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후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 데에 장애되는 온갖 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의 상태. 예전에는 '단련 교회' (鍛鍊敎會) 또는 '단련지 교회' (鍛鍊之敎會)라고 했으며, 연옥에 있는 영혼(animaepurgatorii)은 '연령' (煉靈)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교리 및 근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깨끗해지지 아니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지기위하여 죽은 후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항). 이 정화 과정은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연옥은 죄스런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게 되는 순간, 즉 인간이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연옥이라는 말이나 그에 관한 교리는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연옥을 직접 언급하는 성서 구절은 어디에도 없지만, 연옥에 관한 교리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명백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기원전 165~160)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 45). 또한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고하였다. 따라서 연옥 교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꾸준히 실행해 온 기도의 관습과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가타리파, 발도파 등 이단자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루터(M. Luther, 1483~1546)는 《연옥론 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 신앙을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피렌체 공의회(1439 ; DS 1304)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DS 1580, 1820)에서는 연옥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표현하였다. '우리보다 먼저 간 이들을 위하여' 중재 기도를 계속 바쳐 온 오랜 전통에 근거하여, 교회는 죄에 대한 적절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을 뽑는 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생존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선행 · 미사 봉헌을 통하여 연옥의 '의인' 들을 도울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1~1032항). 이를 위해 교회에서는 매년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 즉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 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11월 2일을 '위령의 날' 로 정하여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있다.
[신학적인 조명] 연옥의 체험 : 인간은 부단히 정화되어야 한다. 죄스런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깨끗해져야 하지만 정화는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회개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봉이 정화를 가져온다. 현세의 삶 동안, 죽음의 순간에 또한 사후의 생명을 영위할 때에도 인간은 정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세 생활 중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정화는 장차 하느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전달됨으로써 실현될 완성과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이 정화는 '의인' 이 순결한 신부로서 지극히 거룩하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결합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같은 정화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연옥이 존재한다.
심판하는 하느님을 만날 때에 인간은 정화되지만, 이 만남은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하느님과의 해후는 죄인에게 무서운 심판의 형식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 심판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히브 10, 31). 인간은 자신의 죄악과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가운데서 압도하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마치 자신을 태워 삼켜 버리고 정화시키는 불 앞에 서게 되는 것처럼 전율을 느낀다. 연옥의 불 은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정화의 과정 : 연옥은 거룩한 하느님과 상봉하는 비천한 인간의 만남이므로 반(半)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과 해후하는 한 순간이다. 즉 완성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인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다. 연옥은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그래서 정화되는 만남이다.
사후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상태인 연옥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다. 그때에 하느님의 빛 속에서 우리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 존재와 삶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우리는 지은 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각자의 업적은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그것을) 밝혀 줄 것 입니다. 실상 그날은 불로 계시될 것이고 또 각자의 업적이 어떤지는 그 불이 검증해 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가 쌓아 올린 업적이 남게 되면 그는 품삯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업적이 더 없어지면 손해는 보겠지만 그 자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만 불은 거쳐가듯 할 것입니다"(1고린 3, 13-15). 결정적 정화는 하느님이 인간과 더불어 이루어 나가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기 위하여 인간측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연옥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연옥은 지상 생활안에서 시작된다.
인생살이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점진적 성숙과 완성의 과정이 있는 반면 이기심과 범죄로 인한 파멸의 길이 있다. 우리는 인생 안에서 죽을 때처럼 떠남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볼 때처럼 만남의 순간들을 거친다. 성숙과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매 순간은 죽음 안에서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정화시켜 나간다. 그 같은 결단의 순간들은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어렵다. 그 순간들은 성장이 따르는 위기의 순간이다. 성숙의 과정은 모두 고통스럽다. 죽음의 순간에 그 성숙의 과정은 절정에 달한다. 이 과정은 수난과 정화의 차원을 지니지만 해방의 차원도 지닌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고된 수고를 쏟을 때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정화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연옥을 통과하게 된다. 인격적이고 역사적 과정인 연옥은 인간이 자기의 모순과 이기심을 하느님과 최종 만나는 순간에까지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이기심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쓸어낼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결함과 과오를 보다 뚜렷이 의식함으로써 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순간은 결정적 행복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 순간은 하느님의 구원하는 사랑에 의해 마련된다. 사랑은 정화시킨다. 고통은 사랑의 배면(背面)이다. (⇦ 단련 교회 ; 연령 ; → 각고 ; 사말 ; 위령 성월 ; 위령의 날)
※ 참고문헌 G. Greshake, 심상태 역, 《종말 신앙- 죽음보다 강한 희망》 신학 選書 ,성바오로출판사, 1980, pp. 128~131/J.B. Liba-nio · M.C. Bingemer, 김수복 역, 《그리스도교 종말론》, 분도출판사,1989, pp. 279~307. [崔榮喆]
연옥
煉獄
〔라〕urgatorium · 〔영〕purga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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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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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를 위한 미사 봉헌은 연옥 영혼을 하느님 나라로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