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적 근원.
I . 신학에서의 영혼
엄밀한 의미에서 영혼은 육체를 지닌 존재의 원리이며, 존재의 본래적인 근원이다. 영혼은 천사들과 같은 순수 영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오직 육체를 지닌 존재들특히 이성적인 능력을 지닌 인간 존재의 영혼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생명과 지혜의 근본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는 식물과 동물에게도 각각 혼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식물이나 동물과는 달리 순수 정신으로 길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성적 능력을 지닌 인간 영혼의 고유성을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영적이며 불멸하다고 가르친다.
〔성서에서의 의미〕 성서에서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 이 아니라, 숨쉬면서 살아 있는 '온전한 인간' 을 의미한다. 즉, 영혼은 몸 안에 사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 같이 몸을 통하여 자기를 표현하는 온전한 인간을 뜻한다. 그렇기에 영혼은 선재(先在) 하는 것도 아니고, 육체 없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서에서 영혼을 뜻하는 용어들은 직 · 간접으로 '숨' (רוּחַ)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성서에서의 영혼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 : 숨이나 호흡은 살아 있다는 표시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아직 '숨' 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2사무 1, 9 : 사도 20, 10).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떠나고(창세 35, 18) '숨' 이 끊어지고(예레 15, 9), 또는 액체와 같이 쏟아져 버리고(이사 53, 12), 그가 소생하면 영혼도 그에게 돌아온다(1열왕 17, 21). 성서에서 '숨' 은 몸과 불가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숨' 은 사람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이나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계속되는 호흡을 통하여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여기에 영혼과 피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시편 72, 14) 이유가 있다. 즉 영혼은 피 속에 있고(레위 17, 10-11), 피는 영혼 그 자체이며(레위 17, 14 : 신명 12, 23) 살아 있는 사람이다.
생명 : 영혼이라는 용어는 '살아 있는 것' 이란 의미에서 '생명' 이란 의미로 옮겨져 이 두 낱말이 유사하게 사용되었다(시편 74, 19 ; 출애 21, 23). '생명' 과 '영혼' 은자주 동일시되고 있으나,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과 대조적인 '영적인 생명'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오랫동안 지상에서의 삶을 뜻하였으나, 천상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의미로 바뀌었다.
흔히 영혼은 현세적 생명의 원리로 여겨진다. 사람은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여호 9, 24 ; 사도 27, 32), 죽음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려 하며(1사무 19, 11 : 시편 6, 5), 그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껴지면(시편 35, 4 ; 38, 13 : 마태 2, 20 : 로마 11, 3) 그것을 안전하게 하려 한다(루가 21, 19).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하고(마태 6, 25 ; 루가 12, 22-23), 오히려 그것을 내걸고 나설 필요가 있으며(필립 2, 30), 자기 양들을 위하여 그것을 내주어야 한다(1데살 2. 8).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영원한 생명이란 선물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 25)라는 구절의 의미를 드러낸다. 여기서 '목숨을 살린다' 는 것은 영혼을 구한다는 것이며, 이는 영혼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승리를 뜻한다(야고 1, 21 : 5, 20 : 1베드 1, 9 : 히브 10, 39).
인격 : 생명이 인간의 가장 귀중한 선(善)이라면(1사무 26, 24), 자기 영혼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구한다는 뜻이다. 결국 영혼은 인격(인간)을 뜻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영혼은 모든 살아 있는 것, 동물까지도(창세 1, 20-21, 24 ; 2. 19) 뜻하지만, 특히 인간에 대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의 영혼은 하나의 사람이다. 극단적인 예로는 사체에 대해서도 생전의 일을 생각하여 죽은 영혼(민수 6, 6)이라 불렀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볼 때, 영혼은 마음이나 몸과 똑같이 '나' 를 의미하지만, '나' 〔自我)의 내면성과 생명력을 강조한다. "내 영혼(목숨)을 걸고"(아모 6, 8 ; 예레 51, 14 ; 2고린 1, 23)라는 말은 맹세하는 자의 깊은 의무감을 나타낸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영혼(목숨)처럼 사랑했다(1사무 18, 1. 3). 그리고 이 자아는 '영신적' 이 아닌 행동에서도 자신을 표현한다.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루가 12, 19-21)가 그 단적인 예이다. 영혼은 특히 삶에 대한 갈망과 의욕을 표시하며, 목이 타는 듯한 갈망을 나타내고 있다(시편 63, 2). 목이 타고 굶주린 영혼은 충족될 수 있다(시편 107, 9 ; 예레 31, 14). 영혼은 기쁨(시편 86, 4)에서 걱정(요한 12, 27)과 슬픔(마태 26, 38)으로, 안도(필립 2, 19)에서 권태(히브 12, 3)로 변하는 감정의 기복을 경험한다. 영혼은 아버지로서의 축복을 내려 주고(창세27, 4), 박해를 감수할 수 있도록(사도 14, 22) 강화되고 싶어한다. 영혼은 사랑하거나(창세 34, 3), 미워하고(시편 11, 5), 어떤 사람의 기쁨을 사고(마태 12, 18 ; 히브 10, 38), 영구히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마태 22, 37 ; 마르 12, 29-30 : 에페 6, 6 : 골로 3, 23).
또한 영혼은 성화되어야 한다(1베드 1, 22). 바오로는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바쳤고(2고린 12, 15), 영신적 지도자들은 영혼을 감시했으며(히브 13, 17), 예수는 영혼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였다(마태 11, 29).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육체로 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생명의 씨앗, 영원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다(1베드 1, 9).
영혼과 생명의 원리 : 영혼은 생명의 표지이지만 생명의 원천은 아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생명의 영적 입김(숨)' 이 있으며(창세 7, 22), 그것이 없으면 죽는다. 이 '숨' 은 지상에 사는 동안 빌려 온 것이다(시편 104, 29 30). 이와 같이 영혼(ψυχή)은 생명의 원리이고, 영(πνεῦμα)은 영혼의 원천이므로(히브 4, 12) 두 가지가 서로 구별된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러한 구별을 받아들여 '자신의 불경한 욕정을 따라 살며 조롱을 일삼는 자들' 을 '영을 지니지 못한 자들' (유다 1, 18-19)이라고 하였고, 본능적 욕정으로 사는 신자들은 세례로 얻은 '영적' 상태에서 '자연적' 상태로 옮아간 사람들(1고린 2, 14 ; 15, 44 : 야고 3, 15)이라고 표현하였다.
영혼과 사후의 존속 :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영' (욥기 34, 14-15 ; 시편 31, 6 ; 전도 12, 7)과는 달리, '영혼' 은 뼈(에제 37, 1-14)나 육체(시편 16, 9-10 : 63, 2)처럼 죽고(민수 23, 10 : 판관 16, 30 ; 에제 13, 19) 죽음에 부쳐질 수 있다(시편 78, 50). 이 영혼은 명부에 내려가 그림자와 같은 죽은 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한다. 그곳은 '살아있는 자들의 땅' 에서 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욥기 14, 21-22; 전도 9, 5. 10).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멀기 때문에 그분께 찬미를 드릴 수 없어서(시편 88, 11-13), 그들은 침묵 속에서 살 뿐이다(시편 94, 17). 영혼은 이미 없는 것이다 (욥기 7, 8. 21 ; 시편 39, 14).
그러나 깊은 구렁 속으로 내려간 영혼(시편 30, 4 ; 49, 16 : 잠언 23, 14)은 하느님의 전능으로 다시 살아나고(2마카 7. 9. 14. 23), 흩어졌던 뼈들도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영혼과 육체 : 영혼이 명부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혼이 그곳에서 육체 없이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혼은 육체 없이 자기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그 삶으로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지혜서가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구별은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활은 영혼에 내재하는 힘의 활동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이다. 하느님은 영혼 안에 때가 되면 싹이 틀 영원한 씨앗을 넣으셨다(야고 1, 21 ; 5, 20 ; 1베드 1, 9). 인간은 '살아 있는 영혼' , 바오로가 말하듯이 '영적인 몸'이 되어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1고린 15,45).
[그리스도교 철학의 고찰]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1 427~348/347)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영혼이 공간을 취하지 않으며 비질료적인 것으로서,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성이나 선택하는 자유의 행위를 완성하고 육체에 마음을 담아 주고 그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체현시켜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들 역시 영혼을 설명할 때, 존재와 존재의 원리를 구분 지으면서 영혼은 존재의 원리요 본래적인 생명의 근원이라고 설명하였다. 영혼은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성이라는 인간의 또 다른 원리와 더불어 '인간' 이라는 '실체적인 통일' 을 구성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하면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하였지만,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육체와 영혼으로 통일된 인간의 전체성을 강조하였다. 육체는 인간의 정신적인 인격성의 표현이며, 인간의 정신은 유한한 공간과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작용하며, 마침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전체적인 인간의 완성, 즉 부활을 추구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대변하는 주요 사상은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5~1274)에게서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 : 그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영혼과 물질적인 육체라는 상반된 요소로 구성된 갈등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래서 "영혼이 자아를 알려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De Trinit., X , Ⅷ, 11)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는 영혼 안에 있는 추리하는(rationali) 영성과 알아듣는(intellectionali) 영성 안에서 창조주의 모습을 발견해야만 한다.···비록 어떤 때는 합리성과 타당성이 전혀 없어 보이거나, 혹은 점점 없어지거나 크게 부각될 때라도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이며 지성적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영혼이 이성과 지성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혼은 밝고 아름다울 수 있고 부단히 그렇게 있을 수 있다" (De Trinit, XIV, Ⅳ, 6)고 하였다. 그는 인간 영혼의 세 기능인 기억(memoria) · 지성(intelligentia) · 의지(voluntas)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De Trinit, Ⅹ, XII , 19).
토마스 아퀴나스 : 그 역시 아우구스티노처럼 인간을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영혼을 '육체의 형상'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혼이란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영혼은 우리들 주위에서 발견되는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의 제일의 생명 원리이다." 이러한 인간 영혼은 육체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자립하는(subsistens) 어떤 것으로 보면서, 그 이유는 영혼이 연장(延長)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성적 인식의 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영혼은 이 지성적 인식을 통해서 모든 물체의 본성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 자체만으로는 인간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지고, 영혼의 기능만이 아니라 감각적 인식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형상인 영혼과 질료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 안에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영혼을 빼버린 육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가 아닌 여러 물질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영혼은 죽은 뒤에도 존속하지만, 이것이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에 놓여 있는 동안은 엄밀히 말해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이 육체와 일체가 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서 각각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와 합쳐져 있는 것이 합쳐져 있지 않은 상태보다 좋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영혼은 본성적으로 육체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육체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영혼의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항구적일 수 없다. 따라서 영혼이 언제까지나 육체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언제까지나 계속 존재하는 것이므로 다시 육체와 합쳐져야 한다. 이것이 죽은 자의 부활이다. 결국 인간이 잉태될 때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영혼은 인간이 죽은 후에도 존재하며, 죽은 이들이 부활할 때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혼은 다섯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생장 기능 · 감각 기능 · 욕구 기능 · 장소 이동 기능 · 지성적 기능이다. 그리고 순수 물체적 자연을 능가하는 정도에 따라 영혼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즉 생장 혼(anima vagetativa) · 감각 혼(anima sensibilis) · 지성 혼(anima ratio-nalis) 등이다.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교 교의는 영혼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가르친다. 하나는 영혼이 불멸하며 사라지지 않는 실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불멸성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육체의 단일체로서 인간 인격의 개별성과 우위성의 강조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의에 따르면, 영혼이라 불리는 존재의 원리는 '실체적' (substantial)인 것이다(DS 567). 즉 단순히 어떤 다른 사물의 존재 양식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독립적이고 단순하다(DS 900, 1440, 2828). 그것은 존재하기를 멈추는 물질적인 존재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결코 단순히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진정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존재로부터 독립되고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혼은 결코 죽음으로 인간의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의식과 더불어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영혼은 불멸한다(DS 1440). 하지만 이 영혼의 불멸성이란 단순히 이전과 같은 양식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한 시간 속에서의 지상 생활을 마친 정신적 인격의 초시간적인 완성과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시 진리는 최종적으로 이러한 충만은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로서 인간 전체의 완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에서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물질 세계를 초월하여 영적 불멸의 혼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14항). 1992년에 발표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 라고 가르치며,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어서 영혼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 그리고 특별히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그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363항).
영혼과 육체의 일체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 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다고 하면서,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의 살아 있는 육체일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덕분이라고 한다(365항). 그리고 각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밝힌다. 이런 영혼은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366항). 오히려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육체와 결합되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능과 예수 부활의 은덕으로 영혼과 육체를 결합시킴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체에 돌려주는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997항)
※ 참고문헌 W.E. Lynch, Soul in the Bible, 13, pp. 449~450/ P.B.T. Bilaniuk, soul human, 《NCE》 13, Pp. 450~464/ K. Rahner . H. Vorgrimler, Dictionary of Theology, Grosseroad · New York, 1981/ R. Shaw ed.,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Catholic Doctrine, Our Sunday Visitor, Inc., 1997/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 입문》, 서광사, 1989/ 조정옥, 《성 아오스딩에 의한 인간 및 하느님》, 효성여자대학교 출판부, 1989/ G. 달 사쏘 R. 코지 편, 이재룡 · 이동익 . 조규만역,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요약》,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3/ 가톨릭대학 교리 사목 연구소 · 주교 회의 교리 교육위원회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편찬실]
II 유교에서의 영혼
〔유교의 입장〕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 전통에 천주교가 전래되었을 때 가장 예민한 관심을 모았던 문제 중 하나는 '영혼' 개념이다. 이에 상응하는 '귀신' (鬼神) 개념을 성리학에서는 '기' (氣)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자(朱子, 1130~1200)는 '귀신' 을 '기' 가 굽혀지고 펴지며, 가고 오는 것이라 하고, 음 · 양의 '기' 가 자라나고 소멸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인간 존재의 삶〔生〕과 죽음〔死〕은 '기' 가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으로서, '귀신' 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귀' (鬼)와 '신' (神)의 두 양상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백(魄)과 혼(魂)에 상응시켜 일컬어진다. '귀신' 이 만물을 포함한 자연의 현상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혼백' 은 인간 존재에서 일컫는 것으로 구분될 뿐이다. 유교에서는 각 개인의 사후에 귀신 내지 혼백이 불멸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교의 '귀신' 개념은 귀신 자체를 절대적 초월자로서 또는 객관적 실재로서 인식하거나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의 한 존재 양상으로서 인식할 뿐이다.
천주교의 '영혼' 과 유교의 '귀신 · 혼백' 논쟁에는 개념 내용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혼란이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실체를 심성정(心性情)으로 보고 '성'(性)은 '이' (理)요, '정' (情)은 '기' (氣)이며, '심' (心)은 '성정' (性情)을 통합한 것으로 인식하며, 귀신 · 혼백은 '기' 의 작용으로 해명한다. 그러나 서학의 영혼은 '이기' (理氣)로 구분되지 않는 인간 생명의 본질이므로 '귀신 · 혼백' 의 측면과 '심성' 의 측면 양쪽에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영혼을 천주의 존귀함과 비슷하다고 비유한 서학의 견해를 부정하였으나, 상제(上帝)와 비길 수 있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심' (心)이라 지적하고 있는 사실은 이 비판이 영혼 개념의 혼란에서 왔던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선교사들의 설명〕 16세기 말 이래 천주교 선교사들이 유교적 용어를 사용해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을 때, 천주교와 유교는 서로 유사한 용어를 통하여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됐다. 그 문제 가운데 하나가 귀신 · 혼백과 영혼의 개념이다. 초기 예수회 선교사로서 귀신과 영혼의 문제를 중시했던 인물은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와 삼비아시(F. Sambiasi, 畢方濟, 1582~1649)였다.
리치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의 제3편 '사람의 혼은 불멸하여 짐승과 크게 다름을 논함' 과 제4편 '귀신과 사람의 혼이 다르다는 이론을 변석하여 천하 만물이 일체라 할 수 없음을 해명함' 의 두 편에서 귀신과 영혼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제6편 '불가멸(不可滅)의 뜻을 해석하고 아울러 사후에 천당 지옥의 상벌이 있어 세상사람이 행한 선악에 보답함을 논함' 에서는 주로 사후 세계인 천당 지옥설을 논의하고 있다. 또한 삼비아시의 《영언여작》(靈言蠡勻)은 천주교의 영혼론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로서, 스콜라 철학의 체계에 따라 영혼 개념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서학의 영혼 개념은 아니마(anima)의 개념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며, 유교의 ''혼' 개념은 아니마와 일치하는 측면과 어긋나는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영언여작》에서는 영혼의 본체를 정의하여, 자립하는 실체이며, 신의 종류로서, 죽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지어 주신 것이고, 은총과 사람의 선행에 의뢰하여 진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식물의 생혼(生魂) · 동물의 각혼(覺魂) · 인간의 영혼(靈魂)으로 구분한 혼삼품설(魂三品說)을 소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생혼과 각혼의 기능 이외에도 사물을 추론하고 의리를 분변하는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갖고 있다. 식물이나 동물의 혼이 신체와 함께 소멸되는 것과는 달리, 영혼은 사람이 죽어 신체가 없어지더라도 영원 불멸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영혼이 인간의 출생과 동시에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천하 만물이 유시유종(有始有)終)한 것에 비하여, 영혼은 유시무종(有始無終)한 것으로서 불멸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인간은 사후에 그가 현세에서 지은 행위의 선악에 대해 복락(福樂)과 고통의 상벌을 하느님께로 부터 받게 되고, 그 복락의 장소가 곧 천당이요, 고통의 장소가 지옥이다. 사후 세계로서의 천당 · 지옥 개념은 유교 사상 속에는 없으나, 불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동양인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사후 세계관은 불교의 윤회설(輪廻說)과 다르므로 불교의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그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했다. 따라서 리치는 천당 지옥의 문제에서 불교와 서로 비슷한 용어로 인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불교의 사후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리치는 생혼 · 각혼 · 영혼의 삼혼설(三魂說)을 통하여 인간 영혼이 사후에도 불멸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리학의 '귀신' 내지 '혼백' 개념은 '기' (氣)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죽은 뒤에는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으나 끝내는 흩어져 소멸하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와 상반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리치는 성리학에서 귀신이나 혼백을 '기' 의 음양굴신(陰陽陽伸)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박하였다. 그는 '기' 를 귀신이나 영혼으로 보는 것은 개념을 혼란시키는 것이라 하고, "귀신에 제사하는 자는 있지만 '기' 에 제사하는 자가 있다고 듣지 못하였다" 고 기설(氣說)을 부정하였다. 또한 롱고바르디(Nicolas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는 《영혼도체설》(靈魂효說)에서 성리학의 '도체' 개념을 영혼에 견주어지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도체' 란 만물에 공유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혼은 각 사람이 따로 갖는 것이며, '도체' 는 거듭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영혼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창조되는 것이라 한다. 또한 도체' 는 지각이 없는 어두운 것이지만 영혼은 밝은 지각 능력이 있는 것이고, '도체' 에는 공죄(功罪)나 화복이 없으나 영혼은 행위에 따라 공죄와 상벌이 있다는 등의 차이를 제시하여 변론하고 있다.
〔유학자들의 비판〕 천주교에서 인간 영혼의 사후 불멸과 인간 행위의 선악 · 공죄에 따라 사후에 화복의 상벌을 받는다는 주장은 신앙에 근거를 둔 윤리 체계이므로, 유교의 합리적 내지 현실적 윤리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영혼론에 있어서 유교의 서학 비판은 가장 먼저 영혼 불멸설에 집중되고, 이와 더불어 사후에 영혼이 간다는 천당 지옥설이 비판 대상이다. 서학이 불교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므로 유교의 전통에서 불교를 배척하는 논리에 따라 양자를 동일시하여 불교에 대한 비판 논리를 서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서학 비판에서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서학의 영혼 개념과 천당 지옥설이다. 그는 죽은 사람의 귀신, 즉 죽은 뒤의 영혼 존재에 관한 이론으로 유교 · 서학 · 불교의 입장을 대비시키고 있다. 곧 유교에서는 '기' 가 모이면 출생되고, 흩어지면 죽어서 없어진다고 하며, 서학에서는 '기' 가 모여서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된 다음에는 별도로 일종의 영혼이 있어서, 죽은 뒤에도 소멸되지 않고 자신의 귀신이 되어 영구히 존속한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다시 사람이 되어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한다. 안정복은 영구히 존속하여 흩어지지 않는 '귀' 가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데 느리고 빠른 차이가 있다는 견해가 우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혼' 과 '백' 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며, 리치가 설명한 생혼 · 각혼 · 영혼의 혼삼품설을 순자(荀子, 기원전 300?~230?)가 '초목' (草木)의 '생'(生) · '금수' (禽獸)의 '지' (知) · 인간의 '의' (義)로 구분한 것과 통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영혼 불멸설은 불교와 같은 것이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면 무한히 늘어나는 인류를 천당이나 특히 지옥의 한정된 크기로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 하여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신후담은 <서학변>(西學辨)에서 특히 《영언여작》에 관한 비판을 통해 영혼론의 문제를 정밀하게 검토하였다. 《영언여작》에서 영혼이 '자립하는 실체' 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 대해, 신후담은 "혼이란 형체에 의지하여 있다가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상반된 입장을 제시한다. 곧 유교의 '혼' 개념에서는 '혼' 이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영혼이 생혼이나 각혼과는 달리 죽을 수 없는 것이라는 불멸성에 대해, 생혼과 각혼이 쓰이지 않는다면 영혼이 불멸한다고 하더라도 천당의 즐거움이나 지옥의 고통을 지각할 수 없으니 소멸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신후담은 서학에서 영혼의 존귀함이 천주와 비슷하다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인혼(人魂)을 '아니마' 라고 부르는 것도 서양의 방언이니 상관이 없다. 다만 '아니마' 를 천주에 비교하여 그 존귀함이 서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다. 유교에서 ''혼' 을 논하는 것은 '백' 에 상대한 것이다. 혼백과 귀신은 음 양이 굽혔다 펴졌다 하는 자취라는 점에서만 견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인간과 하늘은 지위가 다르며, 따라서 존귀함에서 서로 비슷할 수 없다는 유교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유교에서 '상제' 와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은 '혼' 이 아니라 '마음' 〔心〕이며,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고 '상제' 는 우주를 주재한다는 '주재' 의 역할에서 그 지위가 같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상제와 견줄 수 있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라 성품〔性〕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죽어서 '혼은 날아가고 백은 내려가서' 흩어져 변하면 ''혼' 이 없어지므로 천당 지옥설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나아가 복선화음설(福善禍淫說)도 유교에서는 이치에 순응하면 당연히 복을 받고 이치를 거스르면 재앙을 당하는 것이므로 천당 지옥의 존재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여, 서학에 대한 논변을 통하여 유교의 입장을 더욱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신(神)과 형(形)이 오묘히 결합하여 사람이 되니, 신은 형이 없으므로 이름도 없으나 무형하기 때문에 빌려서 신이라 이름지었고, 심(心)은 심장(心臟)으로서 오묘한 결합의 중추가 되므로 빌려서 심이라 이름하며, 죽으면 형을 떠나므로 혼(魂)이라 이름한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는 천주교의 영혼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유교의 신(神) · 심(心) · 혼(魂)을 일치시켜 해명하였다. 정약용은 또한 초목의 성(性)은 '생(生)이 있으나 각(覺)이 없고' , 금수의 성은 '생이 있는데 또 각이 있으며' , 인간의 성은 '생이 있고 각이 있는데 또 영(靈)하다' 라고 하여, '혼삼품설' 을 그대로 '성삼품설' 로 대치시킴으로써 천주교의 ''혼' 개념을 유교의 '성품' 개념 속에 수용하였다. 이처럼 그는 용어의 혼란을 넘어서 본질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서학의 영혼론을 유교의 바탕 위에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신앙과 윤리적 실천의 동기를 결합시킴으로써 서학의 입장을 유교의 윤리 사상 속에 수용하고 있다. 그는 《중용》(中庸)에 이른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경계(戒愼)하고 두려워[恐懼]하는 신독(愼獨)의 수양은 남이 못 보고 못 듣는 자리에 홀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 귀신이 내려와 감시하고 있는 자리라 밝혔다.
[차이점] 천주교가 유교의 혼기설(魂氣說)을 비판하는 근본 입장은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 신적 존재라는 데 있다. 유교에서 죽음은 '기' 내지 '혼' 이 흩어져 소멸되는 것이라 보는 데 대해, 천주교는 '기' 와 ''혼' 이 다르다는 전제 위에서 '혼' 의 불멸설을 입증하고 있다. 리치도 영혼은 신(神)이며 '기' 와 무관하므로 불멸하는 것이라하였다. 그는 또한 착한 자는 본심(本心)을 간직하여 사후에도 마음〔心〕이 불멸하나 악한 자는 본심을 무너뜨려 마음이 흩어져 소멸한다는 유교의 주장에 대해, 영혼이모래나 물처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로써 선악이 영혼이나 본심의 소멸이나 불멸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변론하였다. 리치는 여기서 유교의 '본심' 이나 '성' (性)과 서학의 '영혼' 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나, '기' 로서의 ''혼' 개념보다는 '본심' 이나 '성'이 '영혼' 과 더욱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리치가 영혼을 '마음' 이나 '성' 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 이나 '성' 보다 ''혼' 이 개별적 존재임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주교의 영혼이 이성과 다른 것처럼, '마음' 또는 '성' 이 갖는 보편적 개념보다 ''혼' 또는 '신' 이 갖는 신앙적 성격을 영혼 개념의 본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는 영혼 불멸설과 더불어 인간 행위의 선악에 대하여 주재자인 하느님의 심판에 따르는 상벌로서의 천당 지옥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벌은 사후에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신앙적인 확신이다. 이 확신의 근거에는 영혼이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영혼 불멸설과, 현세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에 따라 행위의 선악에 대하여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의 상벌이 사후에 내려진다는 보응으로서의 천당 지옥설이 놓여 있다. 물론 유교에서도 화복설이 있고 영혼이 하늘에 있다는 의식도 찾아볼 수 있지만, 유교의 화복설은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이치에 순응하는가 거역하는가에 따라 내려지는 윤리적이고 수양론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후의 영혼이 받는 화복이 아니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주역》)는 말에서처럼 후손이 그 화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리치는 자손에게 보응이 내려간다는 유교의 견해를 반박하여, "나는 나이고 자손은 자손이므로 보응이 자손에 내려지는 것은 공변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 넋 ; 불사불멸 ; 삼혼설 ; 혼백)
※ 참고문헌 天主實義》 《靈言蠡勻》 崔東熙,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琴章泰]
영혼
靈魂
〔히〕נֶפֶשׁ · 〔그〕ψυχή · 〔라〕anima · 〔영〕soul
글자 크기
9권

깊은 구렁 속으로 내려간 영혼은 하느님의 전능으로 다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