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延吉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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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교구장 브레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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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교구장 브레허 주교.

심양(瀋陽, 구 奉天) 관구에 속했던 교구. 교구 설립 당시 관할 지역은 간도성(間島省)의 화룡현, 훈춘현, 연길현, 왕청현과 길림성(吉林省)의 돈화현, 액목현과 빈강성(濱江省)의 영안현, 동영현, 목단강현 등 총 9개 현이었다. 간도 지역은 원래 만주교구(滿洲敎區)에 속해 있었다. 1896년 5월 첫 세례자가 생긴 이래 신자들이 늘어가자 당시 원산 본당의 브레(A. Bret, 白) 신부는 만주교구 기용(L. Guillon, M.E.P.) 주교의 승낙을 받아 간도 교회를 관할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5월 원산 대목구에 편입되었다가,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어 1929년 2월 5일 브레허(T. Breher, 白) 신부가 초대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4월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1946년 4월 중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교구로 승격되어, 심양대교구에 속하게 됨으로써 한국 교회 관할에서 제외되었다. 브레허 주교가 1950년 11월 2일 운명하자 11월 8일 악커만(R. Ackerman, 田) 신부가 교구장 서리가 되었다. 그 후 중국의 정치 상황이 변화됨에 따라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1954년 비테를리(T. Bitterli, 李) 신부를 연길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였다. 현재 연길교구 관할 지역은 길림교구에 병합되어 있다.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의 수도자들은 1985년 이래 이 지역 교회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이곳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다양한 방법으로지원하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브레허(T. Breher, 白) 주교(1929. 2.5~1950. 11. 2), 2대 악커만(R. Ackerman, 田) 신부(교구장서리, 1950. 11~1954. 4), 3대 비테를리(T. Bitterli, 李) 몬시놀(교구장 서리, 1954. 4~1980. 10). [교 세] 1896년 1명, 1898년 405명,1907년 1,750명, 1909년 2,100명, 1916년 5,891명, 1921년 7,787명, 1923년 9,990명, 1929년 11,764명, 1937년 14,000명, 1944년 19,200명.
: I . 전 사
[복음 전파와 공소의 형성] 1896년 5월 16일 간도 호천포(湖泉浦)에 살던 김영렬(金英烈, 세례자 요한)이 함경도 원산 본당에서 베르모렐(J. Vermorel, 張)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간도 교회의 첫 신자가 된 그가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스승이자 동료인 김이기(金以器)를 통해서였다. 1897년 봄 김영렬은 친지인 최규여(崔規汝, 그레고리오)와 유패용(劉覇龍, 라우렌시오)에게 교리를 가르쳐 역시 원산 본당에서 베르모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였다. 김영렬은 다시 호천포로 돌아가 친지 30여 명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들 중 12명이 1897년 5월 원산 본당의 브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브레 신부는 1897년 12월 21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처음으로 간도 지역의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이때 간도의 신자수는 176명이었다.
이후 간도 지역의 신자들이 늘어나자 공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898년 부처골(佛洞)에 간도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부처골은 대교동(大敎洞)이라 불리며 중앙 공소가 되었고, 싸리밭골, 삼원봉(英岩村), 서학골〔棲鶴洞] 등에 공소가 세워졌다. 1901년 위텔(G.Mutel, 闕) 주교가 처음으로 간도 지방을 순시하였을 때 이 지역의 신자수는 700여 명에 달했다. 1900년에는 연길현 용정촌에, 1903년에는 조양하(朝陽河, 현 八道溝)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곧 공소가 설립되었다. 1907년 훈춘과 그 인근 팔지(八池)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본당 설립과 발전] 1902년 대한 제국은 간도에 시찰원을 파견하는 등 간도의 영유권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당시 간도 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브레 신부는 뒤텔 주교에게 간도 교회를 담당할 재치권(裁治權)을 얻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 결과 '북만주교구의 선교사가 파견될 때까지' 라는 조건으로 간도 지역의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북만주교구의 랄루이에(P. Lalouyer, 藍祿葉) 주교도 자신의 교구 신부를 간도에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한 후, 간도에 정착한 한국인들을 위해서 조선교구의 성직자가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1907년 9월 위텔 주교는 "최소한 1년 간은 가 있으라"며 브레 신부를 간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1908년 10월 24일 브레 신부는 넓은 사목 지역과 좋지 않은 기후, 일 년 내내 이어지는 공소 방문 등으로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1909년 5월 1일 조선교구에서 2명의 선교사가 간도에 파견되었다. 라리보(A.J. Larribeau, 元) 신부는 삼원봉 본당을 설립하고 연길현과 훈춘현 등 동쪽 지역을 담당하였다. 퀴를리에(L.Curlier, 南) 신부는 용정 본당을 설립하고 화룡현과 연길현 등 서쪽 지방을 담당하였다. 당시 간도 지역의 신자수는 2,362명이었다. 이어 1910년 9월 26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조양하(朝陽河, 현 八道溝) 본당을 맡아 간도 북쪽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로써 간도 지역에는 3개의 본당이 설립되었고, 선교 지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성당과 공소, 학교의 설립 등 여러 활동들이 활발해졌다. 1914년 간도 교회의 신자수는 5,418명이었다. 하지만 이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 선교사 일부가 징집됨에 따라 사목 구역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어 퀴를리에 신부가 충청도 합덕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1919년 7월 최문식 신부가 마적에게 납치되어 다음해 2월에 풀려 난 사건이 있었다. 뒤텔 주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황해도 사리원 본당에 있던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에게 조양하 본당을 돌보도록 하였고, 페랭(P.Perin, 白) 신부를 1919년 9월 영암촌 본당으로 파견하였다.
[원산교구 설정과 본당의 확장] 1920년 8월 5일 원산대목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수도자들이 함경남북도 선교를 맡았다. 그들은 1909년2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세우고 승공학교(崇工學校)를 운영하고 있었다. 1921년 3월 19일 북만주교구에 속했던 연길(延吉)과 의란(依蘭) 지역이 원산 대목구에 편입되었다. 확장된 지역은 기존의 원산 대목구보다 3배나 더 큰 지역이었다. 원산 대목구장인 사우어(B. Sauer, 辛) 주교는 연길과 의란 지역에 우선적으로 선교 인원을 배치하였다. 당시 연길 지방에는 한국 국경에 가까이 위치한 용정, 팔도구, 삼원봉 세 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약 8,000명의 한인 신자들과 1,200명의 중국인 신자들이 있었다. 용정 본당에는 히머(K. Hie-mer 任) 신부가 부임하였다. 용정은 1921년에 총 인구25,000명으로, 간도 지방 주요 도시로 부각되고 있었다. 1923년에 2,800명, 1925년에는 3,109명의 신자와 174명의 예비 신자가 있었다. 간도 교회 최초의 본당인 삼원봉에는 1921년에 다베르나스(K. D'Avernas, 羅)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1922년에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 그리고 학교를 세우기 위해 충분한 토지를 사들였다. 당시 본당에는 공소 신자를 포함하여 800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후에 본당은 강도들의 소요로 현 소재지인 대립자(大拉子)로 이전되었다.
팔도구 본당에는 1921년에 퀴겔겐(K. Kiigelgen, 具)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 당시 팔도구에는 약 4,000명의 신자와 31개의 공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브레허 신부가 그를 도왔다.
1922년 12월 6일 브레허 신부는 새 본당을 짓기 위해 연길(局子街)로 보내졌다. 이 본당은 원산 대목구가 간도지역을 맡은 후 최초로 설립한 중국인 중심의 공동체였다. 이는 만주 지방에서 중국인 선교를 체계적으로 해야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 훈춘현 팔지(八池,훗날 六道泡)에 본당이 설립되고 팔도구에 있던 퀴겔겐 신부와 보좌로 병거(M. Bainger, 方) 신부가 파견되었다. 팔도구에서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후에 상트 오틸리엔의 총아빠스가 된 슈미트(C. Schmid, 金) 신부였다. 이처럼 간도 지역은 빠른 시일 안에 본당이 5개로 증가되었다.
한편 교육 사업에도 매진하였는데, 1923년 30개의 사립 학교를 설립하였고, 1926년에는 41개의 4년제 초등학교를 운영하였다. 간도 교회의 교육 활동은 그곳에 이주한 신자 공동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교육에 대한 열의로 시작된 뿌리깊은 토대 위에 발전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과로와 전염병으로 여러 명이 희생되었다. 1923년 1월 15일 용정 본당의 보좌였던 슈스터(V. Schuster, 朱) 신부와 팔도구 본당 보좌였던 베버(L.Weber, 俞) 신부가 선교 활동 중에 사망하였고, 이후에도 선교사들이 사망하거나 병고에 시달렸다.
또한 연길 지역의 사목과 선교가 긴박해져 1922년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슈바인베르크(M.Schweinberg, 沈) 신부와 렌츠(P.Lenz, 延) 신부는 중국어 문법책으로 교과서를 바꾸어야 했다. 이들은 1924년 7월 푸진(富錦)으로 파견되었다. 푸진 본당은 의란 지역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1925년 5월 베버(N. Weber) 총아빠스가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8월 연길 지역 본당들을 방문하였고, 사우어 주교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600여 명의 신자들에게견진성사를 주었다. 이때 사우어 주교는 베버 총아빠스와 브레허 신부의 거취 문제를 상의하였다. 왜냐하면 브레허 신부는 3년 동안 선교 체험을 한 후 오틸리엔 본원으로 돌아가 장차 파견될 수도자들을 가르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의 결과 1925년 여름 브레허 신부는 만주 지역 선교부의 분원장으로 임명되어 이곳에서 사우어 주교의 공식적인 대리자가 되었다. 퀴겔겐 신부는 육도포에서 러시아 국경 근처에 있는 훈춘 본당으로 갔다. 이곳은 1924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개의 가구에, 16개의 공소 신자를 포함하여 929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팔도구 본당이 너무 크게 확장되는 것이 늘 고민이었던 사우어 주교는, 대령동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8월, 팔도구에서 활동할 때 이미 이 지역을 알고 있던 엠머링(P.Emmerling, 嚴) 신부가 이 본당을 맡았다. 당시 지역에는 1,556명의 신자와 60명의 예비 신자가 있는 14개의 공소와 3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7개의 학교가 있었다.1927년 말에 그는 다시 팔도구로 돌아가서 1932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어 랍(K. Rapp, 朴) 신부가 대령동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1930년에 젊은 아쇼프(S. Aschoff, 安) 신부와 그의 보좌 물러(E. Miller, 穆)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그들의 활동도 오래가지 못했다. 물러 신부는 1932년 5월 27일에 티푸스로 사망하였고, 아쇼프 신부도 그의 뒤를 이어 6월 4일에 운명하였다. 이어 콜러(S. Koller, 李)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6년 6월 돈화 본당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1900년에 길림의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공소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그 동안 신자들은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자력으 로 토지를 매입했었다. 그러나 길림과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부는 가끔씩 올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당시 연길 본당 주임 신부인 브레허 신부가 돈화 공동체를 방문하였고, 1926년에는 모르겐슈바이스(L. Morgenschweiss, 姜) 신부가 중국인 사목을 위해 부임하였다. 하지만 한인 신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쿠겔만(W. Kugelman, 孔) 신부가 이들을 돌보기 위해 부임하였다. 그러나 1931년에 심각한 소요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약탈이 비일비재하였고, 많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옛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르겐슈바이스 신부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연길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맡았다. 1936년에 공석인 본당을 관리하기 위해 의란의 푸친 본당을 돌보았던 악커만 신부가 부임하였다.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하이겔(G. Heigel, 許) 신부가 그를 도왔다. 1942년 여름 브레허 주교가 슈미트(A. Schmid,安) 신부가 설계한 아름답고 현대적인 성당 축성을 위해 돈화에 왔다. 이 성당의 제대는 지금처럼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고, 당시의 방법으로도 드릴 수 있게 놓여졌다. 감실은 성당 제대 뒤쪽의 반원형 벽감에 붙박아 놓았다.
한편 1927년 의란 지역에는 두 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카무세(佳木斯) 본당에는 렌츠 신부와 바이드너(R.Weidner, 元) 보좌 신부가 있었고, 푸친(富錦) 본당에는 슈바인베르크 신부와 악커만 보좌 신부가 있었다. 1935년 이 지역이 티롤의 카푸친회에 양도되어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연길로 철수하였다.
: II . 설정과 발전
[지목구 설정 배경] 1928년까지 간도 지역의 본당은 8개로 증가하였다. 이 무렵 원산 대목구의 사우어 주교는 중국 영토에 속해 있던 간도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본당수와 신자수가 증가하자 이 지역을 독립시키자는 의견을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었고, 이듬해 2월 5일 브레허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선교사들의 기쁨은 컸으며 특히 본당 신부들의 책임감도 그만큼 커졌다. 그리고 이제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위안도 컸다. 그 당시 연길 지역에 있던 선교사들은 이미 사우어 주교와 약속한 대로 연길 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연길 지목구에 속하게 된 신부들은 다음과 같다. 즉 랍, 차일라이스, 엠머링, 하프너(A. Hafner, 韓), 에버를(H. Eberl, 吳), 퀴겔겐(K. Kiigelgen,具), 모르겐슈바이스, 괴스틀러(B. Köstler, 高), 되르플러(E. Dörfler, 鄭), 슈레플(C. Schräfl, 周), 트라버(H. Traber,馬), 아쇼프 등이었다. 이 12명의 신부들이 8개 본당에서 사목하였으며 신자수는 11,764명이었다. 8개 본당은 연길, 용정, 삼원봉, 팔도구, 대령동, 훈춘, 육도포, 돈화였다. 이때 브레허 지목구장은 다재다능하며 강직했던랍 신부를 부(副)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본당의 증설과 확대] 연길 지목구가 설립된 후 최초로 설립된 본당은 1929년 가을 용정 본당에서 분할된 두도구(頭道構)였다. 그 해 10월 슈레플 신부가 부임하 여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부녀자를 위한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31년 콜러(S. Koller, 李) 신부가 보좌로 부임하였고, 슈레플 신부는 1931년 10월 옹성라자(甕聲磁子)로 옮겨가고, 하프너 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 성당과 사제관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1940년 9월에 삼도구(三道構) 본당이 주위 10개의 공소와 함께 두도구에서 분리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하프너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도시 20,000명의 주민 중120명이 신자였으며, 공소들에는 500여 명의 신자가 더 있었다. 1930년에 합마당(蛤蟆塘) 본당도 설립되었는데, 그곳은 원시림 깊숙이 자리잡은 조용한 곳이었다. 이곳에 쾌스틀러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건축하고 가옥을 매입하여 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점차 인접한 군청 소재지인 백초구(百草構)로 신자들이 옮겨가 1939년에는 신자 대부분이 이사를 하였고, 1940년 본당도 백초구로 옮겨졌다.
1931년 대령동 본당의 공소였던 옹성라자가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슈레플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35년에 강당, 사제관, 수녀원, 학교가 건축되었으며, 이때 본당 명칭이 옹성라자에서 명월구(明月構)로 바뀌었다. 1936년 슈레플 신부가 신첨 본당으로 이임되고 용정하시 본당 보좌였던 렌하르트(A. Lenhard, 盧) 신부가 부임하였다. 같은 해 6월 올리베따노 수녀회의 분원이 설립되어 여성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글 · 교리 · 재봉 · 가사 등을 교육시키고 진료소도 운영하였다.
1931년 연길상시 본당이 설립되어 퀴겔만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본당은 연길시 서쪽에 한국인들이 점점 더 많이 거주하면서 설립되었다. 퀴겔만 신부는 1932년에 대지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과 학교를 설립했다. 1936년에 997명의 신자와 416명의 해성학교 재학생이 있었다.이 본당에는 1939년 아펠만(B. Appelmann, 裵 신부가 부 임하였다.
1936년 8월 하순 슈레플 신부의 노력으로 길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첨(新站) 본당이 설립되었다. 1936년 12월 26일에 후임으로 루드비히(S. Ludwig, 柳)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희생 정신과 선행으로 한국인 신자들과 중국인 신자들을 사목하던 중 1949년 5월 25일 중국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다음날 즉결 재판으로 처형되었다.
1936년 아펠만 신부는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기념 축제' 준비를 위해 해성학교 대강당을 신축하였다. 행사가 끝난 후 대강당을 성당을 사용하는 용정하시 본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으로 에그너(R. Egner, 왕) 신부가 부임하였다. 하지만 그는 용정의 중심지에 용정상시 본당을 부활시켜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1937년 1월 슈레플 신부가 부임하여 해성학원(Finfschule)을 설립하여 제때 배우지 못한 20세 미만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본당 신설시 교통 시설 확충과 인구 이동 및 정책적 기반 시설 건설 등은 중요했다. 이 점은 연길교구 최북단의 목단강(牧丹江) 본당을 신설할 때 특히 의미가 있었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목단강시는 철도가 놓여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즈음 인구가 300,000명으로 늘어나 한 · 중 · 일 3국인들이 사는 대도시가 되었다. 1935년 트라버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여 한국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에 토지를 매입하고 성당과 사제관, 학교 등을 지어 그 해 12월 8일에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후인 1939년에 중국인 신자들을 위해 렌츠 신부가 부임하여 중국인들을 위한 미사와 한국인들을 위한 미사가 분리되었다. 1941년 1월 렌츠 신부는 연길로 돌아가고, 후임으로 퓨터러(M. Fiitterer, 郭) 신부가 왔다. 그는 한국인들 사목만 담당하였고, 주임인 트라버 신부가 반은 한국인들을 위해, 반은 중국인들을 위해 사목하였다.
1941년 4월 15일 중국인 거주 지역에 그들을 위한 독자적인 본당을 설립할 목적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건축을 시작하여 10월 5일 축복식을 가졌다. 이후 중국인 사목을 위해 주임 신부로 발백(L. Ballweg, 朴) 신부가 부임하였다.
도문(圖們)은 국경 인접 지역이어서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오랫동안 공소로 남아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훈춘 혹은 연길 본당에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1941년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벤츠(A. Benz, 范) 신부를 파견했다. 그는 1942년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1945년 김봉식(金鳳植, 마오로) 신부가 보좌 신부로 부임하였다. 1946년 도문 본당의 신자수는 800여 명에 이르렀다.
〔연길 지목구의 시련] 간도 지역에는 마적들의 약탈 행위와 전염병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생명을 잃는 등 시련이 따랐다. 특히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 사변으로 이 지역에 만주국(滿州國)이 세워지고 이 혼란을 틈타 마적들의 약탈 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시골에 살던 신자들은 집과 토지를 버리고 도시로 모여들었다. 성당은 이주해 온 신자들의 숙소로 변하였다. 교회도 대처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당시 연길 지목구의 147개 공소 중 130개가 문을 닫았다. 공소의 폐지와 함께 침체되는 본당이 속출하였다. 우선 1931년 영암촌 본당이 대립자(大拉子) 시내로 이전되었고, 돈화 본당도 같은 해에 마적과 일본군의 횡포로 일시 폐쇄되었다. 1932년 육도포 본당에 공산당이 기습하여 트라버 신부가 피신하였고, 본당도 폐쇄되었다. 1932년 3월 팔도구 본당 보좌 엠멀링 신부가 공소 신자들을 돌보다가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사망하였고, 대령동 본당 보좌 물러 신부가 5월 27일에, 주임 아쇼프 신부가 6월 4일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이후 더 비참한 재앙이 이어졌다. 6월 6일 아쇼프 신부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대령동 본당으로 가던 부지목구장랍 신부가 술 취한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했다. 다른 몇몇 신부들도 같은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중 때마침 약을 입수하여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3년 3월 초에는 마적들이 신부를 인질로 잡아 몸값을 얻어낼 목적으로 밤에 대령동 본당을 급습했다. 그러나 당시 주임인 콜러(S. Koller, 李) 신부는 이때 본당에서 45분 정도 떨어진 차도구에 있었다. 그것에 광분한 마적들은 본당에 방화를 했다.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 등 모든 것이 불탔다. 이 일은 선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1934년 8월 1일 선교의 중심지인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이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고 브레허 지목구장이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축복식은 1934년 9월 5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예수 성심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연길 수도원은 선교 수도원(Massinmeshe)이었다. 그곳은 사목 활동과 수도 생활의 중심지이며,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수도자들의 삶과 인격을 통해서 드러내는 배움터가 되어야했다. 그래서 본당에 있는 신부들은 4~6주마다 수도원에 모여 회합을 가졌다. 회합은 대부분 선교 활동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강의로 이루어졌다. 연길 수도원은 본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지친 신부들이 육체적 · 정신적으로 쉬고 회복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선교 수도원에서 현지인 수도자의 양성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길 수도원은 이 점에 있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8년 3월 23일 브레허아빠스는 대신학생인 최영호(崔永浩, 요한 비안네, 1908~1998)와 김봉식(金鳳植, 마오로, 1913~1950)을 수련자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연길 수도원의 첫 한국인 성직 수사 지망자들이며,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 3월 26일 두 수련자는 유기 서원을 하였다. 1942년 서 베네딕도가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는 1939년 수도원에 입회하여 덕원 소신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1942년 연길 수도원에 첫 한국인 평수사 지원자로 김 마르코가 입회하였다. 1945년 봄 신경(新京) 출신 중국인 신학생 조철(趙鐵, 요셉)이 수련을 시작하였다.
선교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활동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연길에서 그들은 벽돌공, 열쇠공, 소목, 대목, 재봉사, 금속공, 인쇄공 및 제본공, 정원사, 요리사, 건물 관리인, 건축 감독, 빨래, 자동차 관리 및 운전 등 다양한 봉사를 악조건에도 만족해 하며 수행하였다. 수사들이 가장 많을 때에는 16명이나 되었다. 1939년 11월 초 필리핀 성 베니토 수도원의 해체로 그난(S. Gna-mn, 具) 수사와 하자이델(T. Haseidel, 賀) 수사가 오게 되어 수도원 가족이 늘어났다. 그난 수사는 종전까지 템하르트(D. Demharter, 玉) 수사가 하던 정원과 농사일을 넘겨받았고, 하자이델 수사는 철 공장에서 일하였다. 수사들의 책임자인 슈바이거(O. Schweiger, 沈) 수사는 1942년부터 군사 훈련에 불려갔다. 그것은 수도원 화물차가 군대 지원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는 운송 수단으로 화물차, 승용차, 오토바이 등이 있었으나, 1940년 이후 휘발유를 구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인쇄소는 연길 수도원에서 가장 큰 사업체였다. 1939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인쇄 전문가 브라이트사메터 (E. Breitsameter, 奉) 수사를 연길로 파견하였다. 그는1940년 3대의 일제 인쇄기와 1대의 활자 주조기를 갖고 평균 50명의 중국인 직원들과 함께 인쇄소를 이끌었다. 전쟁으로 유럽에서 재정적인 지원이 끊어졌을 때 수도원은 오로지 작업장 수익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것의 대부분은 인쇄소에서 나왔다. 브라이트사메터 수사의 일 솜씨가 정확하다고 호평이 나자, 관청의 모든 인쇄 주문을 받게 되었다. 이는 재정적으로 큰 이익이었지만 인쇄 용지 확보에도 이점이 많았다. 소련군이 진주하였을 때 인쇄소는 즉시 압류되었고, 브라이트사메터 수사는 공산주의의 선전 책자를 인쇄하는 데에 협력해야 했다. 수도자들이 체포된 뒤 인쇄 기계들은 모두 길림으로 보내졌다.
페츠(R. Petz, 栢) 수사는 대목이었는데, 건축부를 관리했다. 연길 수도원, 연길 수녀원, 연길상시, 용정, 훈춘, 합마당, 명월구, 돈화, 대립자, 차도구 본당 등이 그가 지은 중요한 건축물이다. 건물 내부 설비는 소목인 물러(A. Miiller, 穆) 수사와 바움게르트너(E. Baumgartmer, 方)수사가 중국인 인부들과 하였다. 재봉 방과 구듯방은 바
l(T. Baur, 朴) 수사와 킴멜(L. Kimmel, 金) 수사가 맡았다. 정원은 템하르트너 수사가 맡아 야채, 달갈, 우유 등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였다.
[연길 수녀원] 1931년에 스위스 캄(Cham)에 있는 성십자가 수녀원으로부터 6명의 수녀가 도착하였다. 그들이 12월에 연길에 도착했을 때 유럽식 수녀원 건물은ㅍ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 현지인 수녀들을 위해 한국식 건물도 지었다. 5명의 지원자들이 서양 수녀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들이 해야 할 일은 소녀들을 교육시키고 부인들을 지도하고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1931년 수녀들은 연길에서 병원을 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약소였다. 1935년 밖 르츠부르크의 선교 의사 협회에서 파견한 독일인 의사레너(Ludwig Lehner) 박사가 왔을 때, 그것은 커다란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수녀들에게 실질적으로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가르치고, 가장 자주 나타나는 병에 관한 교육을 시켰다. 1935년 이후 해마다 현지인 수녀들이 수도 서약을 하였다. 1936년에 이미 18명의 현지인(한국인과 중국인)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고아들의 어머니이며, 소녀들과 현지 여성들의 교육자였다.
: Ⅲ . 성장과 변모
[간도 교회 설립 기념 선교 축제] 용정에서 1936년 8월 24~26일까지 거행되었던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기념 행사"는 단순히 하나의 행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교구 발전을 원하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었고, 한국 교회 전체가 참여한 일치와 화합의 대규모 선교 축제였다. 1897년에 김영렬의 인도로 세례를 받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선교하였던 '북관의 12사도' 중 몇 명이 살아 있었기에 이 기념일을 50주년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 행사에 길림 대목구의 가스페(A. Gaspais, 高德惠) 주교와 삼원봉 본당을 5년 간 맡았던 서울의 라리보 주교, 견진성사 집전을 위해 이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원산의 사우어 주교가 초대되었다. 축제 전야인 8월 24일 본당 마당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내용의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신자들과 비신자를 합해서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다음날 주만 교황 사절 대리(駐滿敎皇使節代理) 가이페 주교가 야외에서 주교 대례 미사를 거행했으며 라리보 주교가 축제 강론을 했다. 이어 주교와 신부, 수사, 수녀, 정부 대표자, 1,200명의 학생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참가한 가운데 축하식이 있었다. 생존해 있는 5명의 사도들에게 기념 주화가 헌정되었다. 오후에는 학생과 신자들이 함께 시가 행진을 하였다. 다음날 원산의 사우어 주교가 주교 대례 미사를 집전했다. 낮에는 운동회와 가톨릭 교리 경시 대회가 열렸다. 이 축제는 가톨릭 신앙을 알리는 인상적인 볼거리였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각성제가 되었다. 당시 연길교구에는 19명의 신부와 16명의 수사와 1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그리고 12개의 본당, 79개의 공소, 14,000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대목구 승격] 연길 지목구의 외적 발전의 정점은 의심할 바 없이 대목구로 승격된 것이었다. 1937년 7월 18일에 교황의 칙서가 도착했다. 1937년 9월 5일로 서품식이 결정되었다. 서품식은 봉천 대목구의 블루아(J.-M.-M. Blois) 주교와 서울의 라라보 주교의 도움을 받아 주만 교황 사절 대리 가이페 주교가 집전했다. 그 외에도사우어 주교, 의란 카뮤세 본당의 주임인 캡(Adalar 0.Cap) 신부 그리고 동경 주재 독일 대사의 지시로 독일 제국의 대표자로 온 봉천의 총영사 퀼보른(Kiihlbom) 등이 참석하였다. 브레허의 주교 서품은 연길 지역 선교 활동의 외적 발전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연길 지역은 중일 전쟁의 발발, 일제의 간섭, 높은 물가고 등으로 점점 암울 해졌다.
[교구 및 수도 사제 양성]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사우어 주교는 1921년 서울 수도원 내에 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21년 당시 간도 신학생으로 14명이 입학하였다. 원산 · 평양 · 연길 3개 교구 연합 신학교인 덕원 신학교에 1936년 현재 30명의 연길교구 신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 1936년 7월 6일 덕원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연길교구 소속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부제와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부제가 덕원 수도원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들은 베네딕도회가 한국 진출 후 태어난 첫 현지인 신부들이라는 점에서 기쁨이 컸다. 이후 1938년 성 베네딕도 축일에 연길 수도원 성당에서 신윤철(申允鐵, 베드로) 부제가 사제로, 그리고 네 명의독일인 차부제가 부제로 서품되었다. 새 신부는 첫 미사를 자신의 고향 본당인 팔도구에서 봉헌하였다. 1939년4월 10일 연길의 수도원 성당에서 4명의 부제들, 퓨터러, 벤츠, 물러(A. Miiller, 毛), 하이글 등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1940년 3월 25일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부제와 이태준(李泰俊, 야고보) 부제가 연길 수도원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독일인 부제들은 독일 정세의 불확실성과 선교지 조기 적응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1937년 한국에 도착하여 덕원 신학교에서 마무리 공부를 하였다. 베네딕도회 수사로서 최영호는 1940년 6월 29일에, 김봉식은 1942년 5월 1일에 각각 연길 수도원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최 비안네 신부는 연길 수도원 최초의 베네딕도회 수사 신부가 되었다. 1945년 9월 30일 용정 하시 본당 출신 허창덕(許昌德, 치릴로) 부제와 길림교구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연길 수도원에 입회한 유일한 중국인 수사 조철(趙鐵, 요셉) 부제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조 신부는 교구 폐쇄 후 중국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수용소 생활을 하는 형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4월 17일 다조구(茶條溝) 본당 출신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부제가 덕원 수도원에서 사제로서품되었다.
[전례 운동] 브레허 주교는 랍 신부와 아펠만 신부가 전례 운동을 도입한 것을 대단히 환영했다. 이 운동의 근본 취지는 미사가 본당 공동체를 집결시키는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길교구에서는 신자들의 능동적인 미사 참여를 위해 미사 경본의 한국어 번역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벨기에의 전례 운동을 받아들여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의 자국어화' 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전례 토착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두 신부는 미사 경본의 한국어 번역에 매진하여 1932년 가을부터 등사판 미사 경본을 신자들에게 배부하고, 그 사용법을 가르 쳤다. 한편 아펠만 신부는 1932년 겨울에 《소미사 경본》을 한글로 저술하였는데 여러 가지 미사 경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브레허 주교는 공동 집전 미사를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다. 공동 집전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제물봉헌도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신자들을 향한 미사 를 봉헌하였을 때 참석자 모두 뜨거운 감명을 받았다. 제물봉헌과 신자들을 향한 미사는 그 당시에 전례적 혁신이었다. 연길교구에서 시도된 '신자 전례 교육 운동' 의 절박한 과제는 미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또 그 잔치에 보다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일깨우고 요구하는 일이었다. 각 본당마다 주일 미사 전에 수 개월 동안 미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공동의 낭송과 응송을 연습했다. 1931년 대림 제1 주일부터 주일 미사와 축일 미사 양식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낱장으로 인쇄한 미사 양식(Messfor-mular)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시용 기간동안 연길의 선교사들은 미사 경본을 번역하는 것이, 미사가 공동의 축제가 되는 전제임을 알게 되었다. 1936년 덕원의 로트(L. Roth, 洪) 신부가 《미사 경본》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쇼트(A. Schott) 신부의 《쇼트 미사 경본》(Schottmessbuch)의 번역이다. 이 책의 간행으로 전례 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청소년 운동과 타르치시오회] 연길에서 전례 운동과 청소년 운동은 동일한 신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랍 신부와 아펠만 신부는 1931년 가톨릭 청소년들을 위한 기구를 만들어 볼 계획으로 타르치시오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복사(服事)들의 단체로 순수하게 시작된 모임으로, 당시 연길 지방에 유포되고 있던 볼세비즘(Bolshevi-sm)에 대한 사상적 대항력도 키우고, 성체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시키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장려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청년 동맹에 가입시켰다. 이 모임을 교구 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해 1931년 8월 3~5일까지 대령동 본당에서 제1차 전 간도 가톨릭 소년회 연합 대회를 소집하였고, 대회와 더불어 각 본당 청소년 모임의 연합회도 결성하였다. 이 대회는 각 본당에서 180명의 소년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의 연령은 12~17세였다. 제1차 대회가 있은 후 타르치시오회는 교구 내 모든 본당으로 확대되었고 로마의 중앙 협회까지 연결되었다. 1931년 말 341명의 회원을 두게 되었고 독자적인 <타르치시오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월간지 《가톨릭 소년》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회지를 통해서 전례 운동을 준비할 수 있었다. 1934년 제2차 총회가 8월 6일부터 3일 간 용정 본당에서 개최되었는데 2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였다. 타르치시오회는 젊은이들을 전례 운동과 성가대 활동에 연결시켰다. 라틴어로 된 성가곡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성가 가락을 음미하며 노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타르치시오회는 전례 개혁과 청소년들의 신앙 생활 심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교육 사업과 선교 사업] 연길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선교의 수단으로 학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길교구의 본당 소속 학교들은 모두 수사 들의 손을 거쳐 지어졌다. 교구 내 모든 학교의 이름을 '해성학교' 또는 '해성학원' 으로 통일시키고 교구 차원의 행사에 학생들을 참여시켜 일체감이 생기게 하였다. 간도의 신자들은 교리를 배우고 기도를 합송하기 위해서 한글을 배워야 했다.
1938년 실시된 학제 개편 전까지 본당 부설의 모든 학교에서 교리와 성서를 가르쳤다. 그런데 1937년 5월 2일 일제는 학제를 개편하여 다음해 1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학교를 감시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후 사립 학교는 정부로부터 새로 인가를 받아야 했고, 모든 학교의 국유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6년 과정의 소학교는 1~4학년까지는 '국민학교' (國民學校), 5~6학년은 '국민우급학교 (國民優級學校)가 되었다. 1942년 일제 당국이 사립 학교에 시학관(視學官)을 파견하여 감시하기 시작하였고 수도복을 입고 교단에 설 수 없다는 명령에 따라 수녀들은 교직을 포기해야 했다. 반면 당국은 1938년 브레허 주교에게 자선 사업, 교육사업, 선교 사업의 공적을 인정하여 감사패를 수여하고 교구 내 9개 학교를 인가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셈대로 1944년 모든 선교 학교들이 국유화되어 당국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교육을 통한 선교가 점점 빛을 바래 갔다.
: Ⅳ. 폐쇄와 현재
제2차 세계대전은 연길교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군이 1945년 8월 18일 만주를 점령하였다. 9월 2일 팔도구 본당에서 젤러 수사가 사살되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도시에서 약탈을 일삼고 떠들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교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그들은 수도원을 보호하였고, 수도승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미래는 전적으로 어둡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1946년 4월 11일에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다시 한번 교회를 위태롭게 하였다. 러시아군이 1946년 4월 만주를 떠났으며, 통치권을 중국-만주 공산 정권에 넘겨주었다.
1946년 5월 20일 오전 10시경 군인들은 연길 수도원에 도착하여 수도원에 있던 수도자들을 체포 · 투옥하였다. 다른 본당들에 있던 수도자들도 역시 체포되었다. 독일 국적 때문에 나치주의자로, 그리고 일본인들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수도자들은 얼마 동안 한국국경에 있는 두만강변의 남평 수용소에서 지냈다. 1947년 3월 25일 괴스틀러(B. Köstler, 高) 신부가 사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2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연길 수도원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되었다. 수도원은 약탈당했고 가구들은 없어졌으나 신부들과 수사들은 즉시 다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수도자들이 공산 당국에 의해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고,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해도 수도원은 다시 한번 기도하고 일하는 장소가 되었다. 상황은 연길에서도, 도시 외곽에서도 선교 활동을 수행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공산 정권이 만주에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는 것은 원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외국인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압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1949년 말, 정부 관리들은 독일 선교사들에게 출국을 신청할 수 있다고 통보하였다. 그것은 강제로떠나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독일 베네딕도회 첫 그룹이 1949년 12월 유럽을 향해 만주를 떠났다. 그들 가운데는 매우 심하게 병고에 시달리던 브레허 주교도있었다. 그때쯤 이미 수도원 건물은 정부에 몰수되어 있었다. 1949년 3월 수도승들은 수도원을 비워야만 했다. 그들은 수녀원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1년
후 한국 전쟁이 발발된 후(1950. 9) 그들은 한번 더 이동해야만 하였다. 연길시의 서쪽 지역에 있던 한국인 본당은, 1950년 11월 그들이 모두 연길을 떠나라는 명령이있을 때까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팔도구본당이 만주에서 그들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다. 공산 정권 아래에서 머무는 것이 불가능해진 선교사들은 모두유럽으로 돌아갔다. 1944년 당시 연길교구는 오틸리엔연합회에서 두 번째로 큰 선교 지역이었다. 19개 본당에서 18,000명의 신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물질적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다. 비테를리 신부가 1954년 포교성성에 의해 연길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80년까지 이 직무를 맡았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지금까지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가 수도자들을 만주로 돌려보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원들은 이전의 선교지역을 방문하려고 노력하였다. 1985년 볼프(Notker Wolf) 총아빠스는 만주를 여행할 수 있었으며, 상황을 직접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만났으며, 한국 전쟁 때까지 그 지역에서 활동했던 베네딕도회 신부, 수사들을 기억하는 몇몇 신자들을 만나 대화할수 있었다. 그리고 4개의 소규모 신자 공동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1990년에 15개로 증가되었다. 몇몇 새로운 성당들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이전의 성 십자가 수도원 건물은 군대 막사로 변해 있었다. 중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내면적인 재조정은 이전의 연길교구를 길림교구에 병합하였다.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이전 선교 지역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접촉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가능한 한 그들을 지원하도록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 간도 교회 ; 김영렬 ; 랍, 콘라트 ; 베네덕도회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 브레허, 테오도르 ; 비테를리, 디모테오 ; 원산 대목구)
※ 참고문헌  A. Kasper · P. Berger, HWAN GAB(還甲), Miinster-schwarzach, 1973/ Godfrey Sieber,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Ottilien, EOS Verlag, 1992/ P.F. Renner, Der finfaomige Leuchter Bd. II ·IV, EOS Verlag, 1971 · 1993/ Chroniken aus den Mission, Der Bene-diktiner-Missionarire von St. Ottilien, Sonderausdruck aus der Chronik der Benediltiner-Kongreatitio von St. Ottilien, Tastachenbericht aus dem Missionsgebiet Yenki(Mandschurei) Nr. 3/1954/ Chi-Hun Son, Studien zur bemedikrinischen Missionsmethode von 1909 bis 1949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Universität Miinchen, 1996/ P.D. Drexl OSB, Necrologim Congregationis Ottiliensis 1888~2000, St. Ottilien, 2000/ 부산 올리 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 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P.H. 왈터, 정학근 역, 《승리의 십자가》, 분도출판사, 1973 1 韓允勝, 〈金以器와 그弟子〉,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韓興烈, 延吉教區 天主教略史〉, 《가톨릭 청년》41호(1936. 10). 〔宣智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