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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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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

인간의 과거에 대한 지식. 역사의 대상은 인간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대상에서 현재와 미래는 제외된다. 역사 지식은 합리적으로 정돈된 종합적인 이해와 해석을 전제하는데, 현재는 역사적인 해석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정리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이 있다. 더욱이 역사적 사건이 그 결과를 낼 수 있을 때에 역사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현재는 그 사건과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아직도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거나 원인과 결과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충분하게 심사숙고하여 공정하게 객관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역사의 대상인 과거는 모든 과거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거나 영향을 끼친 과거를 말한다. 결국 역사란 과거 인간 생활에 대해 탐구한 연구 결과로서 과거에 풍미했던 문화가 서로 어떻게 연계되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와의 관계는 어먼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향상된 미래를 위한 삶의 지혜요 길잡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재 사람들은 양피지 · 파피루스 · 종이 등에 과거의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사료나 그들이 남긴 부장품과 비문 등 유물과 유적들을 통하여 과거의 문화나 문명을 만날 수 있다.
I . 어원과 정의
우선 한자(漢字)를 통해서 '역사' 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 (史)는 손(手)으로 대나무 조각(簡)을 쥐고 있는 형태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때의 대나무 조각은 종이가 없었던 시대에 자연의 이치나 인간 생활의 이치들을 적어놓은 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손으로 대나무 조각을 쥐고 있는 형태는 곧 자연과 인생에 관한 이치들을 적어놓은 책을 들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 사관(史官)은 하늘(天)과 땅(地)을 잇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무(巫)로부터 유래된 존재로서, 자연계의 변화 또는 천의(天意)나 신의(神意)를 관찰하고 알아내어 인간의 미래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사관은 '사' 라는 글자 형태가 나타내고 있는 의미 즉 자연과 인생에 관한 일을 기록하는 것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왕의 중요한 참모로서 천의(天意)를 파악하여 전달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관의 직무를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5)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궁리하고 고금의 변화를 주시해서 통달한 자”(窮天人之際, 通古今之變)로 설명하였다. 한편 '역' (歷)은 '전하다' 또는 '역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 라는 한자어가 뜻하는 의미는 "하늘과 사람의 일을 파악하고 엮어 전해서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서양에서 역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용어들은 대체로 그리스어 '히스토리아' (iotopia)에 어원을 둔 라틴어 '히스토리아' (historia)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어 '히스토리아' 는 본래 '히스토르' (100Top, 賢者)에서 유래하였다. 이것과 같은 어근을 지닌 '히스토레오' (10top@co) 라는 동사는 "찾아서 안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의 본래 의미는 "연구에 의해서 얻어진 지식"이다. 어떤 사물이나 인물에 대한 '탐구, 조사, 관찰, 정보, 이야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역사를 가리키는 독일어 '게시히테' (Geschichte)는 '일어나다' 라는 뜻의 동사 '게쉐엔' (geschehen)을 명사화한 것으로 "일어났던 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란 말속에는 '게시히테' 본래의 의미인 '과거에 생긴 일' 과 '히스토리아' 의 의미인 "인간에 의해 연구되어 알려진 역사" 혹은 "거기에 따라 쓰여진 것"이라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치체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43)가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부른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425)는 자신이 쓴 《역사》라는 책에서, 역사라는 용어는 인간이 남겨 놓은 모든 행위와 흔적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자가 조사한 내용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이야기한 여러 가지 사건들 가운데에 일관성 있는 어떤 흐름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II . 연구의 목적
역사 연구의 목적들은 다양하게 주장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1권 서두에서 자신의 주요 집필 목적이,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므로 동과 서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이 어떤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인이든 비그리스인이든 인간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대 중국 학자들(공자, 사마천) 은 고대 서방 역사학자들(Trucycidedeeeees, Livius, Polybius)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실례를 통하여 윤리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고대의 어떤 역사학자들은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소양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 19세기 여러 철학자들(Auguste Comte, Henry Thomas Buckle, Henry Adams)은 역사의 학문적 법칙이나 지켜야 할 내용들을 확정하려고 노력하였으며, 20세기 철학자(O. Spengler, A. Toymbee)들은 문화와 문명의 흥망에 관한 자세한 역사적 설명을 명확하게 구성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발상에서 특정한 계층이나 민족주의 또는 특정한 종교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사실, 수천 년 역사의 경험은 매우 다양해서 역사로부터 자기 취향에 맞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예와 교훈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들어 어느 하나의 주장을 일반화시키거나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 연구는, 그것을 통하여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그 본질과 의미를 밝혀 현재의 삶을 진단하고, 나아가 보다 향상된 미래를 위한 조언을 얻는 데에 그 고유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Ⅲ . 역사 서술의 변천사
[고대 세계]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과 관련 있는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한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족의 유래를 알려 주는 족보도 전해지고 그 사회의 제 문제에 대한 기원을 파악하려는 역사가 서술되었다.
서구 중심적인 문화적 분위기로 인해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은 한때 가장 오래된 역사를 히브리인들의 구약성서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저서에 국한시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방사성 탄소 반응과 최첨단 탐사 기구의 발명 등 현대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고고학적 발굴과 새로운 역사 연구의 방법론에 의해 인류 문명의 연대 측정을 더 오랜 과거로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와 유대의 역사보다 오래된 근동과 중동의 고대 문명과 함께 중국과 아시아의 고대 문명을 발견하였다. 대략 기원전 2500~ 1500년 사이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소유물과 왕의 목록 등이 돌이나 진흙판에, 후에는 갑골(胛骨) · 청동 · 대나무 · 파피루스 · 가죽에 기록한 내용들이 아주 일찍부터 고대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족, 그리고 이집트의 문명과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대 이집트와 근동의 왕들은 자신들의 위업과 공적 등을 남겨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이나 전승비 혹은 공적비 등을 남겼다. 때로는 선대(先代) 왕과 적대 관계에 있던 자가 왕위에 오르면 그 선대 왕의 기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진 것은 기원전 3500년경에 석회암 판에 쓰여진 상형 문자이다. 하지만 최초의 목록과 후대의 연대기 또는 편년사는 역사로 고려되지 않는다. 어떤 근동 학자들은 통상적인 기록과 역사를 구분하여 이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고대 이집트에는 역사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었다. 그들은 인간 생명에 대한 신화를 발전시켰지만 역사 철학과는 무관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들 : 그리스의 기록은 히브리인들의 잔존 기록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00년 중반에 페르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위해 위대한 산문체 서사시를 썼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하여 동방 여러 나라의 역사 · 풍토 · 전설과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역사를 서술해서 이야기식 역사의 전형(典型)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긴 여행을 통해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관습과 전통에 대해 강한 흥미를 보이면서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정리하였는데, 글을 쓰는 데에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했다고 스스로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의 위대하고 놀라운 활동이 보존되기를 희망한 것에 반하여 구비 전설이나 풍문, 전승 등에 대한 사료에 대해서는 부주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투키디데스(Thucydidees, 기원전 470/460~400/395)는 기원전 5세기경에 일어난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역사 서술에서 그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377)의 방법을 사용하여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하고 세밀하게" 목격 증인의 설명을 검토하며 비판적인 탐구를 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란 이해 관계가 있는 상호간의 대립에서 강자의 논리에 따라 정의가 약자를 지배하려 하지만, 강자 역시 언젠가는 참변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엄정한 비판 정신과 통찰력을 가졌으며 실용적인 역사 서술의 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투키디데스 이후 가장 위대한 그리스 역사학자는 폴리비우스(Polybius, 기원전 202~120)이다. 그리스 출신으로 로마에 인질로 잡혀 왔던 그는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약 100년 동안에 일어난 일을 서술하였다. 지식이 풍부하고 여러 곳의 여행 경험이 많던 그는 지리 · 기후 · 풍습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원인들을 고려하면서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망하였는지 더 오래된 역사학자들의 작품과 증인의 설명, 그리고 그 자신의 관찰을 바탕으로 40권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 현재 그 일부가 남아 있다. 그는 투키디데스보다 더 사건의 원인에 흥미를 가졌고, 로마의 헌법과 전쟁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히브리인의 역사 : 구약성서의 역사서들은 기원전 약 900~400년에 쓰여졌다. 그러나 더 오래된 구전(口傳)과 다른 기록들이 있다. 유다인들의 책들에서는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먼저 실천했고, 그후 인류에게도 실천했다는 인류 역사의 개념을 만들었다.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인류에게 봉사하도록 그들을 선택하여 내린 유다인의 죄와 벌을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누어 다루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유다인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당신의 뜻을 실현시켰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역사가들 : 중국에서 쓰여진 기록의 흔적은 근동의 것과 시기가 같다. 공자(孔子, 기원전 552/551~479)가 편집하고 쓴 첫 편년사인 《춘추》(春秋)는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로 노(魯)나라 은공(隱公) 1년(기원전 722)부터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까지 12공(公) 240년 간의 역사를 편집한 것이다. 공자는 이 책에서 통일 천하의 윤리적 질서 확립, 즉 대의명분을 바로잡기 위한 당위를 이념적으로 제시하였다. 《사기》(史記)라는 첫 역사서는 사마천이 썼는데, 12본기(本記) · 10표(表) · 8서(書) · 30세가(世家) · 70열전(列傳) 등 도합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고로부터 한(漢)의 무제(武帝)에 이르기까지 2,500여 년 간의 흥망성쇠가 기술되어 있다. 이 역사서는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고 최초의 종합적인 통사(通史)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평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천하를 여행하며 그 지방의 지세 · 인정 · 풍속에 밝았고, 목숨을 건 사관(史官)으로서의 사명감과 냉철한 역사가로서의 객관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역사가들 : 로마 작가들은 역사를 문학의 일부로 여겨 그리스 역사의 수사학적 전통을 따랐기에, 실질적 역사 연구는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과는 약간 다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역사와 역사적 인물을 전설적으로 다루는 전기를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매우 많은 양의 역사를 썼는데, 기지와 수사학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주위의 세상사를 비판한 유베날리스(D.I. Juvenalis, 55/60~127?)는 그들의 작품을 "수천 장으로 과장한" 것이라고 비꼬았다. 고대 로마 역사가 중 리비우스(Livius, 기원전 59~서기 17)와 타치투스(Tacitus, 55?~117)는 위대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타치투스는 간결하면서도 신랄한 비판과 풍자적인 필체로 역사를 서술하면서 역사로부터 인생의 가르침을 얻으려 했다. 일부가 남아 있는 《역사>(Histoie)와 <연대기>(Ammds)에서 그는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시민 전쟁을 비꼬았고, 독재와 귀족 정치의 몰락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폴리비우스보다 덜 비평적인 리비우스는 애국심을 교훈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 기존의 전설과 다른 사람이 쓴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수사학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책을 썼다. 총 142권이었으나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역사서 《로마사》(AЬ urbe condjta Libri)에는 리비우스 자신의 시대를 강조하면서 로마 역사가 기원전 753년의 신화적 기원부터 쓰여 있다. 거대한 산문체로 된 서사시인 그의 역사서는 소문과 오류도 포함되어 있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로마 역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서양에서 고대인들의 역사 서술 방식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교 역사가들 :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 재림 때 절정을 이룰 것으로 믿었으며, 이 역사에는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포함된다는 사관(史觀)을 가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이전의 고대 역사가들이 사용한 서술 유형과는 다른 역사 서술 방식이 등장하였다. 특히 구원의 역사를 주도한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중요한 요소였다. "교회 역사의 아버지" 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는 교회의 모든 유명한 사람과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편년사를 썼으며, 수많은 사료를 입수하여 열거하면서 초기 교회에 관한 역사를 썼다.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 성인을 포함한 많은 교회 역사학자들이 그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수도원들과 지역에 관해 편집한 연대기와 편년사에서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밝혀 내려 하였다. 그들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神國論, De Ciavitate Dei)에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시리아로부터 생긴 '천국 도시' 와 '지상 도시' 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역사에서 사람과 모든 것에 작용하여 지상 도시에서 천국 도시로 천천히 변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이 소위 역사학적인 방법론으로 증명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역사관은 다분히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에서 6세기 초에는 그리스도 탄생을 기원(紀元)으로 삼아 세계사 서술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수 세기 동안 유럽 역사학자의 역사적 관점을 지배했었다.
이 밖에도 무슬림 역사 연구는 무함마드(Muhammad, 571~632)와 《코란》 이후 아주 늦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페르시아 · 중국과 유다 · 그리스 · 그리스도교와 함께 세 번째 독립된 역사 연구로 발전되었다. 초기 인도에서는 이와 같은 연구가 뚜렷하지 않았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아닌 움직임(운동)이 과거를 만들고 우주는 시간의 거대한 순환으로 변화한다고 보았다.
[중세기] 여기서 중세기는 서양사의 시대 구분에 따른 시기를 가리킨다. 편견에 갇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중세라고 부른 오랜 세기 동안 비잔틴인, 중국인, 무슬림 그리고 다른 많은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썼다. 중국에서는 <춘추》와 《사기》의 역사 서술 방식에 따라 역사 연구가 계속되었다. 즉 선현(先賢)들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는 역사의 도덕적 교훈을 중시하였다. 중국인 유지기(劉知幾, 661~721)는 역사학자들에게 통찰력 · 재능 · 지식을 요구하며 판단을 하기 위한 비평을 발전시켰다. 그는 당대(唐代)의 역사학자로서 고전(古典) 역사서를 연구하여 오직 역사 연구에만 전념하는 수사(修史)의 직책에 종사하였다. 또 그는 《사통》(史通) 20권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사학 비평 · 사학 이론에 관한 최초의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역사학도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의 도덕적 교훈을 중요시하였다. 무슬림 역사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종교학의 대가이며 유능한 재판관이자 논리학자인 이븐 할둔(Ibn Khaldun, 1322~1406)은 현대적인 용어로 해석적이고 비평적으로 심오한 역사를 썼다. 그는 《우주 역사》(kitab al-Ibar)에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인들과 무슬림 왕조를 열거하였는데, 그는 서문에서 먼저 역사에 관한 방법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유럽에서는 1,000년이 넘게 역사가 교회 인물들에 의해 대부분 서술되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의 그레고리오(Gregorius Turonensis, 537~594)와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735)의 책 외에는 약간 주목할 만한 역사가 쓰여졌을 뿐이다. 그레고리오는 프랑크인들과 교회에 관한 《프랑크족의 역사》(Historia Francorum)를 썼는데, 이작품은 그가 내용을 알고 직접 수집함으로써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한편 베다는 《영국 교회사》(Histoitia ecclesiastica gentis Anglonmm)에서 문헌을 증거로 사용하고 인용하면서 그 시대의 학문을 요약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저술로 7세기경에 시작한 《앵글로 색슨족의 편년사》가 있었고, 그 후 11세기에 시작한 《노프고로드(Novgond) 편년사》가 있었다. 그러나 중세 역사 중 가장 좋은 것들은 이후에 나타났다.
12세기에 프라이징의 오토(Otto von Freising, 1111?~1158)는 《두 도시에 대한 역사》(Historia de durabus civitatibus)라는 훌륭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처럼 바빌론의 불행과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창조 설화부터 서술하였다. 또한 비평가이자 학자였던 그는 '콘스탄틴 대제의 증여' 가 위조 문서임을 밝혀 냈다.
〔르네상스 시대] 15세기부터 역사 연구는 점점 더 비평적이고 체계적이 되었다. 12세기부터 비평과 창의적인 정신이 유럽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인문주의자들과 정치적 비판자들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은 이전 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고증을 위한 자료와 고문헌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과거의 모든 유물을 체계적으로 수집하면서 고대의 문화와 문명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당시까지 남아 있는 공문서와 사문서, 여러 지방의 지형에 대한 기록, 건축물과 비문, 주화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유적과 유물을 활용하여 소위 역사 보조학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때 인노천시오 7세 교황(1404~1406)의 비서였던 인문주의자 브루니(Leonardo Bruni, 1369~1444)는 전설적인 내용으로 과장된 피렌체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피렌체의 역사》(Historiarum Florentini populi)를 새로 저술하였다. 이 역사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적인 형태를 지나치게 모방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중세의 지적인 타협을 거부했다는 평가도 있다. 다재 다능한 브라칠리니(Poggio Braccilini, 1380~1459)와 같은 시대의 노콜리(Niccolo de Noccoli) 및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남아 있는 필사본들을 열정적으로 찾은 결과, 고대 역사에 관해 대단히 가치 있는 사료들을 발견하였다.
법을 전공하여 피렌체와 교황령에서 여러 요직을 수행하였던 귀치아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1540)는,1378년부터 1509년까지를 다른 《피렌체 역사》에서 뛰어난 지혜와 판단력으로 역사를 저술하였다. 특히 관직에서 은퇴한 후 저술한 《이탈리아 역사》(Stona d'Italia)는 걸작으로서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이 지배자들의 탐욕적인 이해 관계에 의한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회적 · 문화적 · 종교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요인을 더 강조하였다. 교훈적인 가르침을 우선시하는 귀치아르디니와 이탈리아를 통합할 방법을 염두에 둔 마키아벨리(N. Machiaveli, 1469~ 1527) 등의 역사 의식은 서로 약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리비우스와 폴리비우스를 자신들 역사 연구의 고전적인 모형으로 삼고 개인적인 야망에 맞게 과거를 검토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적 문명의 자연적인 멸망에 관해 연구하였는데, 그들은 사료를 검증하면서 역사 연구에 목표를 첨가하였다.
15세기부터 도시 당국과 새로운 민족주의적인 정부가 자신들이 했던 활동들을 기록하고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기록들이 점점 체계적으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측을 유리하게 옹호하려는 의도로 역사를 활용한 부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사료 수집에 전념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료에 바탕을 둔 역사 연구가 촉진되는 등의 긍정적인 발전도 있었다. 그러나 미리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 방향으로 맞추려는 경향도 있어 역사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특히 권력가들이 자신들의 통치에 불리한 저서에 적대감을 갖고 대함으로써 역사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필사본과 문헌들이 사료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혹 의도적으로 기록을 위조하였거나 재필사 또는 복구 과정에서 우연적인 결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괄목할 만한 역사 연구는 고대 후기와 중세 역사를 위한 사료를 열성적으로 수집하였고, 그 사료를 학문적으로 잘 검증하였다. "비평적인 평가보다 더 최신 유행은 없다" 고 서술한 마비용(Jean Mabillon, 1632~1707)은 역사 방법론 개척에 뛰어났다. 그는 저서 《고문서학》(De Re Diplomatica, 1681)에서 : 예리한 비판적 방법론을 제시하며 중세 기록의 정통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기록의 정통성은 단편적인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그 기록의 필체나 내용 등 모든 요소들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문서학》은 중세 헌장(憲章)들의 허와 실에 관한 기준을 만들었다. 액턴(J. Acton, 1834~1902) 경(卿)이 말했던 것같이 마비용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비평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개척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마비용의 자세와 기준, 그리고 다른 조건은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 역사 연구에서도 기본이 되었다.
16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정치 이론가 보댕(Jean Bodin, 1530~1596)은 《쉬운 역사 인식을 위한 방법》(Methous ad facilem historiarum cognitionem)에서 역사학자들의 사료 검증에 관한 법칙을 만들었다. 역사 분야에서 예수회 회원들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후기 로마와 중세 역사의 사료에 비평의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예수회 회원인 볼랑(Jean Bolland, 1596~1665)과 파펜브루크(Daniel van Papenbroek, 1628~1714) 등의 볼랑디스트들이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특히 《성인 전집》(Acta Sanctorum)이 유명하다. 프랑스 베네딕도회의 생 모르 연합회 소속 수도자들인 생 모르 학파에서 특히 뛰어난 학자인 마비용은 자기 수도회의 역사적 창설에 대한 연구에서 문헌 비판에 관한 검증법을 발달시켰다. 파리의 틸몽(L.S.leNan de Tillemont, 1637~1698)은 초기 교회부터 513년까지의 기간에 대한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의 저서는 대단히 철저하고 정확한 점이 특징으로 평가된다. 그는 교회의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일부 책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하면서 어린이 교리 교육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모데나(Modena)의 무라토리(L.A.Mumaton, 1672~1750)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이탈리아 역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세 시대 역사가들의 저서를 수집하여 15년의 작업 끝에 《이탈리아 역사가》(Rerum Italicarum Scriptores)란 책을 총 27권으로 발간하였다. 그는 18세기 영국의 평신도로 위대한 역사학자인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에게 이탈리아 역사에 관한 안내자이자 교사였으며, 근대 이탈리아 사료 편집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18세기는 역사학이 대체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시대였다고 오랫동안 여겨졌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 과거 인간들의 여러 경험을 배우기보다는 세계와 사람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을 발견하려는 데 더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성주의자인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와 반그리스도교적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주로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의 연구 성과로 큰 명성을 떨친 물리 과학의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면에서는 자연 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받아 역사 방법론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인류 사회의 발전을 이루는 일관된 힘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보편적인 법칙을 탐구하였다. 17세기 말에 프랑스 왕자의 가정 교사이자 모(Meaux)의 주교였던 보쉬에(J.B. Bossuet, 1627~ 1704)는 《세계사 이야기》(Disours sur I'histoire universelle, 1681)에서 아우구스티노적 개념과 구약성서의 중요성을 논증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액턴 경의 관점이기도 한 이 관점은 18세기 내내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많은 역사가 합리주의자들에 의
해 쓰여졌다. 기번은 1,400년이 넘는 오랜 시대의 정치와 전쟁에 관해 쓴 《로마 제국의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1788)에서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18세기 역사학의 흐름을 반영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 대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연구를 촉진하였다.
1750년 경제학자 튀르고(A-R.J.J. Turgot, 1727~1781)는 그의 유명한 저서 (이야기(Discom 인간은 "때때로 느리기는 하지만 계속적으로 향상되는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고 하였다. 그 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철학자 콩도르세(M.J. Condorcet, 1743~1794)는 《인간 정신 발전의 역사적 장면에 관한 소묘》에서 당시까지 알려진 역사 전체를 10단계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역행되거나 기피할 수 없는 발전을 통하여 미개 상태에서 계몽적인 이성의 시대로 향상되는 인간의 역사를 묘사하였다. 그는 위대한 발명이나 지리적 발견 등 획기적인 전환점을 각 시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나폴리 철학자이며 근대 사회학과 역사 철학의 비조로 평가받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새로운 학문》(Scienza nuova)이라는 광범위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분석적 사고 방식과 개인주의에 반대하여 지식의 종합과 공동 의식을 역설하고, 인간은 원시적 무의식 상태의 신정(神政) 시대를 거쳐 종교적 의식을 갖는 초인 시대, 법의 철학적 원리를 인식하는 인간적 역사 시대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8세기 사상가들이 이룩한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각 사회를 응집력 있는 개별 단위로 보면서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측면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론을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와 혁명 시대]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낭만주의라는 또 다른 역사적 지식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감성적 반응으로 이성, 과학,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 자연법 등에 대비하여 초자연적인 것, 전통, 개인차, 풍속을 강조하였다. 중요한 초기 낭만주의자인 루소(J.J. Rousseau, 1712~1778)는 약간의 역사만을 서술하였지만 그의 정서, 근원에 대한 사랑, 고전적이고 문명화된 것에 대한 경멸은 이후 두 세대의 철학자 · 시인 ·소설가 · 역사가들에 의해 공유되었고, 서구 문화에서 오랜 전통의 원전(原典)이 되었다.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자인 헤르더(Johan Gottfried Herder, 1744~1803)도 처음에는 역사학자가 아니었지만, 《역사 철학의 사상》이란 저서에서 유기적 조화를 이루는 모든 생명과 인류의 지속적인 교육을 위한 역사를 묘사했다. 얼마 후 자비니(Fiedinck Karl von Savigny, 1779~1861)는 지속적인 발전을 통하여 과거가 현재로 어떻게 이끌려 왔는지를 밝혀 내려고 중세 법까지 소급하였다. 헤르더와 자비니의 사상들이 미래 역사 작업의 전조가 되었다.
이성과 낭만주의의 시대를 뒤흔든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었는데 정치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도 분수령이 되었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과 그 후에도 혁명 지지자들은 혁명의 원칙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덕목들을 내세우면서 혁명 중에 그들이 했던 일을 찬양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논문이나 회고록, 또는 역사를 썼다. 종종 그들의 반대자들인 낭만주의자들은 혁명이 전통과 단절되고 사회의 유기적 조화를 파괴시켰다며 혁명을 범죄로 확신하고 역사적 교훈을 들어 혁명의 원칙들을 공격하였다. 혁명가들은 혁명이 하느님이 주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모든 것과 현재를 연결하고 있는 연속적인 고리를 끊고 용감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했다고 확신하였다.
역사학자들도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혁명가나 보수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적 애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사상의 정당성과 자기 나라와 제도의 기원을 열심히 탐구하였다. 프랑스 역사학자인 티어리(Augustin Thierry, 1795~1856)가 1834년에 18세기의 특징이 철학인 것처럼, 역사가 19세기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적중하였다.
〔과학적 역사] 18세기 말과 19세기에 사료를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전문 역사가들이 과학적인 역사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말 독일에서는 몇몇 언어학자들이 언어들을 검증하기 위한 엄격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볼프(Friedich August Wolf, 1759~1824)는 《호메루스에 대한 서언》(Prolegomena adHomerum, 1795)을 저술하여 <일리아드>(Iiad)와 〈오디세이>(0dysse)가 여러 작가들의 작품임을 증명하여 그 방법과 결과가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언어학자들은 학생들이 선생의 지도 아래 함께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그 결과에 대한 지속적인평가를 통해 하나의 법칙을 배우는 학문적 방법론의 하나로 세미나를 발전시켰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과 런던의 대학의 교수로서, 프로이센에서는 추밀원 고문관과 교황청 주재 공사 등 역사가요 정치가로 활동했던 니부어(Barthold Georg Niebuhr, 1776~1831)도 로마사와 리비우스 역사 연구에 같은 방법을 적용하였다. 19세기부터 역사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는데, 첫째는 대학 교육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역사' 가 모든 대학의 필수 과목이 되어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점차 증가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상의 자유가 신장되면서 역사학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랑케와 그의 학파]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도 니부어의 작업에 크게 감명을 받아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로만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역사》(Geschichte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 von 1494 bis 1514)를 저술하여 역사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얼마 후 대학 교수가 되어 본격적으로 역사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로만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역사》는 귀치아르디니처럼 이탈리아를 지배하려는 두 민족의 투쟁에 대해 썼던 초기 역사학자들의 체계적인 비평을 포함하였다. 프러시아의 애국자인 그는 또한 프로테스탄트 이상주의자여서 "역사 속에서 멀리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후일 '역사주의' (historicism)라고 불린 꼼꼼한 연구와 사건에 대한 직관적 명상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의미 있는 세계사 저술을 원하였다. 그는 문헌을 엄격하게 검증하여 원전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가치를 인정한 후 역사 서술의 사료로 엄선하는 등 사료 비판적 방법과 객관적 서술로 나름대로 역사 방법론의 체계를 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랑케는 1830년부터 학생들과 위와 같은 방법론에 의한 세미나 방법을 사용하여 선대(先代) 역사가들이 소홀히 한 필사본과 문헌 연구를 강조하면서 소위 '랑케 학파' 를 탄생하게 하였다.
[20세기 역사 연구] 20세기에 일어난 제1 · 2차 세계대전,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공산 혁명,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두 번 크게 일어난 국수주의적 독재 정치, 그리고 세계 경제 대공항이 서구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통신 수단의 기술적 발달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현대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하였다. 서구인들이 두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견지했던 서구 세계 중심의 문화적 우월주의에서 탈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일어난 중요한 발전으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종래의 개념이 붕괴되었고, 인구의 거대한 증가와 도시로의 이동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학자들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 연구를 과소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 연구와 저술 활동이 더욱 확대되었고, 이러한 연구 활동이 보다 강화되기 위해 국가 단위와 국제적 수준의 조직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사관(史觀)과 역사 방법론에 따라 역사 연구의 성향이 몇 가지 드러났다. 인간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중요한 기준으로 존중되는 유다-그리스도교적인 사관과 원전 연구의 객관성과 정확성을 강조한 랑케 학파,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과 역사의 상대주의나 주관성, 혹은 인간적인 한계성을 인정하면서도역사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제 역사의 분야는 거의 한계가 없어진 것 같았다. 인간 생활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범주의 분야들이 해당 분야의 기원과 내력을 밝히는 '역사' 라는 체계로 정리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각 세대는 그 이전의 세대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해석하면서 그 자신의 '삶의 자리' 를 다음 세대의 '역사' 에 넘기려고 자료를 정리한다. 그러나 역시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료나 역사기록들은 그 기록이나 흔적을 남긴 당사자들의 신분과 관심 여부, 선입견과 편견, 우연적인 착오나 몰이해가 어느 정도 반영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과 사건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남아 있는 사료와 흔적의 양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그 사료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에도 많은 장애와 제한을 지니기 때문에 과거 생활의 일부를 드러낼 뿐이지, 그 시대의 모든 분야를 충분히 반영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보고서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또한 사료의 선택과 해석의 수준에 따라 과거사(過去事)의 모양과 색깔과 크기가 다양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산을 바라보는 위치와 높이에 따라 산의 모습이 다르게 보일 수 있는데, 자기가 바라본 산의 모습 하나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산이 "다른 시각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므로, 그것이 "전혀 객관적인 모양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역사가들이 무의식적으로 빠질 수 있는 편견이나 관점의 차이를 예견하며 많은 경우 역사 지식이 제한된 범위에서 축적될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공정한 이해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연구의 결과를 절대화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인정한 기준에 따른 엄격한 사료 비판 능력과 사관에 따른 이해와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 연구의 결과를 과소 평가하거나 무용론을 주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산의 모습을 통하여 그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듯이 양심적인 역사가의 깊은 학식과 성실한 연구의 결과를 징검다리로 삼아 과거의 문화와 일부나마 만날 수 있으며, 이러한 만남을 통해 그와 연계된 여러 과거사의 종합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현재를 조감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제한적이나마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교회사학 ; 그레고리오, 투르의 ; 랑케, 레오폴트 폰 ; 마비용, 장 ; 마키아벨리 ; 무라토리, 루도비코 안토니오 ; 베다 존자 ; 보쉬에, 자크 베니뉴 ; 볼랑디스트 ; 생 모르 학파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에우세비오, 체사리아의 ; 역사 신학 ; 역사주의 ; 역사 철학 ;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 타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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