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함경남도 영흥군 영흥읍 소재. 1931년 11월 덕원(德源)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 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 5월 폐쇄되었다. 주보는 성 요셉. 〔교 세〕 1931년 60여 명, 1935년 1,0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히머(K. Hiemer, 任) 갈리스도(1931. 11~1935. 8), 2대 슈테거(G. Steger, 全) 그레고리오(1935. 8~1949.5).
영흥 지방은 일찍이 1860년대에는 비록 소규모이지 만 산악 지대에서 가톨릭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이후로는 소멸되어 보천교(普天敎) · 정토교(淨 土敎) 등 여러 신흥 종교들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 하지 만 그 후 덕원 수도원의 활동을 통해 가톨릭 신앙이 다시 전파되었으며, 신부들이 영흥 지방으로 오기 이전에 주 민 가운데에서는 벌써 교리 문답을 배우고 있었던 사람 들도 있었다.
1930년 가을, 대지를 매입하여 이듬해 11월에 공식 설립된 영흥 본당은 덕원 본당의 첫 번째 자(子) 본당으 로 히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슈테거 신부가 보좌로 부 임하였다. 히머 신부는 공소 방문을 전담하였고, 슈테거 신부는 시내 신자들의 사목과 본당 설립 직후에 개교한 소학교에 전념하였다. 부임 초기에 성당과 사제관은 임 시로 원산 해성학교의 옛 건물을 철거한 자재들로 지었
다. 이후 1932년 말에 새 성당과 사제관이 준공되어 사 우어(B. Sauer, 辛)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 며, 임시로 사용하던 사제관은 학교로 이용되었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은 영흥군과 정평군이었다. 두 신부 의 노력으로 설립 당시 60명에 불과하던 신자수가 1932 년 5월까지 120명의 영세자가 배출되었고, 이듬해 12월 말까지 모두 800명이 영세하여 1935년에는 1천 명이 조금 넘게 되었다. 그리고 사제관에 마련된 학교는 학생 수가 150명으로 제한되었지만 지원자가 많았고, 후에 개교한 야간 학교는 학생수가 300명 정도에 이르게 되 었다. 한편 히머 신부는 1935년부터 흥남 본당과 북청 본당의 신설을 위해 부지를 물색하던 중 그 해 8월 북청 본당이 신설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전임되었고, 슈 테거 신부가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슈테거 신부는 13년 간 재임하면서 교세 신장에 주력하여 인근 지역에 23개에 달하는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35년 8월 17일 원산교구 제1회 가톨릭 소년 운동회에서의 우승을 계기로, 다음해 9월 13일에 가톨릭 소년회를 창립하여 본당 어린이들의 신앙 생활과 외교인 어린이들의 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8 · 15 광복 후 북한 공산 정 권의 탄압으로 1949년 5월 9일 사우어 주교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로트(L. Roth, 洪) 신부 · 부원장 슐 라이허(A. Schleicher, 安) 신부 덕원 신학교 교수 클링사 이즈(R. Klingseis, 吉) 신부 등이 체포된 데 이어 슈테거 신부도 5월 11일에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침묵 의 교회가 되었다. 슈테거 신부는 체포된 이듬해인 1950년 10월 3일 평양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 덕원 본당 ; 침묵의 교회 ; 함흥교구)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白秉根]
영흥 본당
永興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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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