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진리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없으며 모든 진리나 가치는 역사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주장.
[정의 및 유래] 역사주의는 이성의 보편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반계몽주의로 규정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역사와 보편적인 이성 사이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역사주의가 성립하였다고 봄으로써, 역사주의를 계몽주의의 보편사적 기획을 구체적인 역사의 조건 속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 역사적 현상이나 문화적 구현물은 일반적 이론이나 법칙에 근거해서 설명하기보다는, 개체의 고유한 발전 과정을 연구 · 이해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실증주의적 경향을 역사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포퍼(K.R. Popper, 1902~1994)는 역사의 법칙에 의거해서 역사의 진행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이 역사주의자들에 해당한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이들이 '열린 사회' 의 적들이라고 공격하였다.
역사주의라는 용어를 문헌에서 처음 사용하였던 사람은 철학자 슐레겔(F. von Schlegel, 1772~1829)이다. 그는 1797년에 막연히 역사를 강조하는 철학의 한 부류라는 의미에서 역사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그 후 포이어바흐(L. Feuerbach, 1804~1872)는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와 대비해서 과거의 사실에 얽매여 현재의 삶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입장을 역사주의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역사주의라는 용어가 법학과 경제학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1850년대 이후부터이다. 법을 민족 정신의 고유한 역사적 산물로 보는 자비니(F.K. von Savigny, 1779~ 1861), 아이히호른(K. Eichhorn) , 기르케(O.F. von Gierke, 1841~1921) 등이 중심이 되어 법학에서 이른바 역사학파(historical school)를 성립하였다. 경제학에서도 로셔(W.Roscher), 크니스(K. Knies), 슈몰러(G. Schmoller) 등의 주도 아래 한 국가의 경제 생활은 그 독특한 문화의 역사적 발전을 매개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파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추상적 이론 대신에 역사적 맥락의 탐구를 중시하는 역사주의가 어디에서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분야는 역사학이다. 역사주의를 통해서 그때까지 역사 철학과 문학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던 역사학은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위치를 확보할 수있게 되었다.
[유형 및 발전]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주의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역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가능하게 만든 과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역사주의이고, 두 번째 유형은 모든 가치와 규범을 상대화하는 근대적인 세계관의 요체로서의 역사주의이다. 먼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방법론으로서의 역사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과거의 사실을 탐구하는 역사는 시간을 초월해서 가치를 지니는 보편적 사실의 해명에 전념하는 시나 철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1321)는 《시학》에서 과거에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탐구하는 역사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관하는 시보다도 열등하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사에 대해 말하는 문학은 진리에 접근할 수 있지만,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과거의 사실이 어떠했는지만을 서술하는 역사는 참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식의 좌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주의의 등장과 함께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과거의 사실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하는 역사가 하나의 학문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역사주의에 입각해서 역사의 학문화를 최초로 이룬 역사가는 독일의 랑케(L. von Ranke, 1795~1886)이다. 랑케는 세계사의 흐름을 '이성의 간지' 가 주도한다고 상정함으로써 개별적인 역사의 사실을 해소하는 헤겔의 역사 철학에 대항해서 개별적인 역사의 지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개별의 지각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을 통해서이다. 전자는 역사의 방법이고, 후자는 철학의 방법이다." 역사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개별적인 것이고, 그래서 랑케가 추구했던 것은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모든 시대는 신(神)에게 직결되어 있다" 고 믿었던 랑케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신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확신하였다. 개체의 발전 과정에는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섭리가 발현하는 과정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역사가는 "그것이 본래 어떠했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역사의 보편적 진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체적 사실에 신의 섭리가 내재해 있다고 보는 한에서, 역사적 지식의 상대주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었다. 개체적 사실을 통해 신의 '상형 문자' 를 해독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보았던 랑케에게, 역사적 지식의 상대성 문제는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개체의 생성과 발전의 궁극적인 원인을 신에게 귀결시키는 것을 통해서 역사적 지식의 객관성을 근거 지웠던 랑케는, 불완전하고 당파적인 역사가의 주관은 소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역설하였다.
랑케가 역사가의 주관을 객관적 인식의 장애물로 여겨 제거하려 했던 데 반해, 독일의 또 다른 역사주의자 드로이젠(J.G. Droysen, 1808~1884)은 이러한 랑케의 객관성을 '환관적' 객관성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역사 인식에서 역사가의 주관을 아르키메데스적 지렛점으로 삼고자 했다. 드로이젠이 방법론으로서 역사주의의 본질로 삼았던 것은 '연구하며 이해한다' (forschend verstehen)는 공식이다. 드로이젠에 따르면, 이해는 인식 주체를 소거함으로써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인식 대상을 구성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세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역사가의 개념을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현재 인식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 인식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역사주의 문제는 재발할 소지가 생겼다.
랑케든 드로이젠이든 모두 역사주의의 근본 문제는 역사가가 구성하는 인식과 연관된 역사와, 과거에 실제 일어났던 사실과 연관된 역사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역사주의의 상대성 문제는 이러한 주관적 역사와 객관적 역사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제기되었다. 랑케와 드로이젠 모두 역사를 신의 섭리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이 문제를 선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랑케가 말하는 신은 개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발현하였으며, 드로이젠이 말하는 신은 그가 '인륜적 힘' (sittliche Miacte)이라고 불렀던 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였다. 따라서 랑케의 신은 모든 개체에 내재해 있는 신이지만, 드로이젠의 신은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지' 처럼 특별한 인물이나 담지자를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공통으로 국가를 신성화하였다. 랑케는 국가를 '신의 사상' (Gottesgedanken)이라고 말하였으며, 드로이젠은 국가가 가장 중요한 '인륜적 힘'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독일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국가는 신의 의지를 대변하기보다는 권력의 악마적 요소를 발현시킴으로써 역사의 파국을 초래하였다. 독일 역사주의자들은 결국 독일 민족주의라는 '정치 종교 의 사제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이런 맥락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독일 역사학의 최대 과제는 역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유형의 역사주의는 트뢸치(E. Troeltsch, 1865~1923)의 정의대로 "인간과 그의 문화 그리고 그의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이 근본적으로 역사화하는 것" 으로부터 성립하였다. 곧 세계관으로서의 역사주의이다. 이는 더 이상 고정 불변하는 '존재' (Sein)의 세계는 없으며 변화하고 유동적인 '생성' (Werden)의 세계만이 있다는 사상에 근거하였다. 실체의 본질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면, '진리는 시간의 딸' (veritas filia temporis)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트뢸치는 역사주의를 근대인이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인의 징표로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역사주의의 위기란 합리화된 근대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였던 트뢸치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근대를 근대에서 극복할 수 있는 길' 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모든 가치가 상대화하는 근대 세계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 초월적인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무제한적인 상대주의' 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트뢸치는, 문화는 역사에 반영되어 있는 초월적 가치의 단편이며 조각이기 때문에 이들의 종합을 통해 항구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역사주의의 상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문화의 종합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유럽의 정신사는 모든 문화를 종합할 수 있는 보편사적 역사 의식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의 종합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각 민족의 상이한 문화적 요소들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유럽의 역사 철학이 가졌다고 믿음으로써 역사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트뢸치의 기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와 의미를 시간 속에서 상대화하는 역사주의를 근대인의 실존적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역사주의 문제를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뢸치가 궁극적으로 깨달았던 것은 역사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신앙을 통해서만이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 트뢸치는 역사주의 문제 해결을 위한 '목숨을건 모험' 끝에 다시 "역사의 피안에 존재하는 신의 나라"로 귀의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반해, 역사가 마이네케(F. Meinecke, 1862~1954)는 역사주의가 만들어 내는 상대주의의 독(毒)을 해독할 수 있는 방안을 역사주의의 역사 안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이네케에 따르면, 상대주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시대의 역사주의는 라이프니츠(G.W. Leibniz, 1646~1716)로부터 헤르더(J.G. Herder, 1744~1803),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훔볼트(W.von Humboldt, 1767~1835)를 거쳐 랑케에 의해 완성되는역사주의의 진정한 계보로부터의 이탈이다. 진정한 역사주의의 핵심은 각 개체의 발전을 정신적 실체의 보편적 섭리의 구체적인 발전 과정으로 파악하는 개체성 사상이다. 이러한 개체성 사상은 모든 개체적인 것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구조로서 '이념' 을 상정했던 훔볼트와의 연속 선상에서 랑케가 '실재 정신적인 것' (Real-Geistigees)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체의 발전과 역사 전체의 전개 방식의 종합을 이룩함으로써 완성을 이루었던 것이다. 요컨대 마이네케는 각 개체의 고유한 운동을 역사 전체의 보편적 발전과 연관시키는 매체로서 형이상학적 실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이른바 '존재론적 실재론' (der ontologische Realismus)에 의거해서 역사주의의 상대주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베버(M. Weber, 1864~1920)가 보기에, 이렇게 '숨은 신' 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통해서 역사주의의 상대성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학문의 방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 베버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주의 문제를 끝까지 학문적으로 고뇌함으로써 학문을 어떻게 하나의 소명(Beruf)으로 추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베버가 통찰했던 것은 세계관으로서 역사주의의 등장과 함께 죽었던 고대의 신들이 다시 부활하는 '가치의 다신론' (Polytheismus der Werte)의 시대에서 나타난 근대인의 삶의 조건이다. 베버에 의하면, '가치의 다신론' 이 지배하는 근대 사회에서 트뢸치가 기도했던 문화의 종합과 같은 것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는 문화의 개념을 통해 가치의 상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 대신에 무한정한 현실의 단편을 '알 만한 가치' (wissenswert)가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 (Gesichtspunkt)을 열고자 했다. 베버는 문화를 이 세상에서 무한정 나타나는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한한 인간의 관점이라고 정의하였다. 유한한 인간은 궁극적으로 역사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베버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인간상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와 의식적으로 대적함으로써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끊임없이 배양하는 이른바 '문화인' (Kulturmesch)이다. 그는 관점을 갖지 않고는 인식이 불가능한 인간이 문화의 종합을 통해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이룰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객관적 인식이란 현실(Sein)과 당위(Sollen)의구분을 전제로 해서 자신의 문화적 가치가 내재하는 관점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때 열릴 수 있다. 따라서 베버의 문화인은 '가치의 종합'이 아니라 '가치의 자유' (Wertsfreiheit)를 추구하는 합리적 인간이다.
[현대의 비판과 전망]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역사를 보면, 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이와 같은 '가치의 자유' 를 가진 문화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정신 없는 전문인과 가슴 없는 향락인" 을 낳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근대에서 정신적 위기에 직면했던 인간은 '세계의 합리화' (Rationalisierung der Welt)를 통해 획득했던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역설적인 행동을 하였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믿기에는 너무나 위험스런 존재라는 것을 아우슈비츠와 같은 문명의 파국을 통해 깨달아야 했다. 그리고 핵 폭탄의 발명과 함께 인류는 과학 문명의 발달이 역사의 진보뿐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전 공학의 발달을 통해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한 정보를 확장하면 할수록 인류는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커졌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과 환경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면 할수록 그것들에 대한 통제력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카오스의 영역만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개념이 지향하는 가치의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역사주의 문제와 직면해 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 가치의 상대주의가 가치의 다원주의로 전화하면서 역사주의 문제는 재등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가치의 상대성 자체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타자성과 차이성을 용인하는 이른바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의 건설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테로토피아' 란 현실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고귀한 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적 기획을 통해 인간적 한계와 그 인식의 상대성을 깨달은 인간은 다시 보편적 종교로 귀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 역사 ; 역사 신학 : 역사 철학)
※ 참고문헌 G. Iggers, The German Conception of History. The National Tradition ofHistorical Thoughtfrom Herder to the Present, Mid-dletown, Conn, 1968/ F. Meinecke, Die Entstehung des Historimus, Werke,Bd. 3, Miinchen, 1965/ E. Troeltsch, Der Historimus und seine Probleme,Gesammelte Schriften, Bd. 3, Tubingen, 1923. 〔金基鳳〕
역사주의
歷史主義
〔라〕historismus · 〔영〕histor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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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