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 소재. 1938년 5월 해주(海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12월에 폐쇄되었다.관할 공소는 운산면(雲山面) 불당골 · 온정면(溫井面) 비하리 · 석산면(石山面) 구산리 삼산 · 호남면(湖南面) 가미 · 은천면(銀川面) 비봉리 원동 · 운산면(雲山面) 호산리 돌다리와 경수골 · 홍연 남장 · 가린재 · 천북재 등 10여 개소. [교 세] 승격 당시60~100명, 1944년 711명. [역대 신부] 초대 조인원(趙仁元) 빈천시오(1938. 5~ 1942. 2), 2대 이희연(李喜淵) 프란치스코(1943. 12~1944. 11), 3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1944. 11~1950. 12).
연백 지방은 박해 시대에 선교사들이 서해(西海) 해로를 통해 우리 나라로 입국하던 주요 상륙지 가운데 하나로, 이 지방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는 1877년 9월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주교와 함께 입국한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와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였다. 그리고 1892년에 약현(현 중림동) 본당이 서울의 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두세 신부는 과천 · 양주 · 광주 등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뿐만 아니라 송도와 황해도 백천 지방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에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때 연백 지방도 약현 본당 관할 공소로 복음을 수용하게 되었다.연백 지방 가운데 연안읍은 1900년 신천군 청계동 본당의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가 와서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신자는 16명, 예비 신자는 94명이었다. 그러나 이 연안 읍내 공소는 발전을 예상한 빌렘 신부의 기대와는 달리 관속들의 악의와 부상(負商)들의 협박으로 공소를 설립한 지 얼마 안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한편 연백 지방의 불당골 공소는 1901년에 개성(開城) 본당이 약현 본당에서 분리되면서 이곳으로 이관되었으며, 1926년경에는 해주 본당에서 연백 지방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38년 5월에 연백 군청 소재지인 연안 읍내에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충남 서천(舒川) 본당에서 사목하던 조인원 신부가 부임하였다. 조인원 신부는부임 직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그 해 가을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이어 이듬해 봄에는 전교 활동의 일환으로 읍내 유지 부인들을 대상으로 20일 간 재봉 강습회(裁縫講習會)를 개최하였는데, 반응이 매우 좋아 5월에는 일본어와 중국어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조인원 신부가 평안남도 안주(安州) 본당으로 전임된 후 연안 본당은 신부를 배정받지 못함에 따라 공소가 되어 해주 본당과 개성 본당에 분리 · 편입되었다가 이듬해 경기도 안성(安城) 본당에서 사목하던 이희연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다시 본당으로 부활하였다. 이어 3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영식 신부는 8 · 15 광복 이후 혼란한 사회 상황으로 고아들이 많이 생겨나자 건축비 부족으로 네 차례나 공사를 중단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80여 평 규모의 성모원(聖母園)을 준공하여, 1948년 10월 7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한 뒤 고아들을 돌보았다. 한편 광복 후에 불당골 공소는 38선으로 막혀 본당신부의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자, 1945년 가을 판공 성사 때부터 사리원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영식 신부는 고아들을 데리고 인천과 서울 천호동 일대를 전전하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주일 동안을 걸어 본당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자 그 해 12월 10일 다시 피난 길에 올라 월남함으로써 연안 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 김영식 ; 중림동 본당 ; 침묵의 교회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편찬실]
연안 본당
延安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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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성모원 어린이들의 유희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