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永遠

〔라〕aeternitas · 〔영〕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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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결정적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이다.

영원의 결정적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이다.

그 자체 안에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께 속한 속성 가운데 하나.
〔정의의 문제점〕 '영원' 이라는 낱말은 "어느 상태가 시간적으로 끝없이 오래 지속하는 모양" 또는 "앞으로의 시간이 끝없이 오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철학적 용어로서의 '영원' 은 단순히 양적으로 끝이 없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시간의 대립 개념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의미한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영원' 에 대한 바로 이러한 철학적 전이해(前理解, Vorverständnis)를 전제로 제기된 것이다. 성서에 근거하여 이 물음에 대한 신학적인 해답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는 출발점부터 몇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첫째로 성서에는 '영원' 이나 '시간' (時間, tempus)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영원' 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원' 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데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철학적 논의를 성서에 곧바로 대입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의 언급]〕 히브리어 성서에는 '영원' 에 해당하는 고유한 낱말은 없다. '올람' (עוֹלָם)이 시간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흔히 '아득한 옛적' (창세 6, 4 : 여호 24, 2 : 1사무 27, 8 : 욥기 22, 15 ; 시편 77, 5 ; 잠언 8, 23 : 이사 64, 4 : 예레 2, 20 : 에제 25, 15 26, 20 ; 35, 5 : 요엘 2, 2 : 미가 5, 1 ; 하바 3, 6 ; 말라 3, 4)을 뜻하거나 '먼 미래' 를 뜻한다. '아득한 옛적' 을 뜻하는 '올람 은 '··로부터' (מִן)라는 전치사와 합쳐져 과거의 오랜 기간 (시편 25, 2 ; 잠언 8, 23 ; 이사 42, 14)을 뜻한다. 그리고 먼 미래의 어느 시점' 을 가리키는 '올람' 은 '.. 까지' (עַד)라는 전치사와 합쳐져 '영원히 · 영원토록· 영원까지 · 영영 · 길이' (forever)를 뜻하며, 앞으로 끝없이 펼쳐질 오랜 기간의 시간을 가리킨다(출애 14, 13 ; 신명 13, 16 : 2사무 7, 16 ; 시편 15, 5 등). '영원(올람)부터 영원(올람)까지' 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아득한 미래에까지 미치는 끝없는 오랜 시간을 뜻한다(느헤 9, 5 ; 시편 41, 12 : 90, 2 ; 103, 17).
"영원' 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관련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속성이나 행위를 서술하는 데 사용된 '올람' 이라는 낱말의 용례이다. 우선 '올람' 이라는 명사는 하느님을 수식하는 형용사적 용법으로 사용되는데, '영원하신 하느님' (창세 21, 33 ; 이사 40, 28) 과 '영원히 살아 계신 이(하느님)' (다니 12, 7)라는 어구에서 사용된다. 둘째로 '올람' 은 전치사(עַד)와 합쳐져 부사구가 되어서 하느님의 행위나 존재 양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출애 15, 18 : 1사무 20, 23. 42 ; 1열왕 8, 13 ; 9, 3. 5 : 10, 9 : 시편 125, 2 ; 146, 6. 10 : 예레 7, 7 등). 셋째로 '올람' 은 전치사(לְ)와 합쳐져 형용사구가 되어서 하느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술어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에 직접적으로 '하느님' 을 주어로 하여 "하느님은 영원하시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느님의 사랑/인자하심' (1역대 10, 9 ; 16, 34 ; 2역대 7, 3. 6 ; 시편 118, 1-4. 29 : 136, 1-26 등), '하느님의 자비하심' (1역대 16, 41 ; 2역대 5, 13 : 20, 21), '하느님의 진실하심' (시편 117, 2), '하느님의 이름' (시편 72, 17 : 135, 13), '하느님의 영광' (시편 104, 31), '하느님의 길 (하바3, 6), '하느님의 의로운 규례들' (시편 119, 160) 등이 영원하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드물게 야훼가 주어로 등장하는 문장도 있다. 예컨대 "야훼만이 영원한 임금이시다" (예레 10, 10), "야훼는 영원한 바위이시다"(이사 26, 4) 등이 그것이다. 또 부사구와 함께 "야훼여, 당신만은 영원토록 높으십니다"(시편 92, 8), "주님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출애 15, 18),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 8),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이사 51, 6), "나의 의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사 51, 8)라는 표현들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여러 가지 표현은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 즉 그분의 특유한 존재 방식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시간' 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시간을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누는 것도 생소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끊임없이 생성 · 성장 · 변화 · 소멸하는 과정 속에 빠져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시간적 존재라고 일컫는다면, 시간적 존재가 지니는 존재 양식의 특성은 가변성 · 일시성 · 연속성(連續性)이다. 하느님이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 양식을 가지신다면, 그분은 무엇보다도 시간에 속해서 시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일 수 없다.
'시간' 에 대한 대립 개념을 철학에서 '영원' 이라 일컫는데, 히브리어 성서에는 '영원' 을 나타내는 고유한 낱말이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시간 초월적 존재 양식과 속성을 서술하기 위해서 시간을 표현하는 개념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올람' 이다. '올람' 은 아득한 과거 · 먼 미래 · 끝없는 오랜 기간을 뜻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은 '올람'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특수한 존재 양식을 서술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시간 내적 존재로서 단지 양적(量的)인 면에서만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존재하신다. 즉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한 옛날부터 당신은 하느님,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사람아, 돌아가라' 하시오니 당신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시편 90, 2-5). "해가 바뀌고 또 바뀌고 세대가 돌고 또 돌아도 하느님은 영원히 계시옵니다. 그 옛날부터 든든히 다지신 이 땅이, 손수 만드신 저 하늘들이 사라질지라도 하느님은 그대로 계시옵니다. 옷처럼 모든 것이 삭아 빠져도 갈아입는 헌 옷처럼 모든 것이 바뀌어도 하느님은 언제나 같으신 분,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영원히 계시옵니다"(시편 102, 24- 27). 이러한 유대인들의 표현은 "영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정립하려고 철학적인 사고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떠한 좌절 속에서도 역사를 움직이시는 그들의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겠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도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또는 하느님께 속한 일을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데 '영원' (αἰών, αἰῶνες)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하느님' : 로마 1, 25 ; 16, 25 : 1디모 1, 17 : 묵시 4, 10 : 15, 7 : '하느님의 계획' : 에페 3, 11 : 구약 인용문 : 2고린 9, 9 ; 1베드 1, 24).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업에도 적용하였다( '그리스도' : 루가 1, 33 ; 요한 12, 34 : 히브 5, 6 : 13, 8. 21 ; 묵시 1, 18 : '영원한 생명' : 요한 3, 15. 16. 36 등). 특히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을 찬양하는 수많은 기원문(祈願文)에 '영원히' 라는 의미의 부사구가 사용되었다(갈라 1. 5 ; 1베드 4, 11 : 유다 1, 25 : 묵시1, 6 : 5, 13 등).
[용법상의 특징]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영원' 이라는 개념이 문장의 주어로 사용된 예는 단 한 번도 없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올람' 은 전도서 3장 11절만 예외로 하고, 그 외에는 명사 결합 구문에서 수식어 역할을 하거나 전치사구(prepositional phrase) 되어 서술어(predicate) 로 사용되거나 부사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말 성서를 비롯한 모든 번역 성서는 이 개념을 형용사 · 부사 · 부사구로 바꾸어 옮겼다. 성서 전체에서 '영원' 이라는 개념이 단 한 번도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서의 저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원' 이라는 개념을 철학적 사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과 시간〕 '영원' 이라는 개념은 오직 '시간' 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첫째로 시간이 양적으로 무한하게 늘어지는 것, 즉 시간이 끝없이 지속되는 것을 영원이라한다. 이러한 경우의 영원은 끝없는 시간(endless time)을 의미한다. 둘째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현상이 없는 상태를 영원이라 한다. 이 경우의 영원은 곧 무시간(無時間, timelessnes)을 의미한다. 셋째로 시간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을 영원이라 한다면, 이러한 영원은 시간과 질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초시간(超時間)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정의 중 어느 것도 영원에 대한 물음에 만족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첫 번째 정의에 따른 영원이 존재한다면, 시간은 앞으로 끝없이 지속될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도 끝없이 유지될 것이다. 시간과 이 세계의 영속성 여부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과 이 세계가 영속할 것이냐 또는 아니냐 하는 문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실존적 · 종교적 갈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두 번째 정의에 의하면 무시간적인 것, 즉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2+2=4 와 같은 수학적 진리는 시간과 관계없이, 즉 무시간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이러한 수학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사후(死後)의 세계 같은 것은 무시간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정의에 따른 이러한 의미의 영원성은 그것의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의 실존적 · 종교적 물음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로 단독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직 다른 존재자와 결합되어서, 즉 다른 존재자의 존재 방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일직선으로 늘어져 있는 시간이라는 선 위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이동해 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인간의 이러한 존재 방식을 시간성(temporality)이라 규정한다면, 시간성의 가장 큰 특징은 변화라는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변화와 생멸(生滅)이라는 필연적 과정에 내맡겨진 채, 단지 시간적으로 끝없이 존속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나누어진 연속 현상에 빠지는 일이 없이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동시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영원' 이란 시간의 무한 지속성을 의미하는 개념도 아니며, 시간과 관계없는 무시간성을 의미하는 개념도 아니다. 영원은 존재자의 참된 존재 방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인간에게 과거는 지나가 버리고 없고 다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기대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시간에 지배받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도 상실하지 않고 현재 속에 동시적으로 통합시켜서 존재하는 분은 하느님뿐이다. 그러므로 '영원' 이란 하느님의 존재 방식 자체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물질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우주를 구분하였다. 그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이 현상계는 시간의 지배 아래 놓여있어서 끊임없이 변화 · 소멸하는 것이므로 참된 실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순수한 형상(形狀)으로 구성된 이데아의 세계만이 영원 불변하는 참된 실재라고 하였다. 현상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시간은 이데아의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의 영상이며, 가변적인 이 현상계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영원한 실재의 그림자이다. 이데아 세계의 영원(eternity)은 무시간성(timelessness)이다.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는 시간을 최초로 신학의 주제로 철저히 고찰한 신학자였다. 시간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과 더불어 비로소 생겨났다. 하느님은 시간에 속하지 않고 시간을 초월해 계신다. 인간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시간을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누어 의식한다. 이와 달리 하느님은 시간을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눈 상태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현재 안에 동질적으로 완전히 통합된 형태로 의식한다. 영원은 하느님의 바로 이러한 존재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하느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알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 현재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위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행위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쿨만(O. Cullmann)은 《그리스도와 시간》(Christus und die Zeit이라는 저서에서 일반적으로 철학과 신학이 시간과 영원의 개념을 시간 범주(time-category)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정의한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반대하였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 속한 영원은 무시간을 가리키는데, 성서에는 무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는 영원을 "끝없는 삶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 (interminabilis vi-tae tota simul et perfecta possessio)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신학은 이 정의를 받아들여 영원을 존재의 충만 상태로, 시간을 존재의 붕괴 상태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성서의 사상을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쿨만은 비판했다. 그는 영원과 시간 사이를 질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영원은 끝이 없는 시간이며, 이른바 '시간' 은 하느님의 무한한 시간의 지속 중에서 하느님이 한정해 놓으신 한 토막이다. 그렇지만 성서에 시간성을 표현하는 개념만 사용되었다고 해서 영원과 시간 사이의 질적인 구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쿨만의 시간 이해는 해석학적으로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이 시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를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시간 지배권은 창조에서 처음으로 드러났으며, 구세사에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것은 시간적인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를 가장 구체화한 것이다.
〔영원과 구원〕 모든 종교는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구원이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영원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묵시 22, 13 : 21, 6)이라 일컬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 13, 8)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는 분으로서 시간 속에 들어와서 육신으로 사셨던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은인간이 시간 속에서 영원과 교제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이다.
※ 참고문헌  F.H. Brabant, Time and Eternity in Christian Thought : Bampton Lectures 1936/ 0.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l H. Conrad- Martius, Die Zeit/ J. Schmidt, Der Ewigkeitsbergriff im A.TI E. Jennie, Das Wort olam im A.T/E. Brunner, Das Ewige als Zukurft und Gegemwart.[金昌洛]
〔신학적인 의미의 영원〕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나 세상의 기원인 하느님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 즉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영원이라면, 영원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속성이다.
그렇다면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지속인가?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시편90, 2). 즉 하느님은 세계 이전부터, 시간 이전부터 계셨으며, 따라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영원은 시간의 지속 내지는 시간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다. 즉 무시간성이 아니며, 시간의 무궁성도 아니다. 시간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무궁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틸리히(P. Tillich, 1886~1965)에 의하면, 하느님을 피조물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행위이다. '영원' 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올람' (עוֹלָם)이나 그리스어의 '아이오니오스' (αἰωνίς)는 시간의 전 기간(all periodes of time)을 포함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영원은 그 자체 안에 시간을 간직한다. 영원은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단편적 시간들을 통일시키면서 초월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간이 끝없이 오램' 이라는 국어 사전적 정의는 신학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사실상 왜곡에 가깝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원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이 시간으로부터, 시간 안에서 감지되는 변화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임을 뜻한다. 만일시간 안에서의 변화를 모자람을 채우려는 움직임으로 규정한다면, 하느님은 모자람이 없으시기에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영원 불변하신 분이라고 고백되어 왔다. 이렇게 영원은 불변의 개념과 연결된다.
하느님의 영원 불변은 그리스도교의 오랜 신앙 고백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점도 있다. 하느님이 영원 불변하다면, 시간과 변화 안에 사는 피조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영원을 세상의 창조와 종말에 대한 반대, 즉 시간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 내 변화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 영원은 시간의 단순한 초월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영원은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내적으로 포함한다. 그것은 시간과 철저히 하나 되기에 시간에 얽매이지 않음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포함 관계는 양적 차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란 결국 무엇인가?
영원은 시간을 시간 되게 해주는 근거이다. 근거이기에 시간과 별개가 아니면서,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는 것이다. 라너(K. Rahner, 1904~1984)는 이러한 견해를 편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은 변할 수 없는 분, 무한한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고 존재의 충만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 사실도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변화 내지는 생성이 하느님의 영원, 불변성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은 영원 안에 있는 시간적 존재인 셈이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의 시각과도 통한다.
신학적으로 보면,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의 가장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이다. 육화는 영원한 하느님이 시간 내 변화의 존재로 들어오셨음을 뜻한다. 영원한 하느님이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제한시켜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기에, 그분이 영원한 분이시라는 논리이다. 시간 내 존재인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가능한이유도 영원이 영원으로 남으면서 시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간 안에 제한되어 사는 존재가 시간을 넘어 영원에 참여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도 여기에있다. 그래서 구원 사건은 영원하신 하느님이 스스로를 제한시켜 시간 안에 참여하심으로써 이루어진, 하느님 자신의 사건이며, 틸리히가 말하듯이, 현재적 시간 역시 유한한 시간으로 머물지 않고 영원을 담는 '영원한 현재' (eternal now)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간적 역사가 하느님 앞에서 결정적으로 의미 있다고 본다. 현재 시간은 하느님의 영원의 선취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 부활은 단순히 미래적 사건이 아니다. 지금 이미 그 미래에, 즉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론은 구원론과 연결된다. (→ 시간 ; 영원한 생명)

※ 참고문헌  이찬수, 《인간은 신의 암호》, 분도출판사, 1999, pp. 77~102, 137~146/ Joseph de Finance, 2, pp. 250~252/ Peter Manchester, 《ER》 5, pp. 167~171/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1, The University ofChicago press, 1951, PP. 274~276. 〔李贊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