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 본당

永宗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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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중구 중산동 1284번지 소재. 1965년 6월 30일 영종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르나바. 관할 구역은 영종도, 삼목도, 용유도, 무의도, 북도면 전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운서 · 삼목 · 용유 · 무의도 · 신도 · 시도 · 장봉도 등 7개소. 〔교 세〕 1965년 1,700명, 1973년 1,950명, 1984년 819명, 1991년 1,104명, 2000년 1,515명. 〔역대 신부] 초대 시노트(J.Sinnott, 진) 야고보(1965. 6~1975. 11), 2대 이준희(李俊熙) 마르코(1975. 11~1979. 3), 3대 이성득(李聖得) 요셉(1979. 3~1981. 2), 4대 진성만(陳聖萬) 베드로(1984. 7~1986. 2), 5대 김재수(金在洙) 토마스 (1986. 2~1987. 4), 6대 롤위츠(R.S. Rolewicz) 리카르도 (1987. 8~1991. 1), 7대 세니자(D. Ceniza, 재단일) 다니엘 (1991. 1~1993. 1), 8대 김영재(金英在) 그레고리오(1993. 1~1996. 2), 9대 디아즈(H. Diaz, 원) 헥톨(1996. 2~1999. 2), 10대 최상진(崔尙鎮) 야고보(1999. 2~2002. 1), 11대 박병훈(朴炳勳) 요셉(2002. 1~현재).
〔공소 시기와 설립〕 1889년 답동(沓洞) 본당 설립 이후 관할 구역인 송산(松山)과 돌곽재〔石峴〕 등지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답동 본당 3대 주임 마라발(J.Maraval, 徐若瑟) 신부는 1901년 돌곽재에 영종 공소를 신설하였다. 1910년 공소 신자들은 열두 칸 규모의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으며, 1916년 12월에는 제8대 서울 대목구장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공소 신자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55년 9월 송림동(松林洞) 본당이 설립되자 영종공소는 신설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65년 6월 송림동 본당 3대 주임 파퀘트(J. Paquet, 朴) 신부는 영종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으며, 초대 주임으로 메리놀 외방전교 회의 시노트 신부가 부임하였다.
〔공소 격하와 재승격〕 공소 강당의 협소함을 고려하여 시노트 신부는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1,800평)를 마련한 뒤 공사를 시작하였고, 1967년 10월 단층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와 함께 인보 성체 수녀회의 분원을 마련하였으며, 복음 전파에 주력하여 신자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 공소를 설립하였다. 당시 본당 관할 구역 내에는 운서 · 용유 · 무의 · 시도 · 신도 · 삼목 · 뒷골 등 8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시노트 신부는 영종도에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고려하여 1965년에 '예수성심영종병원' (1976년 폐원)을 설립하였고,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을 활용하기 위해 간척 사업도 펼쳤다. 시노트 신부의 적극적인 사목 활동으로 본당은 점차 안정되어 가는 듯했으나, 군사 정권의 인권 탄압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본당 운영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1975년 4월에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시노트 신부가 강제 출국당하는 '시노트 신부 사건' 이 발생하였다. 시노트 신부는 정치적 반대자(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박정희 정권에 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였는데, 정부는 '정치 활동으로 인한 공공 질서 파괴' 라는 명목으로 시노트 신부를 연행하여 재판하였다. 판결로 인하여 시노트 신부는 미국으로 강제 출국되었고, 이후 본당은 더욱 침체되었다.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성득 신부는 침체된 본당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영종 본당은 1981년 2월 화수동(花水洞) 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공소로 격하된 후에도 영종 지역의 신자들은 공소 회 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화수동 본당 7대 주임 이찬우(李讚雨, 요셉) 신부는 매주 영종 공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에 1984년 7월 15일 영종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4대 주임으로 공소에 거주해 오던 예수회의 진성만 신부가 임명되었다. 같은 달 성가 소비녀회의 분원을 마련한 진성만 신부는 본당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당시 본당 재정은 사제나 수녀들의 생활비도 충당하지 못할 만큼 어려웠다. 5대 주임 김재수 신부는 정부의 종교 탄압에 대항하다가 군종교구 신부로 전출되었는데, 교구의 사제 부족으로 본당에는 약 4개월 동안 신부가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롤위츠 신부가 사목회 개편, 공소 순회, 기도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본당은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2002년 1월 21일 영종 본당은 정부의 영종도 개발 정책으로 인천 국제 신공항의 개항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상주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17세대, 270명의 교적을 이관하여 신공항 본당을 분리 · 신설하였다. (→ 답동 본당 ; 인천교구)
※ 참고문헌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