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 북에이레가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이루어진 섬 국가. 영국 해협과 북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으며, 왼쪽으로는 아일랜드가 있다. 입헌 군주제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왕이 국가 수반이지만 왕권은 명예적인 것이며 실제의 국가 권력은 의회 다수당 의장인 총리와 내각에 의해 행사된다. 정식 국가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공용어는 영어이며, 영국 성공회가 국교는 아니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국가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면적은 44,100k㎡이고, 수도는 런던(London)이다.
I .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착
〔로마 제국 시대〕 기원전 55~54년 로마 제국의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 이후 브리탄니아(Britannia)는 로마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이 섬의 정복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는 섬의 남동부 지역(현 잉글랜드)을 정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로마의 웨일스 정복은 78년에 완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정복은 실패하였다. 섬 전체를 정복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북부에 경계선을 마련하려는 몇 차례 시도가 있은 다음에 솔웨이 만과 타인 강 사이의 지협에 돌로된 성벽을 쌓았다(122~130).
브리탄니아 섬의 로마 문명은 4세기에 번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브리탄니아에 주둔한 로마 군대가 게르만족의 제국령 침범을 막기 위해 철수하면서, 브리탄니아는 로마의 지배와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후에 황제가 된 콘스탄틴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us Chlorus I , 305~306)는 293년에 로마 제국 서부 지역의 제2 부제(副帝, Caesar)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골지방과 브리탄니아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런데, 305년 그가 제2 정제(正帝, August)가 된 후 아들과 함께 브리탄니아에서 스코틀랜드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던 중 요크(York)에서 306년 7월 25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군대의 지휘관들이 콘스탄틴을 정제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 지방과 브리탄니아 속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367년에 스코틀랜드의 픽트족(Picti)과 아일랜드의 스콧족(Scoti)이 협력하여 바다를 통해 침범해 왔을 때, 브리탄니아는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 후로도 계속된 군대의 철수로 방어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407년 브리탄니아에 주둔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콘스탄티우스 3세가 더 많은 군대를 갈리아 지방으로 철수시키자 성에 남은 병력으로는 픽트족과 스콧족의 침입을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통 황제인 호노리우스(395-423)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410년에 자체 방어할 권한을 각 도시에 부여하였을 뿐이다. 이것으로 로마의 브리탄니아 지배는 종식을 고했다.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시기에 교회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5세기 중엽에앵글족과 색슨족이 브리탄니아에 들어와 점령함으로써 교회는 사라지고 서남부 지방에서만 존속하였다. 하지만, 브리탄니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많은 성인을 배출하였으며, 고유한 전례 관습을 갖춘 수도원 체제의 교회였다. 고대 로마 전례에 따른 부활절이 준수되었고, 성직자의 삭발 제도가 있었다. 또한, 314년에 개최된 아를 교회 회의에 요크 · 런던 · 링컨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5~6세기에 서북부 지방의 교회는 골 지방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교황이 이 지역 교회에 대하여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교황청에서 완전히 독립된 교구가 없었던 교회는 아니었다.
〔앵글로-색슨 시대〕 신앙의 전파 : 영국 선교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황은 로마 성베네딕도회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604/605)를 비롯한 40명의 수도자들을 선교사로 영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597년 켄트 왕국의 해안가에 도착하였으며, 켄트의 왕 에텔베르토(Ethel-bertus, 560~616)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곧 개종하였다.아우구스티노는 캔터베리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601년에는 캔터베리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받았다. 초창기에는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604년에 로체스터(Roches-ter) 교구가 설정되었고, 동부 색슨인들이 개종했다. 그들을 위해 성 바오로에게 봉헌된 성당이 런던에 세워졌다. 한편 켄트에는 수도원들이 건축되었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의 피상적인 개종은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 동부 색슨인들은 곧 신앙을 저버리고 주교를 추방했다. 이스트 앵글리아의 레드왈드(Raedwald) 왕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성당과 이교 사당을 똑같이 보존했다는 베다(Beda Venerabilis, 672/673~735)의 기록으로 보아도 그의 신앙은 모호한 것이었다. 노섬브리아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에드윈(Edwin) 왕은 선교사 바울리노(Paulinus)를 받아들이고 627년에 가신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들은 신앙을 버렸고, 바울리노는 몸을 피해야만 했다. 교회는 잉글랜드 왕실 안에서 신속하게 발판을 얻기는 했지만, 정치적 영향권 밖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넓은 기반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레고리오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아니라 원시적이고 고립적이었던 켈트 교회였다. 웨일스와 콘월에 잔존해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그리 큰 의의를 갖지 못했다. 다소 거만하고 근엄한 인물이었던 아우구스티노는 웨일스 주교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그들로부터 협조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스코틀랜드와 노섬브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파트리치오(Patricius, 390~461?)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아일랜드는 6세기 초에 대부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또한, 아일랜드 지역 교회들은 재력과 조직에 있어서 웨일스를 훨씬 능가하였기에 6~7세기에 갈리아, 게르마니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골룸바(Columba)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북픽트인을 개종시켰고(남픽트인은 이미 개종되어 있었다), 563년경 아이오나(Iona) 섬에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오스알도(Oswaldus, +642)가 633년 노섬브리아의 왕이 된 후 아이오나에서 선교사를 찾아 선교를 활성화시켰다. 아일랜드 주교들과 수도자들은 소박한 떠돌이 생활을 하였기에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기가 쉬웠다. 오스왈도 왕의 주교인 아이오나 출신의 아이다노(Aidanus,+651)는 노섬브리아인을 개종시킬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린디스판(Lindisfame) 섬에 수도원을 건축한 후 국왕의 별궁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시골로 설교하러 다녔다. 수도원들이 계속 세워졌고, 노섬브리아 교회는 다른 왕국들로 퍼져 나갈 만큼 강력해졌다. 635년 오스왈도의 영향으로 웨식스의 키너길스(Cynegils)는 후에 서식스의 첫 주교가 된 비리노(Birin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 20년도 못 되어 켈트 전례의 교회가 잉글랜드 중부의 메르치아(Mercia)로 영향력을 점차 확대시켰다. 그로 인해 로마 전례 전통과 켈트 전례 전통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이 충돌에서 교리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주요 쟁점은 부활 대축일을 어느 날에 경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휘트비 교회 회의 (Synod ofWhitby)에서 노섬브리아의 오스위(Oswy) 왕은 로마 교회 쪽을 선호했고, 이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이후 전 잉글랜드 왕국 내의 모든 교회가 로마 전례를 따르며 교황청의 감독 아래 통합되어 발전했다. 앵글로-색슨 교회의 전성기는 오파(Offa, 757~796) 왕 지배하의 머시아에서도 지속되었다. 8세기에 영국의 학문 수준은 상당했으며, 몇몇 영국 교회 성직자들은 유럽에서 학자, 개혁가,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알쿠이노(Alcuimus, 7321 735?~804) 등의 활약은 카롤링거 왕가의 프랑크 부흥에 기여했다. 이러한 발전은 780년 이후 데인족의 침입으로 중단되었다. 비록 그리스도교가 사라진 적은 없었고데인족도 곧 그리스도교화되긴 했지만, 잉글랜드는 황폐화되고 과거의 문화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발전 :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71~899)이 웨식스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의 왕국에는 학교도 수도원도 없었고 회복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졌다. 새로운 번영기는 10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신앙 부흥은 애설스텐(Athelstan,95-99) 왕의 신앙, 에드거(Edgar, 959~975) 왕의 후원, 그리고 세 명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성직자들, 즉성 던스턴(St Dunstan, 909~988), , 성 에설월드(St. Ethelwold, 912?~984), 성 오스왈드(St. Oswald, +992) 등의 수도원 개혁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새로이 설립된 수도원들은 대륙의 관행과 일치되도록 《베네딕도 규칙서》에 근거한 생활 양식을 따랐다. 수도원 개혁에 뒤이어 교육, 문학 및 예술 부문도 부흥하였다. 이러한 부흥은 로마나 대륙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로마에 충성을 바쳤지만 잉글랜드와 로마와의 직접적인연결 고리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받는 팔리움(pallium) , 교황에게 바치던 세금, 그리고 빈번한 로마 순례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세속 행정과 교회 행정이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위턴(Witan) 즉 궁정 대회의의 구성원이었는데, 왕이 주재하는 이 회의는 주요 재판을 판결했으며, 도덕 및 교회 문제에 관한 법률을 입안했다.
II . 신앙의 발전과 변질
〔노르만 시대〕 11세기에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하자 (1066), 영국은 라틴계 유럽 문화에 보다 가까워졌다.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개혁 사상이 강력하게 실천되고 있었다. 영국 교회는 로마의 견해에 따라 개혁되었는데, 성직자에게 독신 생활이 요구되었으며, 서유럽의 교회법이 도입되었다. 유럽 도처에서 수도원이 번성했는데, 그것은 잉글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1066년 잉글랜드에는 약 50개의 수도원과 약 1,000명의 수사 및 수녀들이 있었다. 그러나 1216년에는 약 700개의 수도원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11세기의 모든 수도원은 베네딕도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에는 수백 개의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함께, 시토회, 성전 기사회, 병원 기사회, 카르투지오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가르멜회 등 수많은 새로운 수도회가 도입되었다.
월리엄 2세(1087~1100)는 1093년에 안셀모(Anselmus, 1033~1109)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했다. 1095년에 윌리엄은 자신과 안셀모 사이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로킹엄(Rocking-ham)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안셀모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세속 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에게 제소했다. 안셀모는 결국 1097년에 도버 해협을 건너 망명길에 올랐다.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배척하는 최초의 교황 칙령은 1059년에 발표되었고, 그 후로도 많은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잉글랜드에서는 1100년 안셀모가 망명에서 돌아온 다음에야 그 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안셀모는 망명지에서 교황의 속인 성직 서임에 대한 태도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윌리엄 2세를 계승한 헨리 1세(1100~1135)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절하고 헨리가 서임한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축성도 거절했다. 1107년이 되어서야 이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헨리는 성직 서임권은 포기했지만, 고위 성직자들이 갖고 있는 봉토 때문에 충성 서약은 계속되었다. 국왕과 주교 사이의 긴장은 12세기 전 시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헨리 2세(1154~1189) 즉위 후 대립으로 변했다. 그는 국왕의 교회 지배권 및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권을 재차 주장하였고, 대주교 베켓(Thomas Becket, 1118~1170)은 거듭된 충돌과 장기간의 프랑스 망명을 거친 후 1170년에 귀국했으나 헨리 2세의 기사들에 의해 성당에서 암살당했다.
노르만족의 정복이 초래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변화는 교회의 봉건화였다. 주교들과 수도원 원장들은 봉건적 부과금과 군사적 봉사의 의무를 지는 동시에 국왕 자문 회의의 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이 회의는 헨리 3세(1216~1272) 때 의회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에 막대한 부의 축적을 가져왔고, 고위 성직자들을 세속화시키는 동시에 이중적으로 충성을 바치도록 했다. 나아가 사목을 등한시하도록 함으로써 영적으로 해이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13-14세기〕 존(1199~1216)의 치세는 교회의 고난기였다. 존은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 문제로 교황 인노천시오 3세(1198~1216)와 대립하였다. 교황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성사 금지령을 발표했다. 그로 인해 교회의 모든 예식이 중단되었으며, 이는 6년 동안 지속되었다. 1209년에는 존이 파문을 받았다. 그러나 존이나 세속 사회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정신적 무기였던 파문과 성사 금지령은 세속인들을 저지하기에는 불충분했다. 더욱이 이것이 너무 자주 사용됨으로써 그 힘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교황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그래서 잉글랜드에 성사 금지령을 발표했을 때, 성직자들은 이에 복종했다. 1199년에 처음으로 교황이 교회에 세금을 부과했을 때도 성직자들은 불평을 했지만 이를 납부했다. 이 시기 동안 가톨릭은 잉글랜드에서 도전받지 않는 종교였다. 교회가 6년 동안 폐쇄되었을 때도불평하는 소리는 거의 없었고,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13세기는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황금시대였다. 교회의 자유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의해 보장되었고 경건한 인물인 헨리 3세에 의해 존중되었다. 또한 교회의 규율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의 결정에 따라 통제되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도 탁발 수도회들이 전래되었다. 잉글랜드에 먼저 들어온 탁발 수도회는 도미니코회였다. 그들은 1221년에 도착하여 옥스퍼드로 갔다. 3년 후 작은 형제회가 전파되었으며, 이들의 최초 수도원은 캔터베리, 런던, 옥스퍼드에 세워졌다. 가르멜회는 1240년에 도착했다. 1300년까지 수도회들은 잉글랜드에 약 150개의 수도원을 건립했다.
14세기에는 교회의 국교화 추세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인이 겪은 독특한 경험, 그리고 잉글랜드의 법과 관습도 큰 역할을 했다. 건물을 비롯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세우고 지원하며 후원했던 것은 잉글랜드의 왕과 귀족과 젠트리(Genty) 그리고 도시민이었다. 그들은 각 교회와 그 교회의 사제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가문 때문에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 뜻대로 교회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에서 교회 문제는 교황이 궁극적인 사법권을 지닌다고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법은 왕권에 의해 제한되었다. 특히 그리스도교 세계의 충성을 요구하는 교황이 존재했던 14세기 중반부터는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교황의 권한이 여러 면에서 제한받았다. 에드워드 3세(1327~1377)는 교황에 의한 잉글랜드 내의 성직자 임명을 제한한 '성직 임명 제한법'(1351)과 성직에 대한 분쟁에서 교황청에 상고하는 것을 금지한 '상고 금지법' (1353)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어느 교황도 이 제한에 저항할 만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았다.
잉글랜드 교회 밖에서 종교적 열정을 표출한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신심 운동은 신학적으로 정통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와 그의 추종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롤라드 운동은 중세 잉글랜드를 휩쓸었고 위클리프는 교회에 맞선 대중적 이단 운동을 일으킨 유일한 인물이었다. 위클리프가 영어로 글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일련의 논쟁적인 저작들이 영어로 쓰여지도록 그리고 성서가 영어로 처음 완역되도록 자극을 주었다. 그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성직자에 대한 반감에 호소하여, 교회가 너무나 많은 부를 누리고 있고 너무나 많은 성직자가 타락해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로 인해 귀족과 학자들 사이에서 명성과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고, 그 결과 탄핵을 받아 옥스퍼드에서 쫓겨났으며 롤라드 운동도 사라졌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적대감과 성서에 대한 깊은 신앙, 그리고 영어 번역 성서는 종교 개혁을 예고하는 것으로써, 뒷날 나타난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핵심적인 신조가 되었다.
〔종교 개혁〕 헨리 7세(1485~1509)에 의해 시작된 튜더 왕조(1485~1603)는 강력한 정부, 그리고 평화와 번영기를 가져왔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헨리 8세(1509~1547)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졌다. 치세 초기에 헨리 8세는 교회 문제를 울지(T. Wolsey, 1475~1530) 대주교에게 맡겼다. 그런데,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fAragon)이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메리공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사망하였다. 헨리는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을 적자(嫡子)를 원했지만, 캐서린이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음이 1527년경 명백해졌다. 헨리는 자신의 정부인 앤 불린(Ann Boleyn)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고, 그녀는 결혼에 대한 보장 없이는 응하지 않으려 했다.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헨리 8세의 새로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왕의 행동은 모어(Thomas More, 1477~1535)와 같은 가톨릭 신자들과 스페인 아라곤가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헨리 8세를 돕기 위해 영국 교회를 교황청에서 분리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켰으며, 1534년에는 영국의 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首長)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수도원은 탄압을 받았으나 그 밖의 다른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는 비록 영국 교회를 교황청에서 분리시켰지만, 여전히 가톨릭 교회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1534년 이후 크롬웰(T. Cromwell, 1485~1540)을 통해 성직자들을 통치했다. 크롬웰의 중요한 임무는 수도원 해산이었다. 이를 통해 헨리는 막대한 수입을 얻었으며, 국왕권에 대한 잠재적 저항의 마지막 거점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헨리와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수도원 해산을 통해 얻은 재산을 팔았다. 그래서 튜더 왕조가 끝나는 1603년에는 수도원 소유였던 땅의 3/4이 젠트리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을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 한편, 헨리는 이전의 수도원 건물 자리에 6개의 새로운 교구를 설립했다. 수도원 해산이 가져온 결과 중 예기치 못하였던 것들로는, 훌륭한 고딕 건물들의 완전한 파괴, 중세의 금속 세공품과 보석류들이 녹여 없어진 것, 그리고 도서관의 파괴 및 약탈 등이 있다. 또한, 수장령을 거부한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이 1535년 5월 교수형을 받았고, 7월 6일에는 피셔(J. Fisher, 1469~1535) 주교와 모어가 처형되었다. 결국 성직자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성직 희망자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즉위 시 9세의 어린아이였고 프로테스탄트였다. 이 시기에 대주교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던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1547년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설교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악평 섞인 불만에 대처하기 위해 《설교집》(Book of Homilies)을 펴냈다. 1549년에는 온건한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띤 최초의 기도서를 펴냈고, 1552년 더욱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밝힌 두 번째 기도서를 펴냈다. 크랜머는 당대의 종교 논쟁에 대한 영국 교회의 교리 입장을 규정 짓는 교리서인 <42개 항 신앙 조항>(Fory-Two Articles of Religion, 1553)을 공포했다. 모든 성직자 · 교수 · 학위 취득 신청자들은 의무적으로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 문서는 훗날 39개 조항으로 줄었고, 영국 교회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이 무렵 크랜머는 영국 교회의 교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1571년 <교회법 개정》(Refor-matio Legum Ecclesiasticarum)으로 출판되었다. 당시까지도 국가 행정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크랜머는 학문 · 권위 · 성실함으로 국가의 혁명을 주관하고 이끌었다. 그리고 영국 교회의 교리 · 예식 · 법을 정착시켰다.
에드워드의 짧은 치세가 끝난 후 메리 1세 여왕(1553~1558)의 시대가 왔다. 메리는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가운데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다. 고문들 대부분이 왕가의 혈통을 지닌 그녀의 사촌 데번 백작 코트니를 결혼 상대로 천거했다. 그러나 메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1519~1556)의 아들이자 자기보다 11년이나 연하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1556~1598)와 결혼하려 했다. 헨리 8세가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함에 따라 재산과 토지를 얻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으려는 메리의 열망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의회도 스페인 왕과의 결혼 포기를 청원하는 의원들에게 메리가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 라며 무례하게 대한 일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다.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이 확실해지자 1554년 토머스 와이엇 경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와이엇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빠르게 진격해 오자 이에 놀란 메리는 연설을 통해 수천 명의 군중을 선동해 반란군에 맞섰다. 패한 와이엇은 처형당했고, 메리는 펠리페와 결혼해 가톨릭을 복귀시키고 이단 처벌법을 부활했다. 그 뒤 3년 동안 반란자들의 머리가 교수대에 걸렸고, 이단자들은 쉴 새 없이 처형당했다. 그 가운데 300여 명은 화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메리는 '피의 메리' 라고 불리며 미움을 받았으며, 그녀의 스페인 출신 남편은 불신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1558년 11월 17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와 함께 그녀가 추구했던 모든 것도 함께 묻혔다.
메리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잉글랜드를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돌려놓았다. 1559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수장령(首長令)은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령을 되살렸다. 이 법령에서는 여왕을 "왕국과 여왕 폐하의 자치령 및 국가들에서 세속적인 일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영역에서도 최고의 통치자" 라고 부르면서 '수장' 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동시에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 또는 제한하는 형벌법이 만들어졌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런 구조적 개혁과 교회 예배에 대한 개혁을 신중하고도 꾸준하게 추진했다. 많은 귀족과 젠트리들은 대다수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지켰지만, 정부와 교회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프로테스탄트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런 조치조차 지나치게 소심하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교회의 성직 체계와 교회 재판소를 철저히 개혁하고, 기도서와 교회 예식에 남아 있는 가톨릭적 요소를 말끔히 씻어 내며 국교회 기피자를 적극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런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졌고, 더 이상 소동을 일으키면 사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귀족을 자극하며 결국에는 기존 권력에 대한 충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엘리자베스는 백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념을 묻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타협은 프로테스탄트의 불만 때문만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의 저항과 반대로 인해서도 위협을 받았다. 이 반대는 처음에는 비교적 수동적으로 보였지만, 1560년대 말과 1570년대 초에 일어난 일련의 위기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1569년에 완강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봉건 귀족과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은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571년에 여왕의 첩자들은 "리돌피 음모" 라는 국제적인 여왕 암살 음모를 적발했다. 이 두 가지 위협은 모두 1568년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 여왕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간주한 메리는 손님보다는 볼모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중대한 정치적 · 외교적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문제는 메리의 끊임없는 야망과 모사적 성향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내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메리를 처형하라는 의회와 조언자들의 충고도 완강히 거부했다.
종교적 긴장과 정치적 음모 및 폭력의 증가는 잉글랜드 내부의 관심사만이 아니었다. 1570년에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백성들은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1572년 8월 23일 프랑스에서 위그노파 신자들이 참살당하는 일명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이 발생하자,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의혹은 더욱 강해졌다. 유럽대륙에서 교육받고 잉글랜드로 다시 잠입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대담하고 은밀한 선교 활동은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고, 국교회 기피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력해졌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반란군을 지원하라는 압력이 거셌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입을 망설였다. 설령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으로 일어난 반란일지라도 반란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게다가 여왕은 돈 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오래 망설이다가 약간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1585년에는 소규모 원정군을 네덜란드에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가 1580년에 포고령을 발표하여 이단자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엘리자베스 암살 기도가 더욱 우려되었다. 1584년에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오랑주 공빌렘 1세(1533~1584)가 암살당했다. 엘리자베스는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지배 계층은 강한 불안을 느꼈다. 잇따르는 음모, 예수회에 대한 박해, 외국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추밀원은 엘리자베스가 암살당할 경우 암살자들만이 아니라 그 암살로 이익을 얻는 왕위 요구자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분명 메리를 겨냥한 맹세였다. 월싱엄(F. Walsingham, 1532~1590) 경이 이끄는 정부 첩자들은 이때 메리가 여왕 암살 음모에 깊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월싱엄의 부하들이 1586년에 또 다른 엘리자베스 암살 음모인 배빙턴 음모를 적발했을 때, 메리여왕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메리의 밀서가 당국에 넘어가 메리가 배빙턴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의회는 즉시 처형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는 3개월 동안 망설이다가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1587년 2월 8일, 메리가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여왕은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메리를 처형할 의도가 조금도 없었으며 사형 집행 영장을 전달한 사람을 투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가톨릭 신자들은 여왕을 맹렬히 비난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의 죽음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스튜어트 왕조 시대〕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은 것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1603~1625)였는데, 이 시기부터 스코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인 제임스는 즉위시 관용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1605년의 화약 음모 사건은 오랜 기간 동안 가톨릭에 악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했고, 정치적 충성을 요구하는 교황의 주장을 피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찰스 1세(1625~1649)의 치세 초기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찰스는 1625년 3월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와 결혼했다. 마리아는 결혼을 하면서 사제들을 많이 데려왔다. 그 결과 궁정을 중심으로 개종자들이 늘어났다. 또한, 1634~1641년까지 로마에서 왕비에게 파견한 교황 사절이 런던에 상주했고, 찰스는 로마와 적극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잉글랜드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재통합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나, 1642년 내란이 발생하면서 무산되었다. 내전에서 가톨릭 귀족과 젠트리들은 대부분 왕당파에 속했다. 1649년 1월 국왕이 패배하여 처형된 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을 거쳐 크롬웰(Oliver Cromwel, 1599~1658)이 호국경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국왕을 지지했던 가톨릭 신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형벌법이 부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사제 두 명만이 처형당했을 뿐이다. 크롬웰은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잔인하게 박해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상당히 실질적인 관용을 베풀었다.
찰스 2세(1660~1685)와 더불어 왕정 복고가 되자 새로운 희망이 움텄다. 그의 아내가 가톨릭 신자였고, 내전 기간인 1651년 그가 주도한 우스터 전투에서 패한 후 프랑스로 탈출시켜 준 것도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로 인해 찰스는 그들을 지원할 마음이 있었다. 1670년 5월에 체결된 이른바 도버 비밀 조약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고, 찰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 일로 영국민들 사이에서 말생이 생길 경우, 프랑스의 군사력과 재정 지원으로 해결한다는 보증을 받았다. 찰스 2세의 통치 행위 중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조항은 루이 14세(1643~1715)의 신임을 얻기 위해 취한 근시안적인 시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찰스의 정책 전반에 대해 신뢰심을 상실한 국민들이었다. 그 밖의 여러 정황은 영국민들이 가지는 국왕에 대한 불만의 골을 깊게 했다. 1670년대에 왕비가 유산하자 적자 계승자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었고, 1673년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가 모데나(Modena)의 메리(Mary)와 2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가톨릭 신자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더 짙어졌다. 제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1678년에 일어난 가톨릭 음모 사건은 낯선 사람의 진술 내용을 골자로 면밀하게 짜여진 거짓이야기였다. 예수회 신학교에서 쫓겨나 영국 교회의 신부로 활동했던 오츠(T. Oates, 1649~1705)의 진술, 즉 가톨릭 신자들이 제임스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찰스 살해 계획을 세웠다는 진술이 여러 증거 문서들로 확인되었다.찰스는 당연히 이 증거들을 믿지 않았으나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평신도와 사제 여러 명이 처형을 당했다.
제임스 2세(1685~1688)는 재위 초기부터 박해받는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퀘이커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에게 상당한 관용을 보장해 주려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신중하지 못했다. 그는 옥스퍼드의 매그덜린 대학에 가톨릭 학장을 강제로 임명하려 했다. 평의원들이 반대하자 그중에서 25명을 파면하고 학장의 임명을 강행했다. 국왕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는 동안에는 국민들이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88년에 왕비가 왕자를 낳자 가톨릭 신자인 국왕이 이어지리라는 염려가 널리 퍼졌다. 네덜란드 오라네 공 빌렘에게 출가한 제임스의 딸로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메리 부부가 1688년의 '명예혁명' 으로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1688년의 명예 혁명은 종교 개혁 이후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땅을 살 수도, 공무원 · 장교 · 의회 의원이 될 수도 없었다. 또한 재산 상속을 금지당했으며, 가톨릭 예식을 거행할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또한,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통합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보호받게 되고, 스코틀랜드 의원이 영국 의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18세기 초에 대략 전체 6~7백만 인구 중 5%(30~35만 명)였던 신자들이 1780년에는 69,316명으로 줄었고, 사제는 약 300명에 불과했다. 핍박받던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위안이 된 것은 아메리카 독립 전쟁으로 정부가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을 군대에 동원하고 그 대가로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푼 것이었다. 챌로너(Richard Challoner, 1691~1781)는 1758년 런던 대목구장(代牧區長)이 되어 가톨릭 신자 수를 늘렸으며, 늙고 허약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자선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에 널리 퍼진 박해에 맞서 가톨릭 교회를 강화했다.
Ⅲ . 가톨릭 신앙의 재건과 부흥
〔가톨리시즘의 부흥〕 18세기 말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위상에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1778년 제정된 제1차 구제법(ReliefAct)으로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토지 등의 부동산을 매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련의 조치가 있었다(1774 · 1778 · 1782) . 1791년 영국 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이 시민으로서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가톨릭 예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1793년 아일랜드 의회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선거권과 공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더욱 폭넓은 구제법을 통과시켰다.
1801년 영국과 아일랜드를 통합하는 합동법(Act of Union)이 통과된 뒤에는 열렬한 반(反)가톨릭주의자였던 조지 3세(1760~1820)와, 가톨릭 신자들이 국가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신자 및 토리당의 저항에 부딪혀 그 이상의 해방 조치는 없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변호사이자 웅변가인 오코늘(D. O'Connel, 1775~1847)은 그 후 20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아일랜드의 신자 농민들과 중간 계급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1823년, 아일랜드에서 수천 명을 모아 '가톨릭 신자 협회' 를 구성했다. 1828년 영국 정부는 가톨릭 신자들의 고충을 덜어 주려고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맹렬하게 전개되는 이 운동을 회유할 법을 만들지 않으면 전국적인 규모의 아일랜드 봉기에 부딪힐 위험에 처했다. 오코늘 자신도 1828년 클레어 주(州) 보궐 선거에 출마해서 자신이 의원에 당선되면, 의원들이 해야 하는 반가톨릭 맹세인 '심사율' 이 철폐되지 않는 한 의회에 출석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하였다. 오코늘이 당선되자 영국 총리인 웰링턴 공작(A. Wellesley, duke of Welling-ton, 1769~1852)과 필(R. Peel, 1788~1850) 경은 의회에서 1829년 '가톨릭 신자 해방령' (Act of Emancipation)을 제정토록 하였다. 이 법은 아일랜드와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의원에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모든 공직에 선출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공직은 아주 적었다. 1871년 대학 심사령' (Universities Test Act)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국 전체의 가톨릭 신자 해방은 사실상 완성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옥스퍼드 운동' (Oxford Move-ment)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1828~1832년 국가와 영국 성공회의 관계 변화가 원인이 되어일어났다. 기관과 정부 관리들에게 영국 교회 성찬식을 강요했던 법률이 폐지되고, 가톨릭 신자들이 받았던 제한들을 거의 없앤 새 법률이 통과되었다. 처음에는 영국교회가 해체되고 재산들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영국 교회가 국가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도교 진리를 가르치는 데서 권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직무를 사도들로부터 계승했다는 데서 권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은 곧 신학 · 사목 · 예배 문제와 얽히게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의 지도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오리얼(Oriel 대학의 진보적 고교회파 교수들인 키블(J. Keble, 1792~1866)과 프루드(R.H. Froude, 1803~ 1836) 그리고 자유주의에서 고교회파로 전환한 뉴먼(J.H. Newman, 1801~1890)과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퓨지(E.B.Pusey, 1800~1882)였다.
옥스퍼드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뉴먼은 이 운동의 사상을 명쾌하게 제공한 유능한 조직가요, 지성적인 지도자였다. 이 운동은 영국 교회의 고교회파 운동으로 영국 교회의 종교 전통에서 가톨릭 요소들을 강조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1833년 옥스퍼드에서 시작되었다. 뉴먼은 《시대를 위한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의 편집을 맡고 여기에 24편의 논문들을 기고했다. 하지만, 이 논문들보다 그가 쓴 책들, 특히 권위에 대한 옥스퍼드 운동의 교리를 설명한 《교회의 예언적 직무에 대한 강의》(Lectures on the Prophetical Office of the Church, 1837), 종교적 신앙 이론에 대한 <대학 설교집》(1843),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이한 본당 설교》(Parochial and Plain Sermons, 1834~1842)가 이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마지막 책은 출판되어 전국에 보급되면서 운동의 원칙을 가장 잘 대변했다. 뉴먼은 1843년 9월 25일 옥스퍼드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의 주임 신부를 사임했으며, 영국 교회 성직자로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지성적이며 정직했던 그는 초기 교회와 현대 가톨릭 교회 사이의 역사적인 차이점을 장애물로 생각하고, 개종하기 전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당시 생물학적 진화론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발전 사상을 깊이 사색한 그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그리스도교 사회에 적용했다. 그리고, 분열되지 않은 초기 교회가 현재 가톨릭 교회로 올바르게 발전했다는 점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교리나 예배에서 이 발전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을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색 끝에 거리낌을 극복하고 1845년 10월 9일 리틀모어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교계의 재건〕 1850년 잉글랜드의 교계 제도가 복구되었다. 이후 가톨릭 성당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설립되었으며, 성장과 발전이 이어졌다. 영국 교회의 대주교인 매닝(H.E. Manning, 1808~1892) 등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신통치 않았다. 매닝은 웨스트민스터 대주교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가톨릭계 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을 의욕적으로 설립했다. 당시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잉글랜드의 주교들에게 신자 교육에 관한 회칙 <스팩타타 피데스>(Spectata fides, 1885. 11. 27)를 발표해 매닝의 노력을 뒷받침해 주었다. 한편, 교황 지상주의자인 그는 뉴먼이 로마 교회의 권위를 극소화시킨다고 비난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논쟁에서는 최종 채택된 교리보다 덜 신중한 교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대주교로 본(H.A. Vaughan, 1832~1903)이매닝의 뒤를 이었다. 그는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 가톨릭 신자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893년에 추기경이 되었고 1895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주교좌 성당의 건축을 시작했다. 본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 대주교가 된 것은 본(F. Boume, 1861~1935)이었다. 그는 1908년 성체 행렬 문제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는 성체 대회 동안 여러 거리에서 갖기로 계획한 성체 행렬을 당국이 사회 혼란을 이유로 금지하자, 주교좌 성당의 개량(開廊)에서 그 행사를 가짐으로써 금지령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1911년 추기경이 된 뒤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팔레스티나에 사는 아랍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고, 가톨릭 교회의 교육권을 지지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벌어지던 폭력 사태를 단죄했고, 총파업을 비판하였다. 또한 메르시에(D.J. Mercier, 1851~1926) 추기경, 핼리팩스(C.L.W. Halifax, 1839~1934) 경과 학자들이 교회 간 대화를 위하여 몇 차례 가진 '메헬렌 대화' (Mechelen Conversations, 1921~1925)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대학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가톨릭이 별도로 학교를 세우기보다는 국립 대학교에 다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가톨릭 정당을 세우기 보다는 기존 정당들에 가입하는 것을 선호했다.
아울러 아일랜드 지방에서 독립 시도가 시작되었다. 1916년 더블린에서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9년부터 다시시작된 전쟁의 여파는 커져만 갔다. 결국,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많은 북부 아일랜드의 주들은 1921년에 영국 치하의 자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남부 지역은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여 그 해 말 영국의 승인을 받아냈다.
새로운 웨스트민스터의 대주교는 힌즐리(Arthur Hin-sley, 1865~1943)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시즘 세력을 맹렬히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0년 10월 "성령의 검(劍)회"를 세웠는데, 이 단체는 종교 및 정치 단체로서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영국 교회와 자유 교회 신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단체를 통해 전체주의에 맞서 영국 성직자들의 힘을 모으려고 하였다. 1943년 힌즐리가 사망하자 모든 영국인들이 애통해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내각의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현대 교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톨릭 신자 수가 서서히 증가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폴란드 등지의 난민이 대거 유입되고, 아일랜드로부터 대대적인 이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학교도 크게 늘어났다. 교육 개혁과 대학의 팽창으로 가톨릭 대학 졸업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교육받은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원했다. 인구의 소수만이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영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출석 신자 수에 있어서 가장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1970년에 교황 바오로 6세 (1963~1978)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순교자 40명을 시성하였다. 또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1978~ )는 1982년 5월 28일~6월 2일까지 사목적 목적으로 영국 교회를 방문하였으며, 1987년에는 1584~ 1689년 동안 순교한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의 순교자 85명을 시복하였다. 1994년 영국 교회에서 여성을 사제로 서품하자 이에 반발한 200명의 신부와 4명의 주교가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2001년 현재 잉글랜드에는 대주교좌 4, 주교좌 15, 동방 대목구 1, 군종 교구 1, 본당 2,521개에 추기경 1, 대주교3, 주교 38, 신부 5,002(교구 소속 3,612, 수도회 소속1,386), 종신 부제 454, 수사 2,122, 수녀 7,411명이 있다. 인구 46,194,830명 중에 8.6%인 4,018,931명이 가톨릭 신자이다.
Ⅳ. 지역 교회의 역사와 현황
〔스코틀랜드〕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성 니니아노 (Ninianus, 360?~432?)가 397년 이 지역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캔디다 캐사(Cancida Casa)와 갤러웨이(Galloway)에 교구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 후 563년에 아일랜드 출신으로 아이오나(Iona)에 정착한 성 골룸바(Columba, 521~597)가 수도승 여러 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6세기 말경에는 먼 지역까지 복음이 전파 되었다. 그런데, 골룸바는 이 지역의 교회를 부족적 · 수도원적 특성을 지닌 켈트 전례를 따르도록 만들었다. 이 부분이 로마 전례와는 차이가 있었기에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교황청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도착하였을 때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는 휘트비 교회 회의(664)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8세기 말과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침입해 옴으로써 교회의 분열과 박해가 이루어졌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왕 맬컴 3세와 결혼한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1046~1093)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고립에서 벗어나 유럽 대륙의 교회에 일치시키는 교회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개혁은 후임 왕들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결과 베네딕도회 · 시토회 등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어 스코틀랜드의 영성적 · 문화적 · 경제적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탁발 수도회들은 스코틀랜드 고유의 지적인 영성을 형성하는 데큰 공헌을 하였다. 1192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 (1191~1198)는 애버딘(Aberdeen) 아가일(ArgyⅡ)을 비롯한 8개 교구를 교황청 직속 주교좌로 설립하였다. 이로써 스코틀랜드 교회는 잉글랜드 주교좌에서 벗어났다. 이 교구 중 세인트앤드루스(Sant Andrews)는 1472년에,글래스고(Glasgow)는 1492년에 대교구가 되었다.
중세 말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양한 이유로 혼란을 겪었다. 백년 전쟁(1337~1452)과 잉글랜드에 대항한 전쟁 동안 프랑스가 스코틀랜드 편을 든 이후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고, 수도원들은 유럽 대륙의 모원과 단절되었다. 게다가 흑사병으로 많은 성직자들이 사망하였고, 서구 대이교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애버딘의 주교 엘핀스톤(W. Elphinstone, 1431~1514)이 전개한 전례와 성직자 개혁이 교회를 재정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미 상당 부분이 세속화된 후였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 전역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1560년 6월 스코틀랜드 의회의 법령으로 교황의 권위는 폐기되었다. 또한, 1567년 프로테스탄트가 인정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계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로 인해 가톨릭 신자들 대부분은 신앙을 포기해야 했다. 1587년의 법령에 의해 교구 및 수도원 소유의 토지와 재산이 모두 왕실에 귀속되었다. 1560년의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은 소수 종교가 되었으며, 이후 200년 동안 가톨릭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1690년에 장로교가 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았다. 하지만 가톨릭 성직자들은 1653년부터 스코틀랜드 지역 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지목구장의 지도 아래 지하에서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법적인 제약이 1793년에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한편 1798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이 좌절되자 많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글래스고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급격한 사회적 · 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신자 수가 급증하였다. 그 결과 1878년에 교계 제도가 재건되었으며, 세인트앤드루스와 에든버러(Edinburgh)는 대교구가 되었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스코틀랜드의 주교들에게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카리타티스스투디움>(Caritatis studium, 1898. 7. 25)을 발표하여 이 지역 교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20세기에 경험한 두 차례의 전쟁,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많은 가톨릭 난민과 전쟁 포로들의 스코틀랜드 유입, 대중매체의 영향력, 외국 여행 기회의 확대,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아진 교육 수준으로 대중의 종교적 편협성도 크게 완화되었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 이후 가톨릭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비롯한 각종 종교 단체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으로 변했다. 사회적 활동 면에서도 협력 관계는 적극적이고 매우 긴밀하게 되었다. 1997년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교 전래 전래 1,600년을 맞아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는 이 지역 가톨릭 신자들의 복음화와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을 촉구하였다.
2001년 현재 스코틀랜드에는 전체 3,757,600명의 인구 중 18%인 698,438명의 신자들이 있다. 대교구 2,교구 6, 본당 456개에 대주교 1, 주교 7, 신부 806(교구소속 649, 수도회 소속 157), 종신 부제 22, 수사 261, 수녀 690명이 있다.
[웨일스] 로마 제국의 속주로 있던 서기 2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이 지역에 전파되었다. 410년 로마 군대가 브리탄니아를 떠난 후 픽트족과 스콧족이 침략해 왔을 때잉글랜드의 브리튼족을 돕기 위해 서부 게르만 민족인 앵글족과 색슨족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곧 잉글랜드의 정복자가 되었으며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웨일스와 콘월(Comwal)은 브리튼족이 정치적으로 독립권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다른 지역의 교회는 사라진 반면, 이 지역은 켈트 전례를 따르는 교회로 존속하였다. 또한, 웨일스 지방의 수호 성인인 니네비아(Ninevia)의 다윗(David, +601), 웨일스의 주교인 삼손(Samson, +565) 등 많은 성인들을 배출하면서 6세기 말에는 지역 복음화를 완성하는 "성인의 시대" (The AgeofSaints)를 이루었다.
597년 잉글랜드에 도착한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는 웨일스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켈트 전례를 따르는 웨일스의 주교들에게 로마 전례를 따르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복자인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브리튼족의 증오심과 그의 요구가 웨일스 교회를 캔터베리 대교구의 관할권 내에 두려는 시도로 이해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8세기 중엽에는 웨일스도 아일랜드 교회의 켈트 전통을 포기하였다. 12세기 중반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웨일스교회는 캔터베리의 영향을 받는 교계 제도로 바뀌었다.이에 대한 주교들과 귀족들의 반발이 매우 강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교황들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웨일스 지역의 교회를 지지하였다. 웨일스에 제일 먼저 진출한 수도회는 시토회였다. 작은 형제회를 비롯한 도미니코회, 가르멜회 등의 탁발
수도회들은 13세기에 진출하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성당들이 건축되었으나, 웨일스의 교구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잉글랜드인이 임명되었다. 또한, 1378년부터 약 40년 동안 지속된 서구 대이교는 웨일스의 신자들이 지녔던 교회와 교황에 대한 기대와 충성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1536년 헨리 8세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와 통합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가 발표한 법령들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토록 만들었으며, 이어진 추방과 제도적인 형법들은 가톨릭 교회를 무능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웨일스 지역에 있던 47개 수도원을 해산하고, 소유지를 몰수하였다. 이후 150년 동안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으며, 그로 인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하지만 1557~1680년 사이에 91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당시 외국에 망명 중이던 가톨릭 신자들이 다양한 책들을 웨일스에 유포함으로써 반종교 개혁에 공헌하였다. 신자들이 격감함에 따라 웨일스 교회는 1688년부터 잉글랜드 배스(Bath) 교구 관할의 대목구가 되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전파로 감리교와 칼뱅주의자들은 1750년까지 웨일스에서 특권을 누렸다. 19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신자들에 의해 가톨릭 신자들의 수가 늘어났는데, 이 당시 웨일스의 가톨릭 신자 수는 약 1,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신부들은 영국 교회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와 대립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사목 활동을 하였다. 1829년 가톨릭에 대한 신앙 자유가 인정을 받았고, 1850년에는 교계 제도가 다시 복구되었으며 새로운 교구들이 세워졌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함께 주교 회의를 구성하고 있다. 2001년 현재 웨일스의 총 인구 2,900,379명 중 0.5%인 146,637명의 신자가 있다. 대교구 1, 교구 2, 본당 185개에 대주교 1, 주교 3, 신부 255(교구 소속 153, 수도회 소속 102), 종신 부제 13, 수사 127, 수녀 455명이 있다.
〔북에이레〕 이 지역은 영국을 구성하는 지방 중 하나이지만, 주교 회의와 교구의 관할권은 아일랜드에 속해있다. 또한, 가톨릭 신자는 이 지역 전체 인구수의 47%정도이다. 18~19세기경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가 교황청과 친밀한 유대를 맺고 발전하는 동안, 북동부 지역에는 영국 교회와 장로교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장로교는 오랫동안 영국 교회에 반대하였는데, 19세기에 가톨릭 신자가 증가하자 영국 교회와 연합하여 가톨릭에 대항하였다. 1921년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남부 아일랜드는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많은 북동부 지역은 영국의 관할이 되었다. 1948년 12월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여 공화국이 된 후,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 투쟁 조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은 북에이레를 아일랜드 공화국과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활동에 대해 북에이레의 가톨릭 신자들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가 선거 · 주택 · 고용 등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하자, 영국 정부에 항의하는 본격적인 민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IRA의 무장 투쟁이 빈번히 발생하자, 북에이레의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얼스터(Ulster) 의용군을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이후 양측의 잦은 충돌은 북에이레 내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960년 말부터 시작된 폭력과 테러로 1990년대 말까지 약 3,000명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1997년 IRA가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상황은 변했고, 이듬해 4월에는 영국 · 아일랜드 · 북에이레 정당들이 참석한 다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북에이레 평화 협정"이 타결되었는데, 이 협정에는 1972년이후 영국 정부가 갖고있던 입법 · 행정권을 북에이레 자치 정부에 반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의 주교들과 유권자들은 이 협정을 지지하였으나 IRA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면서 평화 협정은 무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프로테스탄트 정당인 얼스터 연합당(UUP)이 평화 협정 이행 합의안을 수용함으로써, 내각이 구성되었고 기본 자치권을 영국으로부터 이양받았다. 하지만 경찰 · 사법 등 일부 분야는 여전히 영국 정부가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2002년 2월 영국 하원에서 북에이레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를 부활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평화 협정의 이행이 어두워 보였으나, 2001년 10월 캐나다가 주도하는 국제 무장 해제 위원회측과 합의한 IRA가 무장 해제를 시작함으로써 돌파구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 스코틀랜드 ; → 뉴먼, 존 헨리 ; 마르가리타, 스코틀랜드의 ; 만닝, 헨리 에드워드 ; 메르시에, 데지레 조제프 ; 베다 존자 ; 베켓, 토마스 ; 수장령 ; 아우구스티노, 캔터베리의 ; 안셀모, 캔터베리의 ; 에두아르도 ; 에드문도 ; 에텔베르토 ; 영국 성공회 ; 오코늘 ; 옥스퍼드 운동 ; 위클리프 ; 헨리 8세)
※ 참고문헌 R.D. Edwards, Ireland, 7, pp. 630~631/ L. Macfarlane, Scotland, 《NCE》 12, pp. 1229~1235/ C.M. Daniel, Wales,《NCE》 14, pp. 772~7751 2002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313, 319~320, 332, 338~339/ Ammuario Pontificio 2002, Città del Vaticano, 2002/ Clayton Roberts · David Roberts, A History of England, 2nd ed., 2 vols. New Jersey, Prentice-Hall, 1985/ 케네스0. 모건 엮음, 영국 사학회 역, 《옥스퍼드 영국사》, 한울, 1997.〔朴相益〕
영국
英國
〔영〕United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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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경 린디스판에서 발간된 복음서의 첫 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