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 본당

永柔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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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소속 본당.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梨花里) 소재. 1902년 섶가지[薪枝里]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1년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고 이듬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1950년 본당이 폐쇄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주보는 성 파트리치오. 관할 구역은 평원군 평원면, 대동군 재경리면 송호리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송림리(松林里), 추흥리(橄興里), 금학리(金鶴里), 남양리(南陽里) 등 4개소.
[역대 신부] 초대 멩(J. Meng, 明若一) 요한(1902~1911) 2대 보댕(J. Bodin, 邊若瑟) 요셉(1911~1916) 3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19~1924. 8) , 4대 모리스(J. Morris, 睦怡世) 요한(1924. 8~1927), 5대 포스피살(H. Pospichal, 裵후베르토(1927~1927. 10), 6대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1927. 10~1929. 3), 7대 부스(W. Booth, 夫) 월리엄(1929. 3~1931. 11), 8대 할로란(E. Halloran, 河) 에드워드(1931. 11~1935. 1), 9대 김성학(1935. 1~1936. 7), 10대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1936. 8~12), 11대 펠로궨(L. Pelo-quin, 白) 레오(1937. 1~1938. 3), 12대 하딩(A.W. Harding, 정) 알프레드(1938. 3~1941. 12), 13대 심재덕(沈載德) 마르코(1942. 10~1943. 5), 14대 한윤승(韓允勝) 필립보(1943. 6~1945. 10), 15대 홍도근(洪道根) 요한(1945. 10~1949. 12) .
영유 지역에는 1895년 한학자 조상순(趙象淳, 로베르토)이 세례받은 후 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2년 뒤 그는 자신의 사가(私家)에 공소를 마련하였다. 공소 설립 이후 신자수가 증가하자 조상순은 현 본당 소재지의 한옥을 구입한 뒤 앞으로의 본당 설립에 대비한 준비를 해 나갔다. 1902년 섶가지 본당 2대 주임 멩 신부는 군청이 있는 영유읍으로 본당을 이전하는 것이 앞으로의 교회 발전을 위하여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영유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고, 섶가지 본당을 그 관할 공소로 편입시켰다. 이와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멩 신부는 평안남도 북부 전역의 여러 공소를 순회 전교하며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한편, 1908년에는 영유 지방 최초의 교육 기관인 영청(永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보댕 신부는, 한때 신병 치료차 서울에서 요양하기도 하였으나 본당 회장 및 전교사들의 체계적인 교리 교육과 신심 함양을 위해 피정을 실시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15년 12월 보댕 신부가 본국으로부터 동원령을 받고 귀국하자 의주(義州) 본당 초대 주임 서병익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고, 영청 학교는 폐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침체되어 있던 본당은 1919년 3대 주임으로 박우철 신부가 부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박우철 신부는 우선 폐교의 위기에 놓여 있던 영청학교를 6년제 보통 학교로 개편시켰고, 청년회 · 안나회 등 각종 신심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각 공소의 체계적인 사목을 위해 공무회(共務會)를 결성하였다.
1922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으면서 이듬해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으며, 1924년에 4대 주임으로 모리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모리스 신부는 박우철 신부가 계획했던 성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여 고딕식 연와제(煉瓦製) 성당을 완공하고, 1926년 5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같은 해 메리놀 외방 수녀회 한국 지부가 영유 수녀원으로 지정되자 상주하게 된 수녀들은 전교 활동과 더불어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고, 고아원을 개설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이듬해에는 여자기예학교(女子技藝學校)를 설립하여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자수(刺繡)를 필수 과목으로 교육하면서 교리 · 한글 · 일어 · 산수 등도 가르쳤다. 1927년 모리스 신부가 다른 소임을 맡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5대 주임으로 포스피살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신병으로곧 사임하였고, 그 해 10월 6대 주임으로 김성학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성학 신부는 1928년 은산(殷山) · 마산· 영유 세 본당 회장단 40여 명의 피정을 실시하는 등 신자들의 내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8대 주임으로 부임한 할로란 신부는 양로원을 개설하여, 운영되고 있던 고아원 · 시약소와 함께 영유 지방 자선 사업의 핵심으로 발전시켰다. 영유 본당에 다시 부임한 9대 주임 김성학 신부는 1931년 숙천(肅川)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섶가지 공소도 이관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 구금되자 영유 본당은 한때 마산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으나,평양교구가 교구로 재정비되어 1942년 10월부터 신부들이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활기를 찾은 신자들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교무금을납부하는 등 열성과 희생을 다해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 신부였던 홍도근 신부가 체포된 데 이어 이듬해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 양로원 · 수녀원 등 모든 부속 건물이 몰수됨으로써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 영유여자기예학원 ; →섶가지 본당 ; 침묵의 교회 ; 평양교구)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天主教平壤教區史》분도출판사, 1981.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