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觀想
〔라〕contemplatio · 〔영〕contemp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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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생활의 시조 성 안토니오.
마음이 사색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단순하고 사랑에 가 득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기도의 경지. 아빌라 의 데레사가 구분한 아홉 가지 기도의 단계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기도 방법. 그리스도교 신비신학 전통 에서는 인간 영혼의 능동성과 수동성 여부에 따라 관상 을 둘로 구분하기도 한다. 기도하는 이 스스로의 노력으 로 혹은 은총의 도움으로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습득 관상(acquired contemplation)과 스스로의 노력이 아 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주입 관상(infused contemplation) 또는 주부적(注賦的) 관상이 다. 관상이라고 할 때에는 전통적으로 후자인 주입 관상 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지에서 영혼은 자신이 지닌 능력 혹은 외부 요소들의 도움이 전혀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직접 초월 세계 안으로 들어 간다. 〔관상의 신학과 주입 관상의 특징〕 영혼은 순수한 신 앙의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또한 영혼이 사색적이고 방법적인 행위의 묵상으로부터 직접적이고 단순한 관상의 상태로 옮겨갈 때 자기 자신 에 대한 사랑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진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관상은 점차로 습관화 된다. 관상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충동과 도움으로 되는 것이므로 모든 관상이 전적으로 습득 관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관상 기도란 단순하고 사랑에 찬 마음으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이고, 이 관상 기도 안에서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영혼은 신앙 안에서 얻는 간접적 지식으로 하 느님께서 영혼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해 왔지만 이제 영혼은 실제적 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더욱 절실히 알게 된다. 그래서 관상 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인 간은 단지 이러한 은혜를 주님께 구하면서, 이러한 은혜 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관상 은 주입 관상이며, 주입 관상의 기도는 여러 면에서 다 양한 양태의 마음의 기도와는 다르다. 우선 관상은 그 자체 안에 아주 특수하고 고유한 효과 들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보통의 기도와 신 비적인 기도를 구분할 때는 신학적인 어려움이 있다. 물 론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나 공통 분모로서 의 개별적인 하느님 체험은 여러 차이점들보다 더 중요 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된 입장에서 보통의 기 도를 바라보면 개별적이고 고유한 하느님 체험의 신선함 이 흐려지고, 참되게 하느님께 아뢰는 것은 더 높은 단 계의 기도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길 것이다. 일상적인 기 도는 단지 의무로서 간주되어 그 자체로서는 하느님께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관상 기도 안에는 신비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신비 적' 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은혜로 생기는 마음의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 대부분의 사 람들은 '하느님과의 일치' 를 일반적으로 지성의 활동, 특히 하느님에 관해서 혹은 신적 사물에 대해서 밀도 깊 게 그리고 자주 친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러나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나 완덕을 이해해서 는 안된다. 악마들도 결국 하느님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는 지상의 인간이 완 덕을 향해 나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즉 하느님과 의 일치는 인간의 이성, 감성, 의지 안에 애덕의 궁극 목 표인 하느님께 대한 더 나은 관점을 제시하면서, 이 길 을 방해하는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아 준다. 그러나 이 러한 하느님과의 일치가 완덕 자체는 아니다. 〔관상의 전통〕 관상은 오랜 동안 묵상을 실천하는 단 계를 거친 영혼이 신비적으로 메마름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경지를 뜻하기도 한다. 기도에 관 한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묵상으로부터 관상에 이르는 경 로를 자주 다루어 왔다. 그래서 이 점진적인 과정을 그 리스도교의 문헌들은 여러 단계를 거쳐 '영적 결혼' 과 같은 탈혼적 합일의 경지에서 완성되는 과정의 단계로 묘사해 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요한 가시아노, 《무지의 구름》의 무명(無名) 저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 가의 성 요한, 살레시오의 성 프란치스코 같은 이들이 아주 자세하게 다루었다. 이들의 설명은 신비신학(영성신 학)의 영역 안에서 관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점이 되 고 있다. 이들의 저서는 때로는 대단히 전문적이어서 어 렵고, 신비적이어서 대단히 불분명할 때도 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 안에서 영혼이 하느 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신플라톤주의 사고 구조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여정은 세속을 떠나 자기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여정이며, 정화를 통해 덕을 쌓아 가고,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 대한 신적 관조에 이 르는 여정이다. 요한 가시아노에게 영혼의 여정은 복잡 함에서 단순함으로 가는 여정이다. 이는 때로 소용돌이 속에서부터 고요함으로 가는 여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여정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의 마음은 여러 생각들, 혹은 악마가 불어넣어 주는 생각들의 폭풍으로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지면 기도 안에서 끊임 없이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다. 관상은 하느님과의 일치 를 향해 영혼을 이끌어 준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합일은 본질의 합일이 아니고 단지 의지의 합일이다. 영혼은 하 느님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하느님의 지혜와 아 름다움으로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현존의 은혜를 받으 며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느님으로 조명되어 성부 께서 지니신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양자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관상을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응 시라고 본다. 이것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관상 은 진리에 대한 확고 부동한 응시 혹은 마음의 올곧은 집중, 묵상은 진리를 찾는 강렬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전통을 이은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을 이은 중세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관상은 "파악된 진리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에 찬 응시"이고 반면에 묵상은 "감 추어진 진리를 찾는 학구적인 탐구"이다. 성 빅토르 수 도원의 리차드는 관상이란 "마음이 온전히 자유롭게 지 혜의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것이며, 흠숭하는 마음으로 응시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관상이란 지성이 순수하게 응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감 성적이거나 상상력이나 사색적 요소가 전혀 없는 응시를 뜻한다. 물론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색적 요 소들이 앞서거나 동반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미 소유한 진리를 직관하는 가운데 지성이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이성의 활동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의지력이 그 안에서 이끌어 낸 행위와 감성적 움직임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이 습관적 경향으로 바뀌는 가운데 쉬고 있음은 새로운 감성적 움 직임과 행위를 추구하는 의지력의 활동과 구분된다. 그 래서 관상은 특별히 지성의 직관적 행위뿐만 아니라, 의 지의 끈질긴 행위가 우세한 기도 양상에 적용될 수 있 다. 그래서 기도에 관해서 관상이라고 할때는 직관의 능 력을,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주로 지성의 활동을 강조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관상은 신적 관조의 완 성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 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상의 삶 안에서 완덕이라는 것 은 순수 관상가들의 덕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없고, 오 히려 자신들의 관상에서 얻은 것을 설교를 통해 사람들 을 가르치고 교육시키는 이들의 덕스런 행위를 의미한다 고 한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도미니코 회 신학자들은 관상을 신비적 상승의 과정으로 보기보다 는 오히려 연구와 내적 훈련을 통해서 성숙되어지고 전 해지는 영적 지혜로 보았다. 13세기 이후 신학자들은 지혜의 은사와 이해의 은사 가 주입 관상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 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의 은혜가 주도하는 모든 마음 의 기도는 주입 관상의 기도인가? 간단히 말해 관상이란 사랑과 기쁨 안에서 단순하게 하느님과 신적 사물을 응 시하는 것을 뜻하기에 부분적으로는 주입되고, 또 부분 적으로는 습득되며 또 때로는 전체가 다 주입된다. 하느 님의 특수한 은혜로 이 관상이 이루어질 때 부분적 주 입, 부분적 습득일 것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빛 으로 비추시기에 영혼이 피동적으로 하느님의 인도에 응 하게 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주입이다. 역사적으로 17 세기 이전에는 주입 관상과 습득 관상을 명확하게 구분 하지는 않았다. 습득 관상이라는 단어는 17세기에 들어 서 갑작스레 여러 문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금세기에 새롭게 영성 생활에 대한 큰 관심이 일어났 고, 일반 대중들이 관상 기도 방법을 잘 배울 수 있도록 응용한 것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과 거 20~30여 년을 살펴보면, 묵상과 관상에 대한 크나 큰 관심은 새로운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러한 관심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유산뿐 아니라 동양의 관상법, 묵상법 등에 대한 탐구로 번져 나가고 있다. 이 런 분위기에서 초월적 명상법, 요가, 좌선 등을 그리스 도교의 묵상법에 도입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관상을 추 구하는 운동들이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다양한 기도 양상들에 대해서 좀더 정확한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완덕과 관상〕 과연 신적 합일의 경지에서 기도하는 영혼이 단순함의 기도의 경지에서 기도하는 영혼보다 더 높은 완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는 먼저 완덕의 경지를 주입 관상의 경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입 관상이 완덕 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 가' 라는 질문과 '그러한 은혜가 완덕의 필수적인 요소인 가' 라는 질문과도 구분해 보아야 한다. 주입 관상의 은 혜는 영혼 안에 애덕을 증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도움은 성덕에 진보하도록 이끌어 준다. 만일 영혼이 이러한 은혜의 초대에 신실하게 응답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즉시 이 은혜를 거두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입 관상은 대단히 고귀한 은혜이다. 그러나 주입 관상의 은혜로부터 얻는 일치 자체가 직접적으로 우리를 더 나은 완덕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단지 애 덕의 실천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자극해 주면서 영혼을 도 와줄 뿐이다. 주입 관상의 특수한 은혜는 신적 사물에 대한 주입 조명이며, 영혼을 더욱 깊이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주입되는 강렬한 동적인 열망이다. 그러기에 올바 른 의미에서 완덕은 하느님께서 주입하시는 은혜들에 대 한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의 응답 안에서 찾을 수 있으 며,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을 포용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응답에서 자란 다. 일반적으로 주입 관상의 은혜들은 인간이 신앙의 응 답 안에서 협력하게 하면서 애덕을 성장시켜 주며 완덕 에 나아가도록 돕는다. 만일 완덕에 이르는 경로를 엄격 히 구분한다면, 완전한 기도는 완전한 이들에게나 제한 되어야 할 것이고 생활 상태의 차이가 바로 완덕의 차이 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 가〕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경건주의의 경향 안 에는 항상 추상적인 영성화의 유혹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유혹은 청원 기도가 오로지 초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도이며, 모든 감성은 무가치하고 기도를 더 높고 순수한 단계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다. 그래서 이것은 관상에 대한 관심을 정도(正 道)가 아닌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 또 한 그러한 쪽으로 노력하는 강도가 강하면 인간 심성의 능력은 극도 순수 지성에 대한 체험 혹은 순수 어둠이라 는 신비적 불명확성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다른 극단은 기도를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오늘 날 관상의 의미는 여러 다른 용도로 쓰이는 셈이다. 그 런데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둔 밤' 이라고 부르는 수동 적 관상은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관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요가, 선 또는 초월 명상 등의 기술 로 도달하는 관상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로율라의 성 이 냐시오의 관상과도 다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상은 성령 께서 인도해 주시고, 알게 해주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진 리와 그리스도 자신을 숙고한다는 의미에서 당연히 그리 스도교적인 묵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제 없이 진행되는 관상은 아무런 그리스도교적 특징을 갖지 못할 것이다. 설사 그 자체 안에 반대해야 할 요소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단지 초월적 명상과 같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체계로서, 영적인 세계에 대 한 감수성을 길러 주는 지성적, 감성적 훈련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도 ; 묵상) ※ 참고문헌 Josephus de Guibert, S.J., Theologia spiritualis ascetica et mystica, Rome : Georgian University Press, 1946/ William Johnston (ed), The Cloud of Unknowing, New York Image Books, 1973/ Thomas Merton, 오무수 역, 《명상이란 무엇인가》, 가톨릭출판사, 1989/ 정대 식, 《기도와 삶》, 가톨릭출판사, 1983/ 죠던 오먼 저, 이홍근 역, 《영 성신학》, 분도출판사, 1987/ 루이 부이에 저 ,정대식 역, 《영성 생활 입문》, 가톨릭출판사, 1992. 〔沈鍾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