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에 이스라엘이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 중동 의 고도(古都). 유대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의 주요 성 지 중 하나.
I . 지명과 지리적 배경
[지 명] 고대 근동의 역사 기록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900년경 기록된 이집트 저주 문서에서이다.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은 저주 문서에 나타난 상형 문자 표기인 '아우샤멤' 을 예 루살렘으로 보고 있다. 이 단어에는 도시를 나타내는 한 정사 대신 지역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어서 이집트인들은 예루살렘을 지역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문서에는 아카드어로 '우루 살림' (Urusalim)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기원전 701
년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기원전 704~681)의 침공 기록 에는 '우르살리무' (Ursalimmu)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지 명 '예루샬라임' (יְרוּשָׁלַיִם)은 우가리트 신화에 등장하는 새벽과 여명의 신, 살렘(Shalem)과 관계가 있으며 '살렘 신의 기초'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윗 이전 시대에 예 루살렘이 여부스(Jebus)로 불렸다는 주장은 이집트 및 고 대 근동의 자료에 이 지명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근거 가 희박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졌으 며, 아마도 이 도시에 여부스라는 민족이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칠십인 역에서 예 루살렘의 그리스어 표기인 '히에로솔뤼마' (Ἱεροσόλυμα) 는 히브리어 지명의 음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도시의 '거룩함' (히에로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 배경]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중앙 산악 지대의 분수령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 인 산악 요새로 개발되었다. 예루살렘은 연중 강수량이 500mm 정도로 겨울 곡식인 밀이나 보리를 충분히 경작 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밀, 보리를 재배 할 만한 골짜기 평야는 북쪽과 서쪽으로 수km 떨어진 곳 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항상 인근 지역을 통치해야 만 식량 자급이 가능하였다. 비록 동쪽으로는 유대 광야 가 이어지지만 북쪽의 베냐민 산지, 남쪽의 베들레헴, 그 리고 서쪽의 쉐펠라 등 예루살렘은 농사와 목축이 가능 한 살기 좋은 지역에 속해 있다. 다윗 성이라 불리는 최
초의 예루살렘은 키드론 골짜기 서쪽의 해발 700m 높이 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솔로몬이 건설한 성전은 해발 743m의 완만한 봉우리에 위치해 있으며, 히즈키야 시대 부터 확장된 서쪽 언덕은 해발 773m에 달한다. 예루살 렘의 지리적 위치의 결정 요인은 키드론 골짜기에 위치 한 기혼 샘이다. 해발 645m 지점에 위치한 기혼 샘은 석 회암 지역의 바위 굴속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전형적인 카르스트 샘으로써 계절에 따라 하루에 200~1,000㎥ 의 물이 솟아 나온다.
다윗 성은 북쪽의 성전 산 부분을 제외하고는 동쪽의 키드론 골짜기와 서쪽의 티로포에온 골짜기, 그리고 남 쪽의 힌놈 골짜기 등 삼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힌놈 골짜기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야채 농사가 가능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 루살렘 주변의 산지에서는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의 과 수원이 발달했었다. 구약 시대 예루살렘의 경제는 성전 세 수입, 목축, 과수업 등에 기반을 두었으며, 신약 시대 에는 여기에 절기마다 찾아오는 수많은 해외 순례자들의 체류에 따른 숙박업과 그들의 투자가 첨가되었다.
II . 역사적 변천
[가나안 시대(청동기 시대)]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다윗 성 지역에서만 동석기 시대부터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에 달하는 주거층이 드러 났다. 예루살렘 최초의 주거 흔적은 다윗 성 지역의 바위 틈에서 발견되었는데, 동석기 시대인 기원전 3500년경 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본격적인 건물이 들어선 것은 기 원전 3300년경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이며, 이 시대의 무덤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성벽 이 건설되어 본격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춘 때는 중기 청 동기 시대인 기원전 1800년경부터이다 중기 청동기 시 대의 특징적인 키클로포스 양식의 이 성벽은 길이 1m가 넘는 큰 바위를 이용해서 기초를 쌓았으며, 성벽의 두께 는 평균 2.5m에 달한다. 다윗 성에서 기혼 샘으로 통하 는 소위 '수문' 근처에는 망대의 기능을 위해 보강된 부 분이 있다. 기원전 16세기의 예루살렘 주거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올리브 산에 있는 도미누스 플레빗 (Dominus Flevit) 성당 내에서 발굴된 수십 기의 무덤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기원전 14세기부터 예루살렘은 동 쪽과 서쪽의 골짜기 부분에 대규모 축대를 쌓아 면적을 넓히는 등 매우 중요한 요새로 건설되었다. 당시 이 도시 의 중요성은 예루살렘의 왕 아브디-헤파가 이집트의 파 라오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Ⅲ, 기원전 1390~1356)와 4세(Akhenaten, 기원전 1356~1340)에게 보낸 6통의 아마 르나 문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철기 I 시대에 예 루살렘은 이스라엘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소 규모의 촌락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건물들의 흔적은 거 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 시 이곳은 견고한 시온 성으로 불려졌고, 난공불락의 요 새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2사무 5, 6-7) 고고학적 발굴
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철기 I 시대의 축대 등이 발견되 었다. 다윗이 점령하기 전 이 도시의 넓이는 48,000㎡ 에 인구는 1,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왕정 시대(철기 Ⅱ시대)] 다윗 왕(기원전 1010~970)은 기원전 100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 로 삼았다. 예루살렘은 어느 지파도 점령하지 못했던 중 립적인 도시였고, 계약의 궤를 안치함으로써 실로를 대 신하는 종교적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에는 본 격적인 왕궁과 신전 등이 건설되었다. 특별히 이곳에서 발견된 프로토-에올리아 양식의 기둥 머리는 사마리아, 므기또, 하솔, 라맛-락헬에서 출토된 것과 마찬가지로 왕궁 건축에만 사용되는 장식이었다. 다윗 시대에 예루 살렘은 북쪽의 상부 도시와 남쪽의 하부 도시로 구분되 었다. 상부 도시는 왕궁과 창고를 지닌 요새, 즉 '다윗 성' 으로 불렸으며, 하부 도시는 일반 주거지로 개발되었 다. 다윗 성은 역대기에서 오벨 요새로 표현되기도 한다 (2역대 27, 3 : 33, 14). 다윗 시대 예루살렘의 면적은 6만 ㎡에 인구는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솔로몬 시대에 다윗 성 북쪽의 바위 언덕에 성전이 세 워지면서 그 사이의 낮은 부분을 채웠고 이를 밀로라고 불렀다. 고고학자 마잘(E. Mazar)이 1980년대 후반에 발 굴한 두께가 1.4m에 달하는 성문 구조는 다윗 성에서 성 전으로 올라가는 성문인 동시에 밀로 궁의 한 부분일 가 능성도 있다(1열왕 9, 15).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면적
은 13만 ㎡에 인구는 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솔로몬 성전 : 솔로몬(기원전 972~933)은 통치 4년부 터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과 궁전 및 성전 등의 건축 사업을 위하여 노동 력은 부역을 동원시켰고, 필요한 목재와 기술은 페니키 아의 띠로 왕 히람과 구상 무역을 통하여 충당하였다. 당 시 레바논의 송백나무와 전나무 등의 목재는 바다에서 뗏목으로 이동되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 파(Joppa) 북부의 야르콘 강으로 운반되었다. 이곳에서 부터는 소나 당나귀 등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의 건설 현 장까지 운반되었다. 목재와 기술 지원의 대가로 솔로몬 은 해마다 엄청난 양의 밀(2만 코르)과 기름(20코르)을 제 공하였다. 또한 솔로몬은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 하여 부역을 3만 명이나 소집하여서 한 달에 1만 명씩 번갈아 가며 레바논의 벌목 현장에 투입시켰다. 솔로몬 은 필요한 금을 히람을 통하여 120키카르(5톤)를 제공받 았는데, 이는 페니키아 해운 회사들이 해상 무역을 통해 확보한 것이었다. 솔로몬이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히람에게 건네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솔로몬이 약속한 대가를 제때에 충분히 지불하지 못했거나 해가 거듭할수 록 히람의 요구 조건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국 가 사이의 구상 무역은 성전과 왕궁의 공사 기간인 20년 정도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1열왕 9, 10). 솔로몬 성전 은 가나안의 전통적인 긴 방(long-room) 구조로 길이가 60암마(30m)에 폭이 20암마(10m)정도였다. 솔로몬 성
전 터에는 오늘날 이슬람의 엘 악사 모스크(El Aqsa Mos- que)가 위치해 있어서 발굴을 시도할 수는 없지만, 시리 아에서 발견된 아인 다라 신전과 텔 타이낫의 신전이 가 장 유사한 구조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언어학 자인 르메르(A. Lemaire)는 1979년 한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한 높이 4cm 직경 2cm인 상아 석류의 어깨 부분에 서 "거룩한 야훼 성전의 제사장들의 것" 이라는 고대 히 브리어 글귀를 확인하고 글자체를 통해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판명하였다. 비록 문장의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그 공백의 길이는 야훼라는 히브리어 네 글자가 들어갈 정도라고 추정하였다. 다른 지역의 신전 발굴에서 출토 된 비슷한 유물들을 근거로 이 석류 장식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손에 쥐고 다니는 지팡이의 머 리 부분에 해당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솔로몬 성전의 유 일한 유물로 여겨진다.
남부 유대 왕국의 아자리야(기원전 781~740)와 요담 (기원전 740~735) 왕 시대에 예루살렘의 성벽이 보강되 고 성문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 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 이 남부 유대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예루살렘도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기 위해 서쪽으로 그 면적을 확장시켰다. 당시 예루살렘의 면적은 50만 ㎡ 에 인구는 2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히즈키야(기원전 716~687)는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 벽을 보강하고 장기간 포위에 대비하여 지하 급수 시설
을 완비하였다. 서쪽 언덕에서 히즈키야 시대에 건설된 두께가 7m인 성벽이 65m에 걸쳐서 발견되었으며, 발굴 자 아비가드(N. Avigad)는 이를 '넓은 성벽' (broad wall)이 라고 명명하였다. 다윗 성의 G 구역' 에 위치한 공문서 보관소로 보이는 방에서는 51개에 달하는 불라(도장 자 국)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는 '사반의 아들 그마리야' 라는 이름도 있어서 왕정 시대 인물의 역사성을 확인하 게 되었다(예레 36, 11).
지하 급수 시설 : 예루살렘의 지하 급수 시설은 유일 한 수원지인 키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의 물을 최대한 효 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워런 수직 통로, 실로 암 수로, 그리고 히즈키야 터널 등 모두 3종류가 있다. 워런 수직 통로는 1867년 예루살렘 탐사 임무를 수행하 던 영국 공병대의 워런(C. Warren)이 처음 발견했다. 전 체 구조는 지상에서 54m 길이의 경사진 터널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간 다음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12.3m 높이의 수직 통로는 기혼 샘의 물길과 연결되어 있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워런 수직 통로는 원래 파여 진 자연 동굴과 바위 틈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 다. 성서학자들은 워런 수직 통로가 요압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타고 올라갔던 '지하 수로'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2사무 5, 8 : 1역대 11, 6). 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므기또 · 하솔 · 게셀 · 기브온 · 이블르암)의 경우처럼 워런 수직 통로는 다윗 시대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 다.
실로암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저지대의 힌놈 골짜기 에 저장하기 위해서 건설된 400m 길이의 수로이다. 실 로암은 본래 히브리어 '쉴로흐' (שִׁלוֹחַ)의 그리스어 음역 으로, 물을 '흘려 보낸다 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실로암 수로 가운데 일부는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로의 중간 부분에는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근처의 밭으로 물이 공급되도록 하였다. 실로암 수로의 단점은 바로 이 수로가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전 시에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당할 경우 물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히즈키야는 기혼 샘의 물을 성안의 실로암 저 수장까지 흐르도록 바위를 파서 터널을 만들었다. 히즈 키야 터널의 전체 길이는 525m인 데 비해서 터널 양쪽 끝의 고저 차이는 겨우 32cm로써 기울기가 0.06%에 달 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시공되었다. 히즈키야 터널은 특히 실로암 저수장 부분에서 발견된 히즈키야 비문을 통해서 오늘날의 터널 공사와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파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섯 줄에 총 200글자 중에서 177글자만 보존된 이 비문은 양쪽에서 파 들어 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 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3암마(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 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 혔다. 물은 샘으로부터 ,200암마(525m)를 흘러나왔 다." 그런데 문제는 기혼 샘과 실로암 저수장 사이의 직 선거리가 315m에 불과한데, 적들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525m나 되는 구불거리는 터널을 어떻게 건설 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히즈키야 터 널은 이미 파여져 물이 흐르는 바위 틈새를 따라 건설되 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터 널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정확 하게 중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기원전 598~597) 시대에 바빌 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성전의 보물을 탈취 했다. 그리고 왕족과 군인, 기술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 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기원전 587년 시드키야 9년에 바빌로니아 군대는 18개월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함 락하였다. 당시 느부갓네살의 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성벽을 무 너뜨리고 성전과 왕궁 등을 불태우는 등 도시를 조직적 으로 파괴시켰다(2열왕 25, 8-10).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 해 파괴된 흔적은 예루살렘의 여러 발굴 지역에서 뚜렷 하게 드러난다. 특히 오늘날 유대인 구역의 소위 '이스 라엘 망대' 에서는 화살촉이 발견된 두껍게 쌓인 파괴 층 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기록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되는 유다 왕들의 무덤은 예루살렘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스라엘 고고학자들은 19세기에 처음 발견된 예루살렘 옛 성 북쪽에 위치한 한 묘지를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여 기고 있다. 이 무덤은 '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 (L'École Biblique et Archéologique Française)로 더 잘 알려진 성 스테 파노 수도원 구내에 있다. 1885년에 이 무덤이 처음으 로 발견되었을 때는 단지 신약 시대의 무덤 정도로만 알 려졌다. 하지만 바르카이(G. Barkay)와 클로네르(A. Klo- ner)가 1970년대에 재발굴한 이 가족 무덤은 전형적인 기원전 8~7세기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무덤은 다섯 평 정도의 전실을 중심으로 일곱 개의 매장실이 둘러져 있고 한꺼번에 20여 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큰 규 모였다. 시신 안치대 밑에는 네 개의 유골 보관소가 별도 로 마련되어 있었다. 유골을 한군데 보관하는 풍습은 고 대 이스라엘의 바위 굴 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족 무덤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시신 들이 안장되었기에 안치대에 있던 기존의 유골을 그 밑 에 파 놓은 유골 보관소에 담아 놓아서 새로운 자리를 마 련하게 된다. 이는 바로 "왕은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 다"는 열왕기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좋은 예이다. 열왕 기서에는 다윗부터 아하즈(Ahaz, 기원전 735~716?) 왕까 지는 다윗 성안에 묻혔고 그 이후의 왕들은 성밖에 장사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다윗 성에는 여러 채의 집 들이 있어서 발굴할 수 없기 때문에 다윗 왕의 무덤은 앞 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 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 빙성이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 시대] 70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바 빌론으로부터 돌아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윗 성에 정착 하였다. 페르시아 시대에 유다 지방은 '예후드' (יְהוּד)라 불리는 '에베르 나하르' 주의 한 식민지였다. 유다의 총
독 즈루빠벨과 예수아의 지휘 아래 유다의 장로들은 기 원전 520년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고, 예언자 하깨와 즈 가리야의 격려에 힘입어 기원전 515년에 준공하였다(에 즈 5, 2 : 6, 14). 기원전 445년에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 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벽을 재건하였는데, 당시의 성벽이 다윗 성 발굴에서 부분적으로만 확인된 바 있다. 느헤미야 시대 예루살렘의 면적은 솔로몬 시대 와 비슷한 12만 ㎡에 인구는 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스 시대] 기원전 32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 로스(기원전 336~323)가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한 후 예루살렘은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 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약 1세기 동안 비교적 평화 로운 시대를 지낼 수 있었다. 기원전 200년경 이후 예루 살렘이 셀레우코스 왕조에게로 넘어가면서 예루살렘은 본격적인 그리스식 도시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기원전 223~187)가 기원전 198년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5세(기원전 204~180)를 물리치고 유다 지방을 차지한 후, 예루살렘 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로 개명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의 대 사제 야손(Jason)은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체육관과 청년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2마카 4, 9). 이때부터 예 루살렘에는 그리스식 성향에 익숙한 상류층의 친그리스 파와 서민 중심의 반그리스파 사이의 갈등이 싹트기 시 작하였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 원정에 실패 하고 돌아오던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성전의 보물을 약 탈하였다. 이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한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 '아크라' (Acra)라 불리는 요새를 건설 하였다. 기원전 166년부터 시작된 마카베오가 독립 전 쟁은 기원전 164년 성전을 정화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 만, 그리스 용병들의 아크라 요새는 기원전 141년에야 비로소 유대인들에게 점령되었다. 마카베오의 후계자들 인 하스모네 왕조의 왕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강하였 고, 특히 알렉산더 얀나이(기원전 103~76)는 북쪽에 새로 운 주거지를 만들고 제2 성벽을 건설하여 이 구역을 보 호하였다. 예루살렘 주민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남쪽 의 베들레헴 산지로부터 물을 끌어오는 새로운 수로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하스모네 왕조 시대에 예루살렘 의 면적은 66만 ㎡에 인구는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3개월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신약 시대] 신약 시대의 예루살렘은 새로운 정권 교 체와 함께 시작된 로마 제국의 영향과 로마의 후광으로 정권을 잡은 헤로데 왕조의 경제 부흥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는 헤로데에 의해 성벽이 조직적으로 보 강되고 새로운 귀족들의 주거지가 상부 도시에 건설되는 등 도시 문명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당시 예루살렘의 중심부는 오늘날 유대인 구역이 있는 상부 도시로서 발
굴 결과 화려한 장식의 귀족 저택들이 여러 채 발견되었 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른 정결 예식을 위한 미크베 목 욕탕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으며, 집 바닥이 아 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지만 율법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헤로데 시대 예루살렘 은 90만 ㎡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4만 명 정도로 추산된 다.
헤로데 성전 : 기원전 37년에 왕이 된 헤로데(기원전 37~4)는 기존의 성전을 헐고 대규모의 새로운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탈무드에도 "헤로데의 성전을 보지 못한 자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보지 못한 자이다" 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당시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건축계 에서도 예루살렘의 헤로데 성전은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 로 인정되었다. 헤로데는 기원전 20년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0년 후에 준공시켰지만 종합적인 성전 단지 건설은 8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비록 서기 70년 로 마 군대의 조직적인 파괴로 신약 시대 성전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성전을 세우기 위해 넓혔던 성전 터와 이를 받치고 있는 축대는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헤로데는 북쪽의 솟아난 바위 를 깎고 남쪽의 골짜기에는 축대를 쌓아 남북 길이가 485m, 동서의 폭이 315m로 총 면적이 14만 4천 ㎡에 달하는 성전 터를 만들었다. 성전 터의 남쪽에는 일반인 들의 성전 출입구 역할을 하는 두 겹 문과 세 겹 문이 있 다. 당시 성전 순례자들은 이 문들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 면 계단식 지하 터널을 통해 15m 상부에 위치한 성전 뜰 로 나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서쪽 축대에는 성전 뜰로 향하는 육교를 받치는 아치(arch)의 흔적이 두 군데서 발 견되었고 처음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각각 로빈슨 아치 와 윌슨 아치로 불린다. 또한 로빈슨 아치 북쪽에는 발견 자의 이름을 딴 바클리 문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 다. 헤로데 성전의 서쪽 축대 일부는 오늘날 전세계 유대 인들의 최고 성지인 코텔(Kotel, 통곡의 벽)로 활용되고 있 다. 성전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느헤미야 시대부터 '비 라' 라 불리는 요새가 있었으며, 그리스 시대의 '아크라' 를 거쳐 헤로데 시대에는 안토니아 요새가 건설되었다. 동쪽 축대 중 남쪽 모퉁이에서 32m 떨어진 지점에는 각 각 다른 공법의 축대가 만나는 이음새가 있어서 북쪽 부 분은 헤로데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까지 헤로데 성전 건물 자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 만 대략 오늘날 이슬람의 엘 악사 모스크 안에 있는 바위 의 돔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로마 제국 시대] 서기 70년 로마 10군단의 티투스 장 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헤로데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나아가 다시는 유대인 저항군들이 요새화된 성전 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성전 뜰을 둘러싸고 있는 모 든 성벽을 무너뜨렸다. 1967년 이후의 발굴을 통하여 성전 뜰의 서쪽 축대 바깥 아래쪽에서 30미터 높이에서 굴러 떨어진 잘 다듬은 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10군단 은 헤로데 궁전 자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상부 도시 지역 을 차지했다. 70년 이후의 예루살렘은 상부 도시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했던 로마 10군단의 영향 아래 있 었다.
엘리아 카피톨리나 : 130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하드 리아누스 황제(117~138)는 파괴된 도시를 새로운 모습으 로 재건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131년에는 할례, 토라 연구, 안식일 등 전통적인 유대교의 의식을 법으로 금지 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BarKokhba)를 중 심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유대 지방 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과 로마의 신전 언덕의 이름을 따서 엘리아 카피톨 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의 구 체적인 모습은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서기 6세기 에 제작된 모자이크 지도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예루살 렘의 북쪽 성벽에 위치한 다마스커스 성문은 당시의 대 표적인 세 겹 아치 성문으로써 중앙의 문이 양쪽보다 큰 형태로 건설되었다. 다마스커스 성문의 동쪽 아래 부분 에서는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세겹의 성문 중에서 동쪽 의 작은 문이 발굴되었다. 엘리아 카피톨리나에는 원칙 적으로 성벽이 건설되지 않았다. 아마도 반란을 일으키 지 못하게 하려는 대비책이라고 추정된다. 다마스커스 성문 안쪽에는 직경 120m 규모의 반원형 광장이 만들어 졌고, 한가운데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석상이 받쳐진 기둥이 세워졌다. 당시 대표적인 로마식 도시는 남북 대 로인 카르도와 이와 수직으로 교차되는 동서 대로인 데 쿠마누스에 의해 바둑판 모양의 구역으로 나뉘도록 설계 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도 다마스커스 성문 광장에서 부터 카르도가 남쪽으로 450m 길이까지 건설되었다. 카 르도의 남부에는 로마 10군단의 진지가 자리잡고 있었 다. 카르도의 폭은 12m로써 두 대의 마차가 충분히 교차 진행할 수 있는 2차로이며, 양쪽에는 지붕으로 덮인 인 도가 있고 인도 안쪽으로는 상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1976년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자 아비가드(N. Avigad)는 유대인 구역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카르도 중 180m 부 분을 발굴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심 카르도 외에 다마스커스 성문 광 장에서 성전 산과 평행되게 남쪽으로 내려가는 제2의 카 르도도 건설되었다. 새로운 로마식 도시의 중심은 골고 타 언덕으로 정해졌고, 이곳에 주피터와 비너스 신상을 모신 카피톨 신전이 건설되었다. 신전의 남쪽에는 남북 의 길이 250m, 동서의 폭 150m 규모의 포룸 광장이 만 들어졌다. 로마식 도시의 포룸은 그리스식 도시의 시장 터이자 중심 광장인 아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곳이다. 포룸의 동쪽으로는 카르도가, 그리고 남쪽에는 데쿠마누 스가 각각 지나갔다. 이 중앙 포룸은 오늘날 성묘 성당 근처에 위치한 무리스탄 광장에 해당된다. 중앙 포룸 외 에 성전 산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 터에 동서의 길이 130m, 남북의 폭 90m 규모의 동부 포룸이 건설되었다. 이 중 일부분은 오늘날 시온 수녀원 지하에 위치한 리 토스트로토스 로서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가 재판을 받았 다는 빌라도의 법정 광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시로 신약 시대에 건설된 '참새의 저수장' 을 아치 구조로 덮은 다음 박석
을 깔아 만든 동부 포룸의 일부 분으로 밝혀졌다. 동부 포룸의 서쪽 입구에는 세 겹의 승리 아 치가 건설되었고 이 가운데에서 중앙의 것은 오늘날 사자문에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 자취를 찾 아볼 수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 교 전승에서 이 아치는 요한 복 음서 19장 5절에 근거하여 에 체 호모(Ecce, Homo : "자, 이 사람 이다" 라는 의미) 아치로 불려진 다. 헤로데가 건설하였던 성전 터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138~161)의 석상이 각각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어떤 형 태로든지 이곳에서 황제 숭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 다.
[비잔틴 시대]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 피톨리나' 에서 이교도적 요소가 배제된 '엘리아' 로 불려 졌으며,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기본적인 도시 구조가 그 대로 유지되었다. 325년에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는 교 구 서열을 모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순위로 규 정하고(6조), 네 번째 교구로 예루살렘을 지정하였다(7 조). 또한 이때 예루살렘의 주교 마카리오(314~33)는 콘 스탄틴 대제(306~337)에게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의 성 지로 재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헬레나 황후는 팔 레스티나를 방문하여 그리스도 생애의 가장 중요한 3대 사건을 기념하여 베들레헴에는 성탄 성당을, 올리브 산 정상에는 엘레오나(올리브 정원) 성당, 그리고 예루살렘 의 골고타에는 예수 부활 기념 성당을 건설하였다. 특히 헬레나는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골고타 자리에 있던 하 드리아누스 시대의 카피톨 신전을 헐었을 때, 골고타 바 위 언덕과 그리스도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두 성 지를 포함하는 대규모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카르도 서쪽에 인접하여 건설되었다. 이 시대의 골고타 성묘 성 당은 동서의 길이가 130m 남북의 폭이 60m에 달하며 카르도 쪽의 입구에서부터 차례대로 아트리움(Atrium) , 순교자 기념 경당(martyrium)이라 불리는 바실리카, 트리 포르티코라 불리는 사각형의 정원, 그리고 무덤 자리에 건설된 부활 돔 등으로 구성되었다. 451년에 개최된 칼 체돈 공의회는 예루살렘 교구를 가이사리아 관구로부터 독립시키고 팔레스티나 지방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리 고 교구 서열을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 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확정 짓고, 로마를 제외한 4개 의 대교구를 총대주교좌(Patriarchatus)라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527~565) 시대에 비잔틴 시 대 예루살렘의 발전이 정점에 달하였다. 당시 건설된 네 아 성당은 본당 건물의 규모만 동서의 길이 120m에 폭 이 50m에 이르는 대규모의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로써
예루살렘의 남쪽 끝 카르도에 인접해 있었다. 오늘날 네 아 성당의 일부는 오물 성문에서 시온 성문에 이르는 성 벽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예루살렘은 전체 길이가 4.5k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 며,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 의하면 모두 20개의 망루가 성벽에 건설되었고 6개의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로마 10군단 진지 때문에 막혔던 카르도는 남쪽으로 연장되었고, 특히 이 중 일부는 오늘날 유대인 구역 내에 서 발굴되어 복원된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비잔틴 시 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파괴를 본보기 로 후세에 남겨 두기 위해 성전 산은 폐허가 된 채로 방 치해 두었다. 이 시대에 예루살렘에 건설된 대표적인 성 당은 성벽 안의 경우 골고타의 예수 부활 기념 성당을 비 롯해 네아 성당, 베데스타의 성 마리아 성당, 거룩한 시 온 성당, 실로암 성당 등이다. 성벽 밖에는 올리브 산 정 상의 승천 성당을 비롯해서 올리브 정원 성당, 도미누스 플레빗 성당, 게쎄마니 성당, 마리아 무덤 성당, 성 스테 파노 성당 등이 건설되었다. 비잔틴 시대 전성기의 예루 살렘의 면적은 180만 ㎡에 달했고 인구는 8만 명 이상 으로 추산된다.
[초기 아랍 시대] 서기 614년 페르시아의 군대가 예 루살렘을 점령하고 수많은 그리스도교 건물들을 파괴하 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 사람 들 손에 죽은 사람수가 66,555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리스도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이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헤 라클리우스 황제(610~641)는 622년 대페르시아 전쟁을 시도하였고, 7년 뒤인 629년 3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 였다. 오늘날 예루살렘의 동쪽 성벽에 막힌 채로 남아 있 는 '황금 성문 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예루살렘 입성 의식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638년 2 월 칼리프 우마르 1세(634~644)가 이끄는 아랍 군대는 다시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이때 많은 신자들이 박해 를 받았고, 그로 인해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았 다. 660년부터는 예루살렘이 다마스커스에 본거지를 둔 우마이야 왕조(660~750)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의 새 로운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은 아 랍어로 '성전 도시' 라는 뜻을 지닌 '일리야 바잇트 알- 막크디스 로 불렸다.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정착 할 수 있게 되었다. 7세기 말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칼리 프 아브드 알 말리크('Abd al-Malik, 685~705)는 엘 악사 사 원과 바위의 돔을 건설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아라비아 반 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로 격 상시켰다. 바위의 돔은 이슬람 전승에서 무함마드(571~ 632)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위의 돔은 본래 헤 라클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와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 교의 승리를 상징하기 위한 팔각형 성당의 기초를 놓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다시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 대에 의해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 기초를 이용해서 688 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691년에 완공되었다. 성전 산 남서쪽 평지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과 관청 건물이
들어섰다. 궁전 2개와 4개의 건물 등 모두 6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우마이야 궁전 단지는 무너진 헤로데 성전과 축대, 그리고 파괴된 성당의 건축 자재를 재사용해서 만 들어졌다. 1054년에 교회가 동서로 나누어질 때 예루살 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입장을 지지하 였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동방 교회가 되었다.
[십자군 시대] 1099년 7월 15일 고드프루아(Godefroi de Bouillon, 1089~1100)가 이끄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 락하고 성내의 무슬림과 유대인을 모두 처치하였다. 유 대인과 무슬림은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 다. 고드프루아는 엘 악사 사원을 자신의 왕궁으로 정하 고 성전 산의 바위의 돔을 '주님의 성전' 으로 바꾸었다. 이때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좌 가 설립되었으나, 예루살렘 왕국이 몰락하면서 이 총대 주교좌도 없어졌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있던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로 피난 가서 살다 가 돌아왔다. 1100년 고드프루아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보두앵 1세(Baudouin I , 1100~1118)가 '예루살렘 왕국' 의 초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궁극적인 목 표였던 골고타의 파괴된 성묘 교회는 1149년에 재건되 었다. 이 공사를 통하여 기존에 분리되었던 골고타 언덕, 그리스도의 무덤, 그리고 헬레나 황후의 십자가 발견 장 소 등이 모두 하나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기존의 비 잔틴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용되었다. 예루살렘의 다른 성당 들도 재건되거나 신축되었다.
1187년 7월 갈릴래아 호수 남쪽의 한 언덕에서 십자 군과 아랍 군대가 일전을 벌였다. 하틴(Hattin) 전투로 알 려진 이 대결에서 살라딘(Saladin, 1169~1193)이 이끄는 아랍 군대는 십자군을 완전히 섬멸시켰다. 같은 해 9월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90년 정도 지속되던 십자군의 예루살렘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이 후 유대인들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 와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일부 유대인들은 살 라딘을 제2의 고레스로 부르기도 하였다. 살라딘은 성전
산을 이슬람교식으로 정화시켰다. 십자군에 의해 각각 성당과 주거지로 활용되었던 바위의 돔과 엘 악사 사원 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아라비 아 반도의 메카나 메디나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슬람의 거룩한 도시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예루살렘의 명칭도 '메디낫트 알-쿳츠' , 즉 '거룩한 도시' 로 불려졌다. 살라 딘의 후계자들은 아읍 왕조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맘루크 시대] 1260년 베스안 근처의 아인 잘루트 전 투에서 맘루크(Mamlūk)인 술탄 바이바르스가 몽골 군대 를 격파함으로써 예루살렘은 약 250년 동안 맘루크 통 치하에 놓였다. 맘루크는 아읍 왕조 시대 이집트에서 활 동하던 터키 출신의 용병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자유민 이 된 후 1250년경부터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기 시작하 였다. 맘루크 통치하인 1334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시 온 산에 성당을 건설하면서 십자군 시대 이후 최초로 예 루살렘에 그리스도교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피렌체 공의 회(1439~1445)가 개최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 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대표자를 보내어 로마 교회와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 아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예 루살렘 총대주교와 로마 교회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15세기 말 스페인에서의 유대인들이 추방당한 후 일 부가 예루살렘으로 이민 와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 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 맘루크 통치자들은 도시 내에 여 러 개의 이슬람 모스크와 마드라사(대학) 등을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종교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500년경 아랍인 역사가 무지르 알 딘은 예루살렘에 44 개의 신학교와 20개의 수피 수도원이 있었다고 기록하 였다. 비록 예루살렘이 종교적 도시로 발전했지만 경제 적으로는 황폐해졌고, 당시의 인구도 10,000명 정도로 줄어들어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오스만 제국 시대] 1516년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맘 루크의 군대를 격파한 오스만 정권은 1917년까지 약
400년 동안 팔레스티나를 통치하였다. 이스탄불의 술탄 슐레이만 1세(1520~1566)는 1537년 성벽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었던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시온 산은 성벽 안에 포함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예루 살렘의 성벽 공사는 1537년에 시작해서 1541년에 완성 되었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 는 7개의 성문이 건설되었다. 슐레이만 1세는 예루살렘 의 부족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원전 2세기 하 스모네 왕조 시대부터 만들어진 수로를 개선시켰다. 베 들레헴 남쪽에 위치한 '솔로몬의 저수장' 에서 물이 흘러 오는 이 수로의 끝 부분, 즉 힌놈 골짜기에 댐을 막아 저 수장을 만들었고 이곳은 오늘날 '술탄의 저수장' 으로 불 린다. 또한 예루살렘에는 '사빌' 이라 불리는 공공 식수 대가 여러 곳에 건설되어서 누구든지 손쉽게 물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팔레스티나는 예루살렘, 가자를 비롯해서 모두 5개의 '산작' 이라 불리는 행정 단 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두가 다마스커스 산작의 지 배하에 있었다. 예루살렘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 문에 오스만 정권은 예루살렘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는 아랍인들 외에도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정착하였다. 유대인들의 숫자는 1,000~1,500명을, 그 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의 경우 1,500~2,000명을 유지하 였다. 19세기에 들어서 러시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 아, 프러시아 등의 대사관이 예루살렘에 개설되면서 유 럽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1838년에 안티오키 아 멜키트 가톨릭 총대주교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겸하면서 이 지역 내에 있는 가톨릭 멜키트 신자들을 관할하게 됐다. 그런데 교황 비오 9세 (1846~1878)는 1847년에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좌를 복구시켜 팔레스티나와 요르단과 키프로스 지역에 있는 신자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1850년대 예루살렘의 인구 는 15,000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유대인들이 절반을 차 지하였다. 18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성 밖 에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이 옛 성을 벗어나 도시의 규모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의 수도]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티나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을 실시하여 유대 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양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 의안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경우 국제적인 중립 지역 이 되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 초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에서의 아랍인들의 테러 행위와 시리아 군대의 진출로 예루살렘은 고립된 도시로 변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예루살렘 을 신생 국가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그 해 7월 서예루살 렘 지역의 아랍인 3만 명이 집을 잃고 동예루살렘으로 피난 갔고, 반대로 예루살렘 옛 성의 유대인 구역에 살던 2000여 명의 유대인들은 서예루살렘으로 피신하였다. 11월 15일 요르단의 아브둘라(Abdullah) 국왕은 콥트 교 회의 대주교에 의해 '예루살렘의 왕' 으로 등극되었다. 12월 13일 요르단 국회는 동예루살렘을 요르단 강 서안
과 함께 요르단 영토에 합병하는 안을 승인하였다. 같은 날 이스라엘은 국방성과 외무성을 제외한 모든 정부 기 관을 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함으로써 한 도시를 둘러싼 두 나라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엔은 결의안 303호를 근거로 예루살렘의 국제 도시적 위상 정립을 위하여 특정 지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이주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양측으로부터 모두 거절당하였다. 이때부 터 예루살렘은 약 20년 동안 동서로 양분된 채로 남아 있었다. 1967년 6월 8일, 6일 전쟁 발발 3일 만에 이스 라엘 군대는 예루살렘 옛 성을 점령하였다. 그 해 6월 28일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 옛 성과 동예루살렘 지 역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합병하는 안을 만장 일치로 통 과시켰다.
Ⅲ . 신학적 의미의 예루살렘
[예루살렘과 구원의 실현]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예루살렘까지 메아리 친다(마르 1, 5). 그 러나 예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곳은 갈릴래아 지 방이며, 처음에는 이 지방에만 국한된다(마르 1, 28. 39).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것은 갈릴래아 마을의 불 신을 겪은 뒤이며(마르 6, 1-6 ; 8, 11-12 : 9, 30), 자신의 수난을 세 번 예고한 후이다. 예루살렘으로 간 목적은 그 곳에서 자신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르 10, 32-34). 그때부터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이 시작된 다. 예수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예견하며(마르 12, 6- 9), 예루살렘이 받을 징벌과 성전 파괴를 예고한다(마르 13, 1-4. 14-20). 그리고 이는 종말적 완성의 서곡이라고 한다(마르 13, 24-27). 그가 죽을 때 성전의 장막이 찢어 졌다는 것(마르 15, 38)은 성전의 신성한 성격이 상실되 었음을 상징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수를 배척한 장 소로 나타난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예수 의 유년 시절부터 반영한다. 이교도인 동방 박사들이 별 의 인도를 받아 구세주인 예수를 찾아와 예배하지만(마 태 2, 1-2. 9-11), 예루살렘에서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성서에 예언된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했고 헤로데는 예수 를 죽일 궁리를 한다(마태 2, 16-18). 구세주의 탄생 소식 으로 예루살렘은 흥분하지만(마태 2, 3) 믿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도인 예루살렘은 베들레헴과 나자렛에 그 영광 을 빼앗긴다. 또한 예수의 공생활 중 적대자를 보낸 곳도 예루살렘이다(마태 15, 1). 그래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 에게 발현하여 그들을 파견한 곳도 갈릴래아이다(마태 28, 7. 16-20).
요한 복음서는 예수가 여러 차례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사실을 전하며, 예수의 활동 대부분을 그곳에서 전개시 킨다. 그리고 예루살렘 백성들의 불신(요한 2, 13-25), 예 수의 기적과 그 기적으로 인한 반대(요한 5장 ; 7-10장) 등을 상세히 서술한다. 예수의 마지막 기적인 라자로의 부활은 당신 구원 사업의 최후 증거로서 예루살렘 밖에
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아채 고 그곳을 떠난다(요한 11, 1-54). 그 후 자신의 때를 성 취하기 위해서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다(요한 12, 27 ; 17, 1). 결국 요한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이상으로 예수에 대한 예루살렘의 배척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루 가 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예수의 생애에서 일어나 는 모든 사건의 귀착점이다. 예수 역시 "예언자가 예루 살렘 밖에서 죽을 수는 없다" (루가 13, 33)고 말한다. 그 래서 예수가 이 도시를 향해 올라간 사실을 특별히 강조 한다(루가 9, 31. 51 : 13, 22 : 17, 11 : 18, 31 : 19, 11). 하지만 예루살렘이 자신의 사명 수행에 반항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더욱 명백 한 말로 이 도시의 멸망을 예고한다(루가 19, 41-44 ; 21, 20-24).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세 상의 종말은 "이방 민족들의 시대"라는 중간 기간으로 분명히 분리된다(루가 21, 24-28).
루가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의 생애에서 수난부터 승천까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지만(루가 24, 36-53 ; 사도 1, 4-13), 또한 이곳에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도들은 복음을 이곳에서 먼저 전하고, 신자들의 공동 체를 설립했다(사도 2-7장). 스테파노의 설교로 박해가 일어났고 공동체의 일부가 분산되지만(사도 8, 1), 복음 은 사마리아(사도 8, 2-40)에서 가이사리아(사도 10장)와 안티오키아(사도 11, 19-26)에까지 확산된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고(사도 9, 30 ; 11, 25-26), 베드로는 출옥한 후 이 도시를 떠난다(사도 12, 17). 이로써 예루살렘은 복음 선교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다.
[지상 예루살렘과 천상 예루살렘] 사도 바오로는 천상 의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약속의 상속자 로 소개하면서 지상 예루살렘은 자신을 박해하지만 천상 의 예루살렘 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한다(갈 라 4, 24-31).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이미 살아 계 신 하느님의 도성인 천상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한다(히브 12, 21-23). 또한 그곳은 하느님의 처소이며, 그리스도의 파견이 완성되는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히브 9, 11-12) 성전이 있다(히브 9, 24). 이 성전이 원형 이고 이 세상의 성전은 그 모형이며(히브 8, 5), 그림자 요, 복사품이고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히브 8, 5 : 10, 1).
요한 묵시록도 같은 묘사를 하면서,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최후 완성에 달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묵시 21, 2-22, 5).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하는 에제키엘서와 이사야서의 구절들이 인용되지만, 지상의 도시 예루살렘 은 그 모습이 이미 사라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천 상에 있는 원형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지상의 교 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신비적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므 로, 이미 그 원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이교도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짓밟히고 있는 거룩한 도시이다(묵시 11, 2). 결국,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지상에 있어 야훼의 거처였던 예루살렘은 상징적인 가치밖에 없다. 새 예루 살렘이 구원된 모든 사람의 참된 고향이며 조국일 뿐이 다. (→ 골고타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성묘 ; 성전 ; 실로암 ; 실로암 비문 ; 십자군 ; 예루살렘 사도 회의 ; 유대교 ; 유대 왕국 ; 이스라엘)
※ 참고문헌 K. Armstrong, Jerusalem : One City, Three Faiths, New York, Ballantine Books, 1996/ N. Avigad, Discovering Jerusalem, Nashville, Thomas Nelson, 1983/ Y. Ben-Arieh, Jerusalem in the Nineteenth Century : The Old City, Jerusalem, Yad Izhak Ben Zvi, 1984/ M. Ben-Dov, In the Shadow of the Temple : The Discovery of Ancient Jerusalem, Jerusalem, Keter, 1982/ A.L. Eckardt ed., Jerusalem City ofthe Ages,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7/ H. Geva ed., Ancient Jerusalem Revealed, Jerusalem,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94/ Jewish Quarter Excavations in the Old City of Jemsalem, Conducted by Nahman Avigad, 1969~1982, Jerusalem, Israel Exploration Society, 2000/ J. Jeremias, Jerusalem zur Zeit Jesu : kulturgeschichtliche Untersuchung zur neutestamentlichen Zeitgeschicht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23/ Jerusalem in the Time ofJesus, tr. by F.H. Cave · C.H. Cave, London, SCM Press, 1969/ K.M. Kenyon, Jerusalem : Excavating 3000 Years of History, London, Thames and Hudson, 1967/ Digging Up Jerusalem, London, Emest Benn, 1974/ P.J. King, 《ABD》 3, pp. 747~7661 T. Kollek . M. Pearlman, Jerusalem : Sacred City ofMankind : A History of Forty Centuries, Jerusalem, Steimatzky, 1968/ W.H. Mare, The Archaeology ofthe Jerusalem Area, Grand Rapids: Baker, 1987/ F.E. Peters, Jerusalem The Holy City in the Eyes of Chroniclers, Visitors, Pilgrims, and Prophets from the Days ofAbraham to the Begimingss of Modem Tim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H. Shanks, The City ofDavid : A Guide to Biblical Jerusalem, Washington,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1973/ Jerusalem : An Archaeological Biography, New York, Random House, 1995/ J. Wilkinson, Jerusalem as Jesus knew it : Archaeology as Evidence, London, Thames and Hudson, 1978/ Y. Yadin ed., Jerusalem Revealed Archaeology in the Holy City 1968~1974, Jerusalem,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76. 〔金 聲〕
예루살렘
[히]יְרוּשָׁלַיִם, ירושלם · [그]Ἰερουσαλήμ, Ἱερουσαλήμ · [라]Hierosolyma, Jerusalem · [영]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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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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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