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79 소재. 1958년 10월 20일 장연(長淵)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1968년 공소가 되었다가 1998년 2월 10일 본당으로 재승격되었다. 주보는 삼위 일체. 관할구역은 연평도, 소연평도. [교 세] 1958년 1,300여 명 1960년 1,546명, 1965년 3,122명, 1966년 1,835명, 1967년 1,768명, 1998년 625명, 2000년 639명. [역대 신부] 초대 강주희(姜周熙) 판크라시오(1958. 10~1960. 4), 2대 파퀘트(J. Paquet, 朴) 요셉(1960. 4~1962. 6), 3대 즈베버(B. Zweber, 崔) 베네딕도(1962. 6~1966. 2), 4대 릴리(R. Lilly, 李) 로베르토(1966. 2~1968), 5대 김대열(金大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98. 2~2000. 8), 임시 장준(張準) 필립보(2000. 8~2001. 1), 6대 박대룡(朴大龍) 십자가의 요한(2001. 1~2002. 4), 7대 양영진(梁榮珍) 하상 바오로(2002. 4~현재).
[공소 설립 및 발전] 연평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1917년에 해주에서 임야를 관리하기 위해 섬으로 들어온 전응택(全應澤, 바오로)이었다. 당시 연평도는 어촌 특유의 무속 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발적으로 전교 활동을 한 그의 노력으로 이듬해 김익주(시몬), 김대용(라우렌시오),김대순(요한)과 그들의 가족이 연평도 주민으로는 처음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신자들의 자력으로 1919년에 20평 규모의 공소 강당이 마련된 뒤 장연 본당 주임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최초로 이곳에 와 김씨들 가족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1920년에 이곳에 들어온 전응택 공소 회장의 장남 전덕규(全德奎, 요한)는 1922년공소 부설로 4년제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인 '해성 강습소' 를 개설하였는데, 교실은 공소 강당을 사용하였다.이후 13년 동안 연평도 내의 유일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 온 해성 강습소는 1935년 연평도 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면서 문을 닫았다.
1939년에는 두 번이나 증축 · 사용해 오던 초가집 공소 강당 옆에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30평 규모의 목조 함석집 강당을 신축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처음으로 가톨릭 청년회가 조직되어 신자 청년들의 규합과 전교에 힘썼으며, 부녀자들에 대한 전교를 목적으로 안나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연평 공소는 거의 평신도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육지의 본당 신부들의 왕래도 적지 않았다. 연평 공소는 초창기부터 8 · 15 광복을 거쳐 1950년대까지 장연 · 해주 · 옹진 등연평도에서 가까운 내륙의 본당들과 인천 답동 본당 및 부평 본당의 관할 공소였으므로, 이곳의 본당 신부들이 여러 차례 입도하여 성사를 집전해 주었다.
한편 1947년에 연평 공소는 교회림의 관리 · 보호· 육림을 목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으로의 승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인애 삼림계' (仁愛森林契)를 조직했으며, 이듬해 가톨릭 청년회 재조직과 주일학교 재개교 및 공소 회장단을 개선한 데 이어 1949년 11월 12일에는 전교반을 편성하고 1950년 3월 20일에는 행성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중단 없는 발전을 계속하였다. 1947년 4월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명동 본당의 장금구(莊金龜, 요한그리소스토모) 신부와 인천 답동 본당 보좌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 등을 대동하고 처음 연평도를 방문하여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1955년 4월에는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입도하여 청년회 회장 김상일이 건립한 성모상 축복식과 아울러 부활 대축일 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하였고, 1958년 4월에는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인보 성체 수도회 수녀 5명을 데리고 와서 전교에 임하였다.
[본당 설립] 한편 1953년에 공군 파견대의 협조를 얻어 30평짜리 공소 강당을 60평으로 증축하였으나 신자수의 증가로 다시 협소해지자, 1957년 12월 윤을수 신부가 입도하였을 때 윤 신부와 상의하여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1958년 말 연평도 성당은 신자들이 해변에서 운반해 온 돌로 외벽을 쌓고, 성당 내부 벽 역시 산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쌓아 이중 벽을 쌓은 현대식 콘크리트 돌집 성당으로 건축되었다. 연평도 신자들은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기 위해 외부의 원조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전부터 8 · 15 광복 후 40여 정보의 교회 임야에 수십만 주의 소나무를 길러 왔으며, 사순 시기 때면 남성 신자들은 금연 · 금주로, 여성신자들은 절미 운동으로 기금을 조성해 오고 있었다.
1958년 10월 20일 초대 주임으로 강주희 신부가 임명되었고, 12월 25일에는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완공된 새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1960년 4월 강주희 신부가 서울 동성중고등학교로 전임되었고, 이듬해 연평도 본당은 서울교구에서 분리 · 설정된 인천교구에 편입되었으며, 1965년 9월 17일에는 조합원 35명으로 연평 본당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관할 공소였던 덕적도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많은 신자가 이곳으로 이관되면서 이후 연평도 본당은 점차 신자수가 감소하여 1968년에 결국 덕적도 본당 관할 공소가 되고 말았다. 이후 1976년에 주안2동 본당과 도화동 본당 관할로 편입되어 30여 년 동안 공소로 유지되어 오다가, 1998년 2월 10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5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대열 신부는 그 해 9월 5일 소연 평도를 사목 방문하여 공소 회장을 임명하였다. 연평도 본당은 7대 주임 양영진 신부의 사목 아래 교세 확장에 전념하고 있다. (→ 도화동 본당 ; 인천교구 ; 장연 본당)
※ 참고문헌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白秉根]
연평도 본당
延坪島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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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