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礪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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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순교 사적지 전경. .

여산 순교 사적지 전경. .

천주교 순교 사적지. 전북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소재. 여산의 순교 사적지로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여산 동헌'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93호), 신자들이 백지사(白紙死) 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동헌 앞마당의 백지사 터' , 그 앞에 있던 배다리 옆의 '옥 터' 와 '뒷말 교수형 터' (여산초등학교 자연 학습장), 순교자들이 참수된 동헌 북서쪽 맞은편에 있는 '숲정이 형장' 등이 있는데, 현재 백지사 터와 숲정이 형장이 사적지로 조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부사(府使) 겸 영장(營長)이 주재하던 이곳 여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된 것은 1866년에 일어나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문이었다. 이때 여산 포졸들은 1868년 중순부터 관할 지역인 고산 · 금산 · 용담 등지로 다니며 수많은 신자들을 체포하였으며, 특히 고산 넓은 바위(현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의 廣岩)에서는 김성첨(토마스)과 김성화(야고보)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교우촌 신자들이 함께 체포되어 1868년 10월 21일(양 12월 4일)과 1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훗날의 증언 기록에는 이때 여산에서 옥사하거나 교수형 · 참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23명만이 수록되어 있다.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당시 옥중의 신자들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는데, 훗날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옷 속의 솜을 모두 뜯어먹어 솜이 하나도 없었으며, 순교자들을 형장에 풀어놓자 배가 고픈 나머지 그곳에 있는 풀들을 정신없이 뜯어먹었다고 한다.
여산 순교자들은 대부분 여산 배다리 인근에 있던 옥터의 교수 형장과 숲정이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이 중에서 교수형은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집행되었는데, 처형된 후 그 옆의 미나리꽝에 던져진 순교자들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천호(天呼,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교우촌의 뒷산 여기저기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83년 5월 10일, 전주교구에서는 확실한 구전을 토대로 여산 순교자 중 김성화 등 10명의 유해를 발굴하여 천호 사적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장하였고, 여산 본당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숲정이 일대의 전답을 매입한 뒤, 이곳에 대형 십자가와 예수 성심상 등을 안치하여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 천호 성지)
※ 참고문헌  《치명일기》 《가톨릭 사전》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천주교 전주교구, 1998.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