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과 복녀. 부부.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 성 엘제아리오의 축일은 9월 27일이고, 복녀 델피나의 축일은 12월 9일.
[생 애] 엘제아리오는 프로방스의 귀족 사브랑(Sabran) 가문 출신으로 1285년경 로비앙(Robians)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로비앙은 앙주이(Ansois)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마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방스의 여러 곳 외에도 남부 이탈리아의 아리아노디 풀리아(Ariano di Puglia) 백작령도 소유하고 있었다. 엘제아리오는 수도원 원장인 숙부에게 교육을 받고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으며,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와 결혼하였다. 알프스 산맥 저지대에 위치한 푸미셀(Puimichel) 성(城)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1309년경 엘제아리오 부부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아리아노 백작령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이탈리아로 이주하였다. 엘제아리오는 자신의 영지 내에 좋은 관습과 가톨릭 전통의 신심,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건한 신심과 주일과 축일을 지키는 관례를 정착시키고자했다. 1312년에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7세(1308~1313)에 대항하여 나폴리를 지키기 위해 용감히 싸웠으며, 이듬해에는 빼앗겼던 아리아노를 되찾았다. 1317년 이후 그는 나폴리의 왕 로베르토(Roberto, 1309~1343)의 아들 칼라브리아(Calabria)의 공작 가롤로(Carolo)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323년에는 그의 대사가 되어 파리로 갔다가 그곳에서 9월 27일 사망하였다. 엘제아리오는 그곳 작은 형제회 성당에 제3회 회원 복장을 한 채 묻혔으며, 이듬해 앱트(Apt)로 그의 시신이 옮겨졌다.
델피나는 남편이 나폴리 왕가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중에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절친한 친분 관계를 가져왔다. 엘제아리오가 사망한 후 그녀는, 나폴리의 왕이 사망하자 곧 나폴리의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의 수녀가 된 여왕을 따라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생활하였다.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였던 델피나는 1360년에 사망하였다.
[시 성] 엘제아리오와 델피나는 당시 사람들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적 혼인 생활의 모범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으며, 많은 자선을 베풀어 존경을 받았다. 엘제아리오는 1369년 4월 15일 교황 우르바노 5세(1362~1370)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에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 델피나)
※ 참고문헌 L. Vones, 《ThK》 3, p. 615/ L. Hardick, 《NCE》 5, p. 291/É. Griffe, 《Cath》4, p. 35/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elgique, Brepols, 1991, pp. 141, 165. [편찬실]
엘제아리오와 델피나(1285?~1323)(1285?~1360)
〔라〕Elzearius et Delp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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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제아리오와 복녀 델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