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후리 본당
館後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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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최초의 본당인 평양 성당(왼쪽)과 1900년 봄에 건립된 관후리 성당.
평양교구 소속의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평양시 관후 리 251 소재. 1895년 평안도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되었 으며 1943년 평양교구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주보는 성 미카엘이었으나 1947년 관후리 성당을 신축하면서 평화의 모후로 변경하였다. 관할 지역은 평양시 대동강 서쪽과 대동군 고평면 지역. 〔역대 신부〕 초대 르 장드르 (Le Gendre, 崔昌根) 루이(1896~1898), 2대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이(1898~1923), 3대 김성학(金聖學) 알 렉시오(1923~1927. 10), 4대 클리어리(Patick Cleary, 吉) 파트리치오(1927. 10~1928. 10), 5대 더피(Patrick Duffy, 都) 파트리치오(1928. 10~1931.11), 6대 레이(Thomas Ray, 李) 토마스(1931.11~1932. 6), 임시 모리스(John Morris, 睦) 요 한(1932. 6~1933. 10), 7대 코너스(Joseph Connors, 權) 요셉 (1933.10~1938. 3), 8대 클리어리(1938. 3~1939), 9대 코너 스(1939~1941. 12), 10대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1942. 2~1943. 3), 11대 홍건항(洪健恒) 갈리스도(1943.3~1944. 4), 12대 김필현(金泌現) 루도비코(1944. 4~1949.6). 〔공소 시대〕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에는 1864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전교로 복 음이 전파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1866년의 병인박해 (丙寅迫害)로 폐허가 되었다가 1881년부터 김기호(金起 浩) 요한의 전교 활동에 힘입어 다시 복음이 전파되었 다. 그 뒤 차층 교우 집단이 생기게 되자 황해도 수안(遂 安) 본당 관할의 공소 지역으로 되었다. 1895년 가을, 수안 본당 주임이던 르 장드르 신부가 평양 성밖[外城] 산명모루〔山明隅 : 平川里〕에 사는 조신종(曹信宗, 야고 보)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였는데 이때 본당 설립에 의견이 모아져 사가(私家)를 매입하였다. 〔설립 및 발전〕 1896년 봄 평안도 전역을 담당할 평양 본당이 신설되었고, 르 장드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 명되었다. 이때 전국의 교우수는 3만여 명이었는데 평안 도에는 8개 공소(평양 외성, 광너울, 쑥개, 논재, 재경리, 영 진, 섭가지, 적뢰동)에 437명의 교우가 있었다. 처음 평양 외성에 자리했던 르 장드르 신부는 평양 시내로 들어가 고자 대지와 가옥을 물색하던 중, 평양 본당을 평양 시 내 중심지로 옮기라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명을 받아 1898년 5월 평양 시내의 장대재〔將台峴〕에 가옥과 부지를 매입하여 본당을 이전하였다. 르 장르드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르 메르 신부는 1900년 봄에 폭 24척 길이 81척, 종각 높이 57척의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건 축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기명학교(箕明學校) , 1906년 5월 성모여학교를 개설하고, 1909년 9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을 초빙하여 교육과 전교를 전담케 하고 1923년 1월에는 전교와 자선 사업을 목적 으로 하는 '성모시잉모태회' (聖母始孕母胎會)를 발족시 키는 등 20여 년 동안 재임하면서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이 서 울교구로부터 분리, 평양 지목구로 신설되면서 평양 본 당은 평양교구의 중심 본당이 되었고 메리놀회 신부들이 주임 신부로 부임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성당을 보수 하고, 이듬해 3월에는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를 통합하 여 6년제 성모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31 년 3월에는 서포(西浦)에 평양교구청이 준공됨으로써 본당 내에 있던 교구 관리와 재단 사무 일체가 새 청사 로 이전되었다. 이후 본당에서는 1932년 2월 성로회(聖 路會)를 조직하고, 6월에는 2대 평양교구장 모리스 신부 가 본당 주임 신부를 겸하게 되면서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을 증축하였으며, 청년회 주최로 많은 강연회를 개 최하여 평양 일대에 천주교를 널리 소개하였다. 계속되 는 교세 확대는 1933년 말 3,000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 하여 1934년 2월 평양 시내에 신리(新里) 본당을 신설 분할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평양 본당은 관후리(館後 里)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듬해에는 사회 사업 에도 관심을 쏟아 1월에는 본당 내에 양로원과 무료 숙 박소를 설치하였고, 10월에는 성모학원을 신설하여 전 교생이 무상으로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35년 10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평양교구 행사를 본당에서 성대히 거행하였고, 1936년 10월에는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성모보통학교를 신축하 여 이전하고, 본당 내에 있던 구교사(舊校舍)는 성모학 원, 주일학교, 성모 유치원, 신자 집회소, 가톨릭 운동 연맹 본회와 평양 지회 사무실, 양로원, 전교사들의 사 택, 여학생 기숙사 등으로 용도에 맞게 수리하여 사용하 였다. 1940년 1월 본당에서는 관할 구역 중 서평양(西平壤) 일대를 분리하여 기림리(箕林里) 본당을 분할시켰고, 7 월에는 30년 간 관후리 본당에서 교육 사업과 자선 사업 등을 맡아 오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서울 본원으로 철수하였으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 을 개설하면서 본당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였 다. 그러나 다음해 '태평양 전쟁' 이 발발하면서 평양교 구에서 사목 중이던 메리놀회 신부들 모두가 일제에 체 포 구금되자, 본당에서는 홍건항 보좌 신부가 사목하다 가 1942년 2월 평양교구장 대리직을 위임받은 홍용호 신부가 본당의 주임 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3년 3월 9일, 홍용호 신부는 대목구로 승격한 평 양교구의 초대 대목 으로 임명되었고 본 당은 평양교구의 주 교좌 본당이 되었는 데 1944년 2월 일제 에 성당과 부속 건물 을 징발당하여 산정 현(山亭峴)의 장로 교 예배당으로 본당 을 옮겨야만 하였다. 1945년 5월 본당에 서는 장래의 여러 가 지 문제점을 고려하여 상수구리 성모학교 북쪽 옛 수녀 원 자리에 있는 한옥을 개조하여 다시 본당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하면서 북한 공산 정 권과의 끈질 긴 교섭을 벌여 1946년 3월 성당을 다시 찾아 이듬해 전 교구민과 함께 대규모 성당 건축 사업을 시작하여 1948 년 말경에는 종각과 내부 공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가 북 한 공산 정권에 의해 납치되고 이어 6월에 본당 주임 김 필현 신부가, 12월에 보좌 서운석(徐雲錫, 보니파시오) 신부가 납치됨으로써 본당은 침묵 속에 잠겨 들었다. 당 시 본당 내의 신심 단체로는 성모시잉모태회, 성로회, 가톨릭 소년군, 가톨릭 운동 연맹 관후리 지회, 성가대, 성체회, 본당 자치위원회 등이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 업체로는 성모보통학교, 성모유치원, 성모학원, 양로원, 무료 숙박소 등이 있었다. 본당 출신 성직자로는 김필 현, 조문국(趙文國, 바오로), 서운석, 이병만(李炳萬, 요 셉), 김득권(金得權, 굴리엘모), 서우석(徐祐錫, 요한) , 황인국(黃仁國, 마태오) 신부 등이 있다. (→ 평양교구 ; ⇦ 평양 본당) ※ 참고문헌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編,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교회와 역사》, 83호(1982. 6), 한국교회사연구소/ 崔奭祐, 韓國 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尹善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