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본당

英陽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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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소속 본당. 경북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 190- 1 소재. 1963년 10월 8일 안동교구 영덕 본당 소속의 영양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사도 성토마스. 관할 구역은 영양군 영양읍, 석보면, 수비면, 입암면, 일원면, 청기면 전 지역. 관할 공소는 입암, 석보, 청기 등 3개소. 〔교 세〕 1964년 172명, 1969년 267명,1974년 346명, 1979년 480명, 1984년 704명, 1989년 742명, 1994년 579명, 1999년 546명. 〔역대 신부〕 초대 노엘(R. Noël, 노광명) 로제리오(1963. 10~1974. 12), 2대 하로스테기(L. Harosteguy, 하대규) 레오(1974. 12~1978. 4), 3대 정희욱(鄭喜郁) 안드레아(1978. 4~1983. 1), 4대 김상진(金常珍) 아우구스티노(1983. 1~1986. 1 ) , 5대 오성백(吳盛柏) 요아킴(1986. 1~1988. 2), 6대 김학록(金學錄) 안셀모(1988. 2~1990. 7), 7대 김도겸(金道謙) 아론(1990. 7~1994. 1) , 8대 임준기(林俊基) 다미아노(1994. 1~1995. 2), 9대 신대원(申大源) 요셉(1995. 2~1997.6), 10대 김한모(金漢模) 바오로(1997. 6~2001. 2), 11대 최승근(崔崇根) 비오(2001. 2~현재).
〔설립과 발전] 영양 땅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경북 서북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일월산을 중심으로 우련밭과 곧은정, 마당목, 수비면의 갈전 마을, 석보면의 머루산 등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교우촌은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거의 다 파괴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천주교가 다시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8년 10월 이 이냐시오가 영양읍에서 전교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남조웅에게 입교를 권유한 뒤남조웅의 처남인 양조봉의 집 아랫방에서 선교 및 집회 활동을 시작하여 김형팔 · 남장희 · 류상기 등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부인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에게도 전교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점차 예비 신자들이 늘어나자 그는 교리서 등을 지원해 달라고 목성동(木城洞) 성당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뜻밖의 소식을 접한 목성동 본당의 르베리에(R. Leverrier, 로제리오, 여동찬) 신부는 영양을 방문하여 100여 명의 예비 신자 모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권일정을 정식 전교사로 파견하였다. 르베리에 신부는 1959년 8월 15일 다시 영양을 방문하여 김 데레사 · 양 안나 · 김화태 등 부인 5명에게 세례를 주고 영양 공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9월 26일 류상기 등 4명의 세례자가 영양 공소에서 다시 탄생하였다. 집회 장소도 영양읍 동부리 480번지에 있던 한 목재 회사 창고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게 되었으며, 목성동 본당의 신부가 한 달에 한 번씩 그곳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고 교리를 지도하였다. 1960년 6월에는 영양읍 동부리 190-1번지의 대지 778평을 매입하여 공소 강당 건립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6월에 강당(70평)과 사제관(20평)을 준공하였다. 영양 공소는 1962년 12월 12일부터 관할 본당이 목성동 본당에서 영덕(盈德) 본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3년 10월 8일 영양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노엘 신부가 임명되었다.
노엘 신부는 1964년 10월에 입암 공소와 석보 공소를 건립하였고, 1965년 5월에 본당 강당(21.5평)을 신축하였으며, 1966년 7월에 청기 공소를 건립하였다. 영양본당은 1978년 4월 1일, 3대 주임으로 정희욱 신부가 부임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희욱 신부가 냉담자 회두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인 1979년 5월에 '오원춘 사건' 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영양 본당 청기 공소 출신인 오원춘(吳元春, 알풍소)이 감자 농사 피해 보상 운동을 주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영양군에서는 1978년 농가 소득 증대를 위해 잎 담배를 수확한 뒤 가을 감자 '시마바라' 를 재배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군내 5개 면이 '시마바라' 를 구입하여 파종하였으나 싹도 트지 않아 재배 농가의 80% 이상이 폐농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아무런 피해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동해 지역 이사로 활동하고 있던 오원춘이 나서서 피해 보상 운동을 주도하여 끝내 그것을 관철시켰으며, 이 성공 사례가 농민회 소식지 <파종> 1979년 4월호에 게재되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오원춘을 5월 5일 납치 · 폭행하였다. 오원춘은 이 사실을 6월 13일 정희욱 신부에게 보고하였고, 정희욱 신부가 6월 16일 다시 두봉(R. Dupont, 레나도, 杜峰) 주교에게 이를 보고함으로써 그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상진 신부는 1984년 10월 강당을 개축하여 8평 규모의 회의실을 마련하였고,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오성백 신부는 고추 판매 사업 등으로 마련한 기금으로 1987년 5월, 2층 건물의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6대 주임 김학록 신부는 교사들의 전교조 활동을 적극 지원할 뿐만 아니라 농민회 활동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이러한 김학록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영양 본당은 1988년 고추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 때에도 농민들과 함께하였다. 1988년 고추 값의 폭락으로 농민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되자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같은 해 9월 4일 영양읍 내 장터에서 고추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시위에 참가한 영양 농민들 2백여 명은 영양 본당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면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영양에서 시작된 고추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는 마침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김학록 신부는 1989년 9월 수녀원을 건립하여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분원을 두었다.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도겸 신부는 1991년 7월 조립식으로 된 나눔의 집을 건축하였고, 1993년 6월에는 입암 공소 교육관(25평)을 준공하였다.
영양 본당에서는 그 동안 10년 이상 영양 지역의 특산물인 영양 고추를 우수한 것만 골라 수매하여 전국 각 본당과 연계 · 판매함으로써 영양 농민들의 수입을 올려 주고 있다. 아울러 이미 농민 운동의 성지가 된 영양 본당은 여전히 생명 운동과 농민 운동을 선도하면서 지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 가톨릭 사회 운동 ; 안동교구 ; 한국 가톨릭 농민회)
※ 참고문헌  《교구 전사》, 안동교구사 자료 4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pp. 45~761 《본당, 활동 수도 단체, 교구 단체 · 기관》, 안동 교구사 자료 6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pp. 248~2541 《교구 농민회》, 안동교구사 자료 3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6, pp. 93~146, 192~213/ 《기타 자료》, 안동교구사 자료 7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pp. 76~125.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