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성인. 성서학자이며 수덕가. 라틴어역 성서인 불 가타(Vulgata)의 번역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중 한 사 람. 교회 학자. '신학교 수호 성인' 또는 '수덕 생활의 수호 성인' 이다. 축일은 9월 30일.
[생 애] 예로니모는 347년경 북부 이탈리아 아퀼레이 아(Aquileia) 근처에 있는 스트리도니아(Stridonia)의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로마에 가서 도나투스 (Aelius Donatus, 4세기)라는 유명한 학자로부터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여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 때 리베리오 교황(352~366)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에 정착하여 정부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 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 이아로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 생활을 시작 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160~223) · 치프리아노 (?~258) · 힐라리오(315?~367?) 등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안티오키아에 머물면 서 라오디체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Laodicensis, 315?~392?)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 부하였다. 그 후 그는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새로 공부했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 로 대립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79년 안티오 키아에 갔을 때,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 로 바울리노 주교(360~388)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치 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 389/390) 의 강의를 듣고 오리제네스(Origenes, ?~254)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 nus, 335?~395?)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 리제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 역하기 시작하였다.
예로니모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다마소 1세 교황 (366~384)은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 · 구약 성서 모두 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 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 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한편 예로니 모는 마르첼라(325/335~410/411)와 바울라(347~404) 등이 주축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 생 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그의 재능 을 시기한 일부 적대자들이 여자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로마 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 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 자 귀족 부인 바울라가 따라와서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예로니모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맡았다. 그 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저술과 번역 활동 에 몰두했다. 그 사이에 그는 전 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리제네스주의 논쟁에 휘말렸다. 예로니모는 오리제네 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나, 후에 반대자의 입장에 섰다. 또한 그는 394년부터 히포의 아우구스티노(Augus- tinus Hipponensis, 354~430)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펠라지 우스주의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 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 하고 칭송하였다.
410년 8월 24일에 로마가 알라리크(Alaric, 370?~410) 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더 구나 416년 펠라지우스주의자인 폭도들이 수도원에 난 입하자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베들레헴의 수도 원들은 그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말년에 이런 수난을 겪은 예로니모는 419년 9월 30일에 베들레헴의 수도원 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 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
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저 서] 그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는데, 미뉴(J.P. Migne, 1800~1875)의 《라틴 교부 선집》(PL) 제22~30권 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 석서 · 성서 번역서 · 교의 신학서 · 이단 논쟁서 · 수덕 신학서 · 역사서 · 강론 · 서간 등 다양하다.
성서 라틴어 번역 및 성서 본문 연구 : 다마소 1세 교 황이 예로니모에게 맡겼던 과업은 신 · 구약 성서의 본문 비판을 하면서 완벽한 새 라틴어 역본을 만드는 것이었 다. 그는 로마에서부터 신 · 구약 성서의 본문 연구와 함 께 라틴어 번역을 여러 차례 하였었다. 391년부터는 신 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 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이 새로운 본문 비판과 번역은 406년까지 계속된 엄청 난 작업이었다. 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 (Vulgata : '대중적' 이란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 니모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예로니모 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 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 기 때문이다.
성서 주석서들 : 예로니모는 위대한 그리스 교부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 외에도 많은 성서 주석 서를 저술하였다. 구약성서의 《시편 주석》 · 《전도서 주 석》, 모든 예언서에 관한 주석들,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 태오 복음 주석》 · 《필립비서 주석》 · 《갈라디아서 주 석》 · 《에페소서 주석》 · 《디도서 주석》 · 《요한 묵시록 주 석》 등이 있다.
강론 및 서간 : 시편에 관한 73개 강론 · 이사야서에 관한 2개 강론 · 마르코 복음에 관한 10개 강론 · 그 외 다른 성서 대목들에 관한 10개 강론들이 전해 오고 있 다. 이 강론들은 대부분 베들레헴 수도 공동체에 한 강론
들로서 공현 대축일 · 사순 시기 · 부활 대축일 등에 관한 전례적 강론이거나 덕행을 고취시키는 강론들이다. 한편 그의 서간집에는 154개의 서간이 수록되어 있으며, 122 개는 예로니모가 쓴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교의적 · 논쟁적 저서들 : 예로니모는 수도 생활 동정 성 · 마리아 공경 · 선행 등에 대한 이단을 논박하고 교리 상의 문제들을 설파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루치페루스파와 정통파의 논쟁》(Altercatio Luciferiani et Orthodixi, 382) ·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 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Adversus Helvidium de per- petua virginitate b. Mariae, 383) · 《요비아누스 논박》(Adver- sus Jovianum), 《비질란티우스 논박》(Contra Vigilantium, 406) 등이 있다. 오리제네스주의 논쟁과 관련된 저서는 《예루살렘의 요한 주교 논박》(Contra Joannem Hierosoly- mitanum) · 《루피누스 논박》(Apologia adversus libros Rufini) 등이 있고, 펠라지우스주의 이단 논쟁에 관련된 저서는 《펠라지우스주의자 논박》(Dialogus adversus Pelagianos, 415) 이 있다.
역사서와 전기들 :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 393)에는 135명의 그리스도교 저술가 내지 그리스도교와 연관된 저술가들, 즉 베드로 사도부터 예로니모 자신까지 언급 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의 <교회사)(ἐκκλησιαστική ἱστορία)를 참 조하였지만, 그 이후의 저술가들 특히 라틴 저술가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사료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어 교회사적 으로 귀중한 저서이다. 한편 예로니모는 사막 은수자들 의 전기를 세 개 남겼는데, 《성 바오로 전기》(Vita Sancti Pauli) · 《성 힐라리온 전기》(Vita Sancti Hilarionis) · 《말코 전기》(Vita Malchi monachi captivi) 등이 있다.
번역서 : 예로니모는 실로 엄청난 양의 번역을 하였 다. 그는 오리제네스주의 논쟁이 생기기 전까지 오리제 네스를 성서 주석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많이 번역하였다. 오리제네스의 예레미야 예언서에 관한 14개 강론 · 에제 키엘서 예언서에 관한 14개 강론 · 아가서에 관한 2개 강론 · 루가 복음에 관한 39개 강론 · 이사야 예언서에 관한 8개 강론 · 《원리론》 등을 번역하였다. 또 그는 에 우세비오의 《연대기》(χρονικά)를 번역하면서, 303~ 378년까지의 그리스도교 라틴 저술가들의 저서와 역사 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에우세비오의 《명칭록》(Onoma- ticon)을 번역하였고, 또 디디모(Didymus Caecus, 3137~395/ 399?)의 《성령론》(De Spiritu Sancto)을 번역하였는데, 그 리스어 원문이 상실되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이 라틴 어 번역이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또 성서에 나오는 이름 들을 그리스어 알파벳 순에 따라 영적으로 해설한 《히브 리 이름 해설집》(Liber interpretationis hebraicarum nominum) 을 번역하였다. 그 외 그는 파코미오 공동체의 책임자들 이었던 파코미오 · 테오도로 · 오르시에시의 규칙서 · 교 리서 · 서간 등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주장과 가르침〕 예로니모는 사변 신학에 대해서는 별
로 관심을 갖지 않고 주로 실천 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그는 순전히 철학적인 논리 전개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대신 성서 · 성전 · 전례 · 생활 실천 등에 관심을 갖고 거론하였다.
성서는 성령의 감도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 그 는 성서 주석을 하던 초기에는 은유적 주석 방법을 선호 하였지만, 언어학적 연구를 한 다음부터는 성서의 본문 과 역사적 관점을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 방법으로 바뀌 어 갔다. 그렇지만 은유적 주석 방법을 완전히 멀리하지 는 않았다. 그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우스 운 내용이나 모독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다고 한 오리제 네스의 주장에 동감하였다. 예로니모는 성서 본문의 말 마디가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성령의 감도에 따라 쓰여졌기 때문에 성서의 절대적인 무류성' 을 주장하였다. 예로니모 역시 당시의 통념에 따라 구약 의 그리스어역인 《칠십인역》이 성령의 감도에 의해 이루 어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유대 전통에 영향을 받아 구 약성서의 제1 경전만을 성서로 받아들였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 : 예로니모는 인간 의 자유와 하느님의 은총이 모두 인간 구원에 필요한 요 소라고 주장하였다. 은총과 자유 의지의 문제는 특별히 펠라지우스주의 이단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거론 되었었다. 열심한 수도자였던 펠라지우스(Pelagius, 350?~ 425?)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 없이도 자유 의지 를 잘 사용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 다. 반면, 예로니모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게 살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어느 때에만 죄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 짓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하느님으로 만드 는 것과 같다(《펠라지우스주의자 논박》 2, 4)는 것이다. 하 느님의 계명들은 아무런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펠 라지우스주의의 주장에 대해 예로니모는 "하느님은 분명 히 가능한 것들만 명하시지만, 우리 각자에게 이 모든 것 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펠라지우스주의자 논박》 1, 23)라 고 반박하였다.
교회론과 로마 교회의 수위권 : 이전의 어느 교부도 예 로니모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교부는 없다. 그는 교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며, 교 회의 적대자들을 마치 자신의 원수처럼 여길 정도였다. 교회의 가르침은 그에게 신앙의 귀중한 원천이 되며, 교 회들간에 대립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늘 로마 교회 편 에 섰다.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에게 "저는 그리스도 외 에는 어떤 것에도 우선적으로 따르지 않을 때, 복되신 당 신, 즉 베드로의 교회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 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서간 15, 2). 한편 예로니모는 그 당시 대부분의 교부들과 달리 주교권이 신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들이 내적 분열에 떨어질 위험 을 막기 위해 교회의 법으로 제정된 것이라는 견해를 갖 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교들만이 서품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는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서간 41, 3). (→ 라틴어역 성서)
※ 참고문헌 《PL》 22~30/ 《CCL》 72~781 《CSEL》 49. 54/ F. Cavallera, S. Jérome, Louvain, 1922/ F.X. Murphy, A Momument to St. Jerome. Essay on Some AspectsofHis Life, Work and Influence, New York, 1952/ J. Steinmann, Hieronymus, Ausleger del Bibel, Köln, 1961/ P. Antin, Recueil sur saint Jérome, Bruxelles, 1968/ J.N.D. Kelly, Jerome, His Life, Writings and Controversies, London, 1975. 〔李瀅禹〕
예로니모 (347~419)
Hieronyus
글자 크기
9권

불가타의 번역자인 성 예로니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