조항이었다. 27항에서는 성직자가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여성이 누이나 딸이고, 이들 역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동정녀여야 한다고 정하였다. 또한 정주(定住, residentia)의 의무를 외면하고 먼 곳으로의 여행이나 시장 출입(18조), 간음(19조), 돈놀이(20조) 등을 금지하고 있다. 세례성사의 통상 집전자는 주교이지만 더 이상 예비 신자들의 발을 씻어 주거나 신입자(新入者)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아야 한다(48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주교의 안수, 즉 견 진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며(77조), 법적 참회(penitence canonique)에 처한 죄인들과 이단자들, 배교자들 그리고 벌을 다 받은 이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도 주교만의 권한이다(22조, 32조, 46조). 주교만이 자신이 파문에 처한 이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53조).
엘비라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을 쇄신하고 강화하기를 원하여, 신자들에게 극기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였다. 매주 토요일에 하는 두 번의 단식(26조) 외에도 더위 때문에 7월과 8월을 제외하고, 매달 단식을 하도록 하였다(23조) 신자들에게 딸을 이방인들이나 가톨릭 교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이단자들, 열교자들, 유다인들, 무엇보다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과 결혼시키지 말도록 요구하였다(15~17조). 돈놀이를 하지 않도록 경고하며(20조) 3주 연속해서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말도록 하였다(21조). 세례 후에 젊은이들이 사음죄나 간음죄에 빠지지 않도록 요구하였고(31조), 신자들이 자신들의 종들을 위해 집 안에 우상을 두지 말도록 하였다(41조). 또한 수확물에 대한 축복을 유다인들에게 맡기지 않도록 하였고(49조), 유다인들이나 이단자들과 함께 식사하지 말도록 하였으며(50조), 이두 정치가가 된 신자는 이 공직 기간이 끝날 때까지 성당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56조). 사망한 부인의 동생이나 언니와 결혼하지못하도록 하였고(61조), 딸이나 며느리와 결혼하는 것은 근친 상간에 해당하는 죄라고 하였다(66조).
세례 후에 우상에게 제사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죽을 때까지 통교(communio)를 끊는다고 규정하였다(1조). 이 '콤무니오' 라는 단어에는 신자들의 기도 참여, 각 교회들의 일치, 영성체, 성사를 통한 죄사함 등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교부들이 이 단어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는 마지막 의미였던 것 같다. 성사를 통한 죄 사함은 결국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요 신자들과의 일치로써, 참회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비라 교부들이 거부한 것은 죽을 위험에 처하였을 때도 세례 후에 자발적으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들에게 성사를 통한 죄 사함이었다.
이교 제사장(flamines) 역시 세례를 받은 후에 계속 그 역할을 수행하면 1조와 같은 벌을 받는다고 하였다(2조). 이 제사장은 로마 시 예식이나 황제 숭배 예식을 거행하는 사제였다. 이 예식은 고대 스페인에서도 융성하였다. 공적 예식의 형식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 각종 경기 등도 포함되어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타협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의 구경거리와 재미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이 행사에 참석하지 말도록 권고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코 양립될 수 없는 우상 숭배와 같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까지 결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엘비라 교부들에게 이교도 제사와 같은 우상 숭배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큰 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문을 걸어 다른 이를 죽음에 빠지게 하는 이는 악마의 힘을 청하는 것이기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6조). 또한 간음죄나 사음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였고(6~8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동정녀가 일탈할 경우 죽을 때까지 통교를 끊는다고 규정하였다(13조)
이외에도 교회 회의는 성령 강림 축제를 부활 대축일부터 40일 후가 아닌 50일 후에 지낸다고 규정하였다(43조). 또한 우상을 불에 태운 죄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순교자의 명부에 오르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60조). .
81개 조항 이외에도 그라시아노(Gratianus, ?~1158?)와 그 외의 교회법 학자들은 10개 또는 12개 조항을 엘비라 교회 회의에 첨가하였지만, 이 조항들은 교회 회의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엘비라 교회 회의 81개 조항 중 일부는 아를 교회 회의(314)와 니체아 공의회(325) , 그리고 사르디카 교회 회의(347)에서 다음과 같이 채택되었다.
이 외에도 안치라(Ancira) 교회 회의(314)의 19조 a항과 엘비라 교회 회의 13조, 안치라 19조 b항과 엘비라 27조, 안치라 21조와 엘비라 63 · 68조 사이에서도 유 사점이 발견된다. 또 네오 체사레오 교회 회의(314/325)의 2조와 엘비라 61 · 66조 사이에서도 유사함이 발견된다. (→ 독신)
※ 참고문헌 Hardouin, Collectio maxima conciliorum I , Paris, 1715, pp. 247~258/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II , Firenze, Venezia, 1759~1798, pp. 1759~1798/ G. Bareille, (DTC》4-2, pp. 2378~23971 F.L. Cross, 《ODCC》, p. 542/ P. de Luis, 《DPAC》 I , pp.1144~1 145/ L. Duchesne, Le Concile d'Elvire et les Flamines Chrétiens,Mélanges Renier, Paris, 1886, PP. 159~174/ J. Gaudemet, XV pp. 317~348/ H. Leclercq, (DACL) IV-2, pp. 2687~2694 M. Meigne, 《RHE》 70, 1975, PP. 361~3871 J.-P. Migne, Dictionnaire des Conciles I , Paris, 1847, Pp. 813~830/ P. Palazzini, Dizionario dei concili I , Roma, 1964, pp. 41~421 Le Nain de Tillemont, Memoires pour servir I'histoire ecclesiastique des six premiers siécles Ⅶ Paris, 1700, pp. 302~309, 711~715. [邊宗燦]
엘비라 교회 회의
教會會議
〔라〕Concilium Illibertitanum · 〔영〕Synod of Elvira
글자 크기
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