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사 료
[비그리스도교계 사료] 타치투스 : 역사가 타치투스 (P.C. Tacitus, 56~120)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에서,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14~39)가 로마 제국을 다 스릴 때 빌라도(Pontius Pilatus)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15권 44장 2절). 이 단락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54~68)가 로마 시내를 불지르자 시민들이 폭 동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 화범으로 지목하고 4년 동안(64~68)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사법 절차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라고 지시하였다. 네로 박해 때 베드로와 바 오로도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대기》 단락은 이렇 다. "네로는 자신에 대한 소문에 종지부를 찍고자 방화 범들을 조작하고 극형으로 다스리게 했다. 이들은 온갖 추행을 저질러 미움을 산 사람들인데, 민중은 이들을 그 리스도인들(Chrestiani로 誤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
이란 명칭은, 티베리우스 치세 때 폰시우스 빌라도 총독 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한다."
플리니우스 2세 : 로마 제국의 속주인 비티니아(지금 의 터키 이즈미트 지역)의 총독으로 재직하던 플리니우스 2 세(Plinius Secundus, 61/62~113)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 제(98~117)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인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 답변을 요청하였다. 이 서간 가운데서 중요한 단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들의 죄 악 또는 잘못이라야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일정한 날 밝기 전에 관례적으로 모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마치 신을 위하듯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찬 송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이런 일들이 끝나면 그들 의 관습에 따라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모여 음식을 드 는데, 이는 해롭지 않은 보통 음식입니다"(《서간집》 10권 96신 7항).
이 글의 내용인즉,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은 일 요일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모여 미사를 드렸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헤어졌다가 점심때 또는 저녁때 다시 모여 함께 아가페(agape, 愛餐)를 가졌다는 것이다.
수에토니우스 : 플리니우스 2세의 친구이자 뛰어난 전 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 69?~122?)는 120년경 에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를 썼는데, 그 가운
데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사실을 다음과 같 이 적었다. "황제는 그리스도(크레스투스로 誤記)의 사주 로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 했다"(《황제들의 생애》 5권 25장 4절). 수에토니우스는 그 리스도가 로마에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사주한 것으로 착각했다. 로마에서 분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사실 유대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 라와 브리스킬라가 이때 로마에서 쫓겨난 다음 고린토에 정착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했는데, 마침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에 전교하러 와서는 이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은 일을 했다(사도 18, 1-3).
요세푸스 :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 때 갈릴래아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 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 는 로마로 가서 시민권을 얻고 연금을 받아 살면서 그리 스어로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 · 《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 《자서전》(Vita) · 《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유대 고대사》 총 20권은 90년 경에 쓴 것으로서, 천지 창조부터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발발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대작인데, 이 가운데 이른바 그리스도라는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가 62년 대제관 아난(그리스어로 아나노스)의 명으로 돌을 맞아 순 교했다는 토막 기사가 있다(20권 200항=9장 1절).
바빌론 탈무드 : 바빌론 탈무드(Babylon Talmud)는 메 소포타미아에 살던 유대교 율법 학자들이 6세기 말엽에 편찬한 법전인데, 그 가운데 산헤드린 43a에 예수의 죽 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을 부정 하는 견해가 있으나(J. Maier, J. Gnilka) 여기에는 소중한 전승이 들어 있다. "과월절 전날 저녁때 예수를 매달았 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성밖 으로 끌려가서 돌을 맞아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 술을 부리고이스라엘을 현혹하고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 다. 그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라.' 그 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때 그 를 매달았다."
[그리스도교계 사료]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 사료는 신약성서이다. 그중에서도 예수의 언행을 비교적 충실히 담고 있는 공관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고, 예수의 정체와 행적에 대한 명상을 적은 요한 복음서가 그 다음으로 중 요하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차츰 기록되었다. 구전 과정과 기록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구전 과정-전승사 : 신약 학계에서는 구전 과정을 전 승사라고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일정한 양식(樣 式)을 지니고 구전되었다.
① 말씀 양식 :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 번째는 '비유' 이다. 그런데 본래의 비유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한 가지이다. 본래의 비유가 특수 비 유 또는 우화로 변질되는 수도 있다. 공관 복음서에는 비 유가 약 35개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인 '은유' 는 상징 적 표현이 들어 있는 간결한 비유이다. 세 번째로 '단구' 短句, logion)는 우리말로 '토막 말씀' 이다. 전혀 발설 배경 없이 전해 오는 짤막한 말씀이다. 속담과 매우 유사 한데, 세분하면 잠언 · 예언 · '나 말씀' · 유행어 등으로 나뉜다.
② 사화 양식 : 예수의 행적을 이야기로 전할 때 일정 한 양식이 있었다. 우선 '단화' (短話)는 단구와는 달리 발설 상황이 명시된 말씀이다. 흔히 상황 묘사 다음에 말 씀이 달려 있다. 그래서 상황어라 해도 좋다. '논쟁' 은 예수의 상대가 적의를 품고 예수의 처신이나 말씀에 반 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예수가 항상 이긴다. '대담' 은 논 쟁과 유사하지만, 상대가 예수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 고 오히려 슬쩍 떠보거나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적 사화' 는 쉽게 말해서 기적 이야기인데, 세분하면 치유 이적 사화 · 구마 이적 사화(=축귀 이적 사화) · 소생 이적 사화 · 자연 이적 사화로 나뉜다. 네 복음서에는 치 유 이적 사화 14편 · 구마 이적 사화 5편 · 소생 이적 사 화 3편 · 자연 이적 사화 8편이 수록되어 있다. '발현 사 화' 는 하느님 · 천사 · 부활한 그리스도가 모습을 드러냈 다는 이야기이다. 예수 부활 발현 사화가 돋보인다. '수 난 사화' 가운데에서 마르코 복음서 14-15장에 수록된
예수 수난 이야기는 일찍이 예루살렘 교우들이 길게 엮 은 가장 일관된 이야기이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의 수난 사화를 옮겨 썼다. 반면, 요한 복음 서의 수난 사화는 요한계 교회에 따로 구전되던 것을 요 한 복음사가가 채록한 것이다.
기록 과정-편집사 :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예수 어록(Q) :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를 비 교해 보면 순서와 낱말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두 복음사가가 70년경에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를 제각 기 구해서 베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가가 마 르코 복음서를 베끼지 않은 단락인데도 순서와 낱말이 일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 그럴까? 두 복음사가가 또 다른 문헌을 제각기 구해서 베꼈기 때문이다. 이 문헌 의 존재에 대해 홀츠만(H.J. Holtzman, 1832~1910)이 <공 관 복음서>(Die synoptischen Evangelien. Ihr Ursprung und ge- schichlicher Charakter, 1863)란 논문에서 확증했다. 그래서 독일 신약학계는 이 문헌을 Q( '원천' 을 뜻하는 독일어 Quelle의 약자)라고 이름지었다. 예수에 관한 사료들 가운 데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료라는 생각에 서 지은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예수 어록' , 또는 줄여서 '어록' 이라고 한다. 시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50~60년경 그분의 말씀 70여 편을 모아 예수 어록을 펴냈다고 여겨진다. 마태오와 루가 복 음서가 같이 이용한 사료는 마르코 복음서와 '어록' 이라 는 학설을 이출전설(二出典說)이라고 한다. 이 주장이 처음에는 가설이었지만 지금은 정설이다.
어록의 형태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사화는 두 편뿐이고(루가 7, 1b-10=마태 8, 5-10. 13 : 루가 11, 14- 15. 17-22=마태 12, 22-29) 나머지는 모두 예수의 말씀 이다. '그리스도' 라는 존칭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사 람의 아들' 이라는 존칭은 자주 언급된다. 이 존칭의 용 법을 살펴보면 사람의 아들은 이미 오셨다고도 하고(루 가 7, 34 ; 9, 58 등), 장차 오시리라고도 한다(루가 12, 8. 10. 40 등). 예수 어록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심판 설교 로 시작해서(루가 3, 1-17=마태 3, 1-22), 제자들이 이스 라엘을 심판하리라는 예언으로 끝난다(마태 22, 28-30= 루가 19, 28). 그렇기에 어록 편집자는 종말 임박 신앙에 심취했던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어록에는 예수 수난 사화와 예수 발현 사화가 없다. 두 가지 사화 가 본래부터 쓰여지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에 쓰여졌지 만 관리를 잘못해서 떨어져 나간 것일까? 이 문제는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어록의 순서 와 낱말을 많이 고친 반면, 루가 복음사가는 어록의 순서 와 낱말을 비교적 잘 보존했다. 그래서 어록을 복구할 때 루가 복음서를 따르는 게 관행이다.
② 공관 복음서 : 예수 어록은 예수의 말씀 모음집인 데 비해, 말씀뿐 아니라 예수의 행적을 이야기로 엮은 사 화까지 기록한 작품을 복음서라고 한다. 70년 전후해서 어느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 를 펴낸 것이 마르코 복음서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선재(先在)나 그의 사생활을 거론하지 않는다. 아울러 빈 무덤 사화로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부활한 그 리스도의 발현 사화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특색이다.
아마도 시리아에 살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80~90년경에 마태오 복음서를 펴냈을 것이다. 그는 마 르코 복음서와 예수 어록을 인용하면서 가감 · 수정을 하 였다. 말하자면 자기 교회의 실정에 맞게끔 예수의 언행 을 재해석했던 것이다. 아울러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교회에 구전되던 예수 전승들을 부지런히 채록했다. 이 를 일컬어 마태오의 고유 사료(약자 SM)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어느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루가 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집필하였다. 그는 루가 복음서를 쓸 때 마르코 복 음서와 예수 어록을 부지런히 인용하면서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 가감 · 수정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들 입에서 입 으로 전해지던 예수 전승들을 열심히 채록했다. 이를 일 컬어 루가의 고유 사료(약자 SL)라고 한다. 이처럼 사료 와 내용에 있어 서로 관계가 밀접한 마르코 · 마태오 · 루 가 복음서를 합쳐 공관 복음서라 한다.
③ 요한 복음서 : 예수를 가까이서 따른 제자들 가운 데는 열두 제자 외에도 예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애제 자' 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 길이 없고 애제자라는 별 명만 전해 온다. 후대 학자들은 애제자를 열두 제자 가운 데 하나인 요한과 동일시했다. 1세기 말엽에 애제자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의 제자들이 이른바 요한계 문헌 이란 작품집을 남겼다. 애제자의 첫 제자가 요한 복음서 1-20장을 쓴 데 이어, 둘째 제자가 요한 복음서 21장을 가필했다. 또한 셋째 제자(들)이 요한의 편지 1~3편을 썼고, 넷째 제자가 요한 묵시록을 썼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사건의 뜻을 새긴 명상가이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 명상록이다. 그래서 역사적 정보는 비교적 빈약한 편이다. 그의 사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예수를 하느님으로 받들었다는 점이다.
II . 역사의 예수
[개 관] 네 복음사가들은 객관적으로 예수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예 수에 대한 믿음을 적었다. 예수의 말씀과 사화는 그리스 도 신앙으로 심히 윤색되어 있다는 말이다. 역사의 예수 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 만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1950년대까지는 역사의 예 수를 규명하는 일이 불가능할 뿐더러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었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적 모습을 소 홀히 여기고 오직 초월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 강조 하는 신학 사조가 한 세대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역사의 예수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 고, 그 중요성도 인정하는 상황이다.
탄생일 : 디오니시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 470?~ 550?)라는 수사가 525년 로마에서 예수 성탄을 기점으 로 서력을 만들었다. 그는 예수가 로마 건국 754년에 탄 생한 것으로 여겼는데, 계산이 틀렸다. 예수는 헤로데 대
왕 생존시에 탄생하였다(마태 2, 1. 19 ; 루가 1, 5). 그런 데 헤로데가 로마 건국 750년 즉 기원전 4년에 예리고 의 별궁에서 병사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전 4년보다 앞서 탄생하였다. 하지만 정확히 몇 년이나 앞서 탄생하 였는지는 알 수 없다. 흔히 기원전 7~6년경에 탄생하였 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12월 25일도 예수의 진짜 탄생일이 아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후 예수 탄생일을 기념하기 시작했는데, 언제 태어났는지 몰라 당시 로마 시민들이 '불멸의 태양 탄일' 을 경축하던 12월 25일을 예수 성탄으로 정했을 뿐이다.
3세기경 이집트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 215?)의 주장에 따라, 예수가 5월 20일에 태어났다고 여 겼다(《양탄자) 1권 145장 6절). 하지만 동방 교회 대부분은 1월 6일에 예수 성탄을 경축하며,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1월 17일에 예수 성탄을 지낸다.
탄생지 :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의 예수 탄생기 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 남쪽에서 10km 떨어진 베 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마태 2, 1 ; 루가 2. 4). 베들 레헴은 성군으로 추앙받은 이스라엘 제2대 임금 다윗의 고향이다. 그의 후예 가운데서 미래의 성군 메시아가 탄 생하리라고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이 와 관련하여 조상 다윗처럼 그 후예 메시아도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리라는 믿음이 예수 성탄 이전 수백 년 전부 터 내려왔다(미가 5, 1)
역사 비평학계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말하자면 베 들레헴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신앙적 탄생 지이고, 나자렛은 사실을 반영하는 역사적 탄생지라는 것이다. 동방에서 점성가들이 베들레헴을 찾아와서 예수 아기를 경배했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라는 것이다.
가족 사항 : 예수의 어머니는 마리아, 아버지는 요셉 이었다. 예수가 27~30년까지 팔레스티나에서 공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가끔 찾아왔지만, 아버지는 전혀 나 타나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요셉은 일찍 사망한 것 같다. 가족 사항에서 유의할 점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조혼 이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독신으로 지냈다는 사실이다(마태 19, 12).
직업 : 예수는 기술자였다(마르 6, 3). 더 자세히 말해 나무를 다루는 목수 · 돌을 다루는 석수 · 나무와 돌을 다 같이 다루는 건축 기능공이었다. 고향 나자렛에서는 일 거리가 별로 없었겠지만, 기원전 4~20년까지 갈릴래아 의 수도로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세포리스 (Seporis)에는 일감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또한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새 수도 티베리아를 건설할 때(18~20)는 일감이 넘쳤으리라고 여겨진다. 마 태오는 예수의 직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아버지 요셉의 직업이 기술자였다고 전한다(마태 13, 55). 당시 에는 직업이 세습되었기에 예수의 직업이 기술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 수준 : 예수는 회당에서 성서를 읽고(루가 4, 16- 30) 땅바닥에 글을 쓸 정도의(요한 8, 1-11) 초보적 교육 을 받았을 뿐이다(요한 7, 5). 예수가 율법 학자들과 논쟁 한 사실을 근거로, 그가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출가 : 루가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이라고 한다(루가 3, 1). 시리아 지방의 역산법에 따르면 제15년은 서기 27 년 10월 1일부터 28년 9월 30일까지이다. 요한은 유다 지방 요르단 강(마르 1, 9)과 그 동쪽에 있는 베다니아에 서(요한 1, 28),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임박했으 니 서둘러 회개하라고 설교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몰 려갔는데, 예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른 이들은 세례를 받은 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는 잠시 동안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했다가(요한 3, 22), 곧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엄청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와 같은 결단을 내렸다. 이 체험에 대해 세례 사화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즉시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보 시니,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 신에게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 라' " (마르 1, 10-11). 예수는 세례 때 천지가 상통하고 하 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기운이 당신에게 내리는 시각 체 험, 당신 자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한 아들이라는 청각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예수의 출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 머니와 형제들은 출가한 예수를 정신 병자로 여기고 강 제로 귀가시키려고 찾아온 적도 있다(마르 3, 20-21. 31-
35). 이 단화(短話) 끝에 나오는 예수의 반응은 매우 의 미 심장하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 고 나서, 당신 주변의 청중들을 가리키면서 "보시오,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 는 사람이야말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핏줄을 나눈 혈연 가족을 버리고 당신 이 천명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신앙 가족을 택한다 는 말씀이다. 같은 내용의 단화가 루가 복음에 실려 있 다. 어느 부인이 예수의 설교에 감복해서, 저런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복도 많다고 하는 소리에 예수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라고 대꾸하였다(루가 11, 27-28).
활동 지역 :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다음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정확히 갈릴래아 호수변 에서, 더 정확히 호수 북부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호수 북반부 예수님의 활동 지역들을 티베리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꼽으면 다음과 같다. 갈릴래아 영지의 수도인 신도시 티베리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 막달 라, 예수가 배를 타고 와서 뭍에 내린 적이 있는 겐네사 렛 평야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 셨다는 타브가 · 예수님의 활동 근거지 가파르나움 · 가 파르나움 북쪽에 있는 코라진 ·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와 필립보의 고향 베싸이다 · 무덤에 사는 이방인 미치광 이를 고친 게르게사(지금의 Kursi) 등이 예수의 활동 주 무 대였다. 또한 예수는 열두 제자를 양성하고 둘씩 짝지어 이스라엘 각지로 파견하였다.
활동 기간 : 루가에 따르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27. 10. 1~28. 9. 30)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를 받고 출가하였다(루가 3, 1). 그리고 예수는 거의 확실 히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예수 는 두 해 반쯤 공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성전 정화 사 건을 배치하였다(요한 2, 13-22). 그때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는데, 유대인들이 이르기를 "이 성 전을 짓는 데 46년이 걸렸다"고 한다(요한 2. 20). 그 뜻 인즉,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 예루살렘 성전 개축 공사를 시작한 때부터(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5권 380항) 언쟁 때까지 46년째 공사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쟁의 시기는 27~28년경이 된다. 이는 루가 3장 1절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렇기에 예수가 공적으로 활약하는 동안 과월절을 한 차례 지냈다는 공관 복음서 의 기록보다는, 세 차례(요한 2, 13 : 6, 4 : 11, 55) 과월 절을 맞이하였다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
예수는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 예리고에서 병사하 기전에 탄생하였다(마태 2. 1. 19 : 루가 1, 5). 학자들은 예수의 출생 연도를 기원전 7~6년경으로 산정한다. 이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대략 36~37세에 세상을 떠났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 생활을 33년 동안 하였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활동 배경] 정치적 배경 : 기원전 63년 로마군 사령
관 폼페이우스(G. Pompeius, 기원전 106~48)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 이스라엘 남부의 반 사막 지역인 이두메아 출신 이방인인 안티파테르(Antipater)가 로마의 환심을 사서 팔레스타인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기원전 43년 안 티파테르가 암살당하고, 기원전 40년 그의 아들 헤로데 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 이란 칭 호를 받았다. 그는 기원전 37년 로마군의 지원으로 예루 살렘을 점령하고 33년 동안(기원전37~4) 팔레스티나 전 역을 다스렸다. 기원전 4년 과월절을 앞두고 헤로데는 예리고 별장에서 병사했다. 죽기 5일 전에, 그는 친아들 인 왕세자 안티파테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의심해서 처 형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권 661 664항). 헤로데의 아들 셋이 아버지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아르켈라오 (Herod Archelaus, 기원전 4~서기 6)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안티파스(Herod Antipas, 기원전 4~서기 39)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립보(Herod Philip, 기원전 4~서기 34)는 골란 고원 북부 지역을 각각 다스렸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 스 로마 황제(기원전 27~서기 14)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현재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귀 양보내고, 총독을 파견하여 두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폰 시우스 빌라도(26~36)가 제5대 총독으로 재직할 때 예수 는 공적으로 활동하다가 이스라엘 주권을 복원하려 했다 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종교적 배경 : ①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 : 이스라엘 백성의 신심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기원전 20~ 19년부터 대대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한 성전에서는 오 전 · 오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 밖에도 유대 인들이 제물을 가져오면 수시로 속죄의 제사 · 친교제 ·
번제를 드리곤 했다. 매일 오전 · 오후 정기 제사 때에는 "기름에 반죽한 고운 밀가루와 함께 어린 양을 잡아 번 제로 살라 바쳤다(민수 28, 1-8 참조). 한 살짜리 어린 양 을 잡아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몸통은 네 쪽으로 잘라 남김 없이 불에 살라 바쳤다(레위 1, 3-13 참조). ··· 안식일 에는 어린 양을 두 마리 더 바쳤고 고운 밀가루 반죽도 그렇게 했다. 매월 초하룻날(일종의 新月祭)에는 속죄를 위해서 황소 두 마리 · 숫양 한 마리 · 어린 양 일곱 마 리 ·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고 아울러 고운 밀가루와 포 도주도 바쳤다." 예수 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던 사제(제 관)들과 그 보조원 레위들의 숫자를 예레미아스(J. Jere- mias) 교수는 1만 8,000명으로 추산했다. 그들은 십일조 와 성전세와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제들은 24개 조로 나뉘어 한 주간씩 돌아가면서 제사를 바쳤다.
사제들의 우두머리인 대사제와 그 측근 사제들이 귀족 들과 야합하여 사두가이 당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기득 권에 집착한 나머지 평신도 당파인 바리사이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항상 정권과 헬레니즘에 동조하 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 들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구전 부정(《유대 고대사》 13권 297항) · 천사의 존재 부정(사도 23, 8) · 영혼 불멸 부정 (《유대 고대사》 18권 16~17항) 등이다. 부활을 부정했다는 설(마르 12, 18-27)과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인정했다는
설도 있다.
예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4월 초순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 낸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이들의 비위를 거슬린 것이 그분 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인 것 같다.
② 율법 중심의 바리사이파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때 '경건자들' (하시딤)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 독립 전 쟁이 성공하여 하스모네 왕조가 세워졌을 때 현실 정치 에 동조한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로 발전했다. 그리고 하스모네 왕조가 대사제직까지 겸직하는 것에 분개해서 사해 서북쪽 쿰란으로 가서 묵시 문학적 영성을 추구한 이들이 에쎄네파가 되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요한 히르카 누스 1세(기원전 134~104) 치세 때 사두가이파의 적수로 나타난다(《유대 고대사》 13권 288~290항). 알렉산데르 얀 네우스(기원전 103~76) 치세 때는 정권에 저항했고, 그 후계자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 치세 때는 정권과 화해하면서 영향력이 급상승했다. 예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6,000여 명이었으리라고 예레미아스 교수 는 추정했다.
바리사이파들은 성서와 더불어 구전도 중시했다(《유대 고대사》 13권 297항). 이들은 유대인들의 신앙 생활에 도 움을 주고자 즐겨 결의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사도 23, 6-8). 복음서 에 보면 예수는 주로 바리사이파와 논쟁을 하였다. 이는 예수가 그만큼 그들과 어울렸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후 에 발생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논쟁을 소급해서 예수의 입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③ 종말에 집착한 에세네파 : 에세네파의 출현 동기는 이렇다. 시리아 정권을 상대로 이스라엘 독립 운동을 일 으킨 마타티아 제관의 넷째 아들 요나단(기원전 160~ 142)이 독립군 지도자가 된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으 나, 그가 과욕을 부려 152년에 대사제 직분까지 겸직했 다(1마카 10, 21 ; 1Q 하바쿡 주석 8, 1-13). 그로 인해 당 시까지 독립 운동에 가담했던 경건자들 가운데 사제들이 몹시 저항했으며 사독계 사제인 '의로운 스승' 이 이 저 항 운동을 이끌었다. 대사제는 사독 가문에서 배출되는 전통을 요나단이 거스렸다는 것이다. 에세네 중앙 수도 원인 쿰란을 발굴한 드 보(R.G.DeVaux, 1903~1971)에 따 르면, 요나단의 조카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거 느리고 쿰란으로 이주하여 큰 수도원을 세웠다. 기원전 31년 대지진으로 쿰란 수도원이 파괴되자 수도자들은 어디론가 이주했다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 치세 때(기원전 4~서기6) 다시 룸란으로 돌아와서 수도 원을 재건했다. 서기 66년에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 어나고, 로마 진압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8 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4 권 450항). 예리고에서 남쪽으로 불과 13km 떨어진 쿰란 의 수도자들은 서둘러 도서관 장서를 뒷산 11개 동굴에 숨기고 도망치다가 모두 몰살된 것 같다. 그들의 장서가 1947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쿰란
문헌이다.
에세네는 묵시 문학에 빠져서 종말 전쟁 · 종말 잔치를 기대하였다. 이들은 종말에 구원되고자 엄격한 계율을 만들어 정성껏 지켰으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수시로 목욕(洗淨浴)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독신으로 살았다. 적어도 쿰란 수도자들은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동조하는 일반인들은 재산도 소유하고 결혼도 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유포되고 있 다(B. Thiering). 그런가 하면 쿰란 제7 동굴에서 발견된 그 리스 파피루스(7Q5)는 마르코 복음 6장 52-53절과 일치 한다는 주장이 25년 전에 처음으로 제기되더니(J. O'Calla- ghan),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C.P. Thiede · M. d'Ancona, Der Jesus-Papyrus, Miichen, 1996). 그러나 쿰란 문헌 판독 전문 가 푸에슈(E. Puech)는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Welt und Umweltder Bibel, Heft 10, 4. Quartal 1998, p. 44).
④ 독립 투사들의 젤롯당 :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 에서 간혹 '열혈당' 이라고도 하는 젤롯당(Zealot)의 유래 와 활동을 언급하는데, 그 기록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 방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비엔으로 귀양보내고 총독을 임 명하여,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천연 요새 가믈라(지금의 Khirbet es-Salam) 출신 유다가 호구 조사와 납세 거부 운동 을 벌였다. 그가 내세운 기치는 이스라엘 성지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젤롯당의 효시 이다(2권 118 · 433항 ; 7권 253~257항). 유다의 아들들 인 야고보와 시몬도 반로마 운동을 벌이다가 티베리우스 알렉산델 총독(46~48)에게 처형당했다. 그의 후손과 자 객들이 알비누스 총독 때(62~64) 대사제 요나단을 죽였 다(2권 254~257항). 유다의 손자 메나헴은 66년 예루살 렘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다른 독립군 단체에 의해 살 해당했다(7권 253항). 유다의 후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 르는 마사다 천연 요새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다가 74년 해방절에 장열히 순국했다(7권 391~401항). 이상이 요 세푸스가 기술한 젤롯당, 일명 자객당의 유래와 활약상 이다. 젤롯당원들 가운데는 단도로 로마인들과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을 죽이는 극렬 분자들이 있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젤롯당원으로 활약하였던 시몬이 있었다(마르 3, 18).
예수는 민족 독립 운동을 비롯해서 정치 문제에 관심 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마의 군국 정치나 그리스의 민주 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관심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예수는 유산 분배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당시 최대의 사회 문제는 노예 제도였다. 예수나 바오로는 노예 제도 철폐를 거론한 적이 없다. 단지 노예를 학대하지 말고 사 람으로 아껴야 한다고 하셨을 따름이다. 또한 예수는 문 학 · 음악 · 조형 예술에 대해 말씀하신 적도 없다.
⑤ 묵시 문학 사조 : 묵시 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종
교 문학이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로마의 압제 에 시달리던 시대로서,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에 이어 참으로 처참한 시기였다. 묵시 문학자들은 의기 소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주려고 애썼다. 이들은 현실에 절망하고 오직 초현실에 희망을 걸었다. 이들은 세상을 양분하여 '이 세상' 과 '오는 세 상' 으로 나누었다. 이 세상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사 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죄와 악의 소굴이다. 역사는 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중단 없이 퇴보한다. 종말이 가까워 질수록 죄와 악이 늘어난다. 작게는 가정이 파괴되고 나 라는 가뭄 · 홍수 · 기근 · 지진 · 전염병으로 쑥밭이 되며 국가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난다. 마침내 해 · 달 · 별이 빛을 잃고 떨어지는 등 우주적 파국 현상이 일어나서 사 람이 도저히 살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통곡할 때 하느님 또는 그 대리자인 사람의 아들[人子]이 땅에 내려와 선민을 구원하고 만민을 단죄한다. 선민은 새 하 늘 · 새 땅 · 새 예루살렘에서 지복을 누린다. 이것이 묵 시 문학의 큰 줄거리이다.
그렇다면 묵시 문학자들은 어떻게 천지 창조부터 종말 까지의 역사 전체와 종말 사건과 종말 이후의 신세계를 알았을까? 그들은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러 나 그들은 계시나 정보도 없이 단지 상상 · 공상 · 환상 · 망상을 통해 책들을 집필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 을 숨기고 과거 이스라엘 위인들의 이름을 도용했다. 묵 시 문학은 모두 가탁 작품이다.
예수 시대를 전후해서 쓰여진 유대교 묵시 문학 작품 가운데 중요한 작품으로는 《다니엘서》 ·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 라틴어로 전해 오는 《모세의 승천기》와 《제4 에즈라서》 · 시리아어 《바룩서》 등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유대교 묵시 문학 유형을 가장 닮은 작품은 요한 묵시록 이다. 앞에서 소개한 에쎄네파도 묵시 문학에 심취했다.
예수도 묵시 문학적 표현을 더러 사용하였다. 예를 들 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도 묵시 문학에서 따 온 것이다. 그리고 종말 설교(마르 13장 ; 마태 24-25장 ; 루가 17, 20-37 ; 21, 5-36)를 보면 공관 복음서 작가들도 묵시 문학적 표현들을 상당히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예 수나 공관 복음사가들은 결코 묵시 문학에 심취해서 역 사와 종말과 내세를 거론하지 않는다. 예수와 공관 복음 사가들이 묵시 문학과 거리를 둔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 다. 이들이 종말 임박 신념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 말의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날과 그 시간은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마르 13, 32). 사람의 아들이 내려올 장소도 거론하 지 않는다. "마치 번개가 동쪽에서 치면 서쪽까지 빛나 는 것처럼" 온 세계 어디서든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마태 24, 27 ; 루가 17, 24). 종말에 "구원 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는 많 다, 적다고 답변하지 않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뜻으로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라고 말했 을 따름이다(루가 13, 23-24).
[예수의 가르침] 하느님의 나라 : 예수의 설교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마르 1, 15)는 선포이다.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늘 나라' (마태오 복음 에만 32번)는 당시 유행하지 않던 표현인데, 오직 예수만 자주 말하였다(마르코 13번 · 예수 어록 9번 · 마태오의 고유 사료 27번 · 루가의 고유 사료 12번 · 요한 2번).
그렇다면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 를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일까? 첫째, 예수는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사탄이 역사를 지배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사탄과 그 졸개들을 없애고 온 누리의 임금인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나라'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하느님의 종말 왕정(終末王政)이다. 당시 사 람들은 하느님이 종말 왕정을 펴실 때 심판과 구원이란 두 가지 일을 하신다고 보았다. 세례자 요한과 대다수 유 대인들은 무서운 종말 심판을 연상한 데 비해서, 예수는 종말 심판보다는 종말 구원을 강조하셨다. 둘째, 하느님 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것이지만 자신의 행적으로 이 미 실현되고 있다고 예수는 확신하였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 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 20=마태 12, 28).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루가 10, 18). 이 경우 하느님 나라의 미래 적 성격(Weiss, Schweizer)과 현재적 성격(Dodd)을 변증법적 으로 함께 고려해야 한다. 셋째, 예수는 종말 도래 시기 를 정확히 계산하지 않았다(마르 13, 32). 그러나 한 세대 안에 종말이 도래할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다(마르 9, 1 : 13, 30 ; 마태 10, 23) .
이에 대해 해석학적 반성을 시도하면 다음과 같다. 우 선, 기다리던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던 교회가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 는 신앙에 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 는가?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이 예수와 교회의 근본 신 념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둘째, 하느님의 나라가 우주적 차원에서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예수 개인의 차원에서는 하느님이 그분을 부활시킴으로써 온전히 도래했다. 왜냐 하면 부활은 종말 사건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가 예고 한 종말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미래 를 예견하는 데 차질을 빚음으로써 예수도 지능의 유한 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는 것 말고는 인간 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타고났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명 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대제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히브 4, 15). 넷째, 오늘날 우리는 묵시 문학적 종말 임박 사상을 제외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 라는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 8. 16)의 보살피심, 대자 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 리의 행복과 불행, 우리의 삶과 죽음 전부를 보살피신다 고 보는 것이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 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거스르겠습 니까? 그분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오
히려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넘겨주셨는데 어찌 그 아 드님과 더불어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 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이신데 말입니다. 단죄할 자가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더 구나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신데 말입니 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궁핍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 (그것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우 리는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되는 양들같이 다루어졌 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 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주천 사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천사들이나 높이나 깊 이도,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 입니다"(로마 8, 31b-39).
하느님의 뜻 : 예수가 게쎄마니에서 바친 간구는 너무 나 유명하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 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 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 예레미아스와 피츠마이어 (J.A. Fitzmyer)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 들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하느님을 '아빠' 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존하신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불경스 럽다는 것이다. '아빠' 는 아기가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 를 부르는 아기 말[小兒語]이다. 아기가 다 자란 다음에 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감이 듬뿍 담긴 호칭이었다. 간구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의 뜻과 하느 님 아빠의 뜻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쎄 마니에서 간구하실 때 당신은 좀더 살고 싶은데 아빠의 뜻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예수는 자신
의 뜻은 접어 두고 아빠의 거룩한 뜻을 앞세웠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이런 태도를 곰곰이 묵상하여 명언을 빚었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 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 4, 34) .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청중에게 회개를 요구하였다(마르 1, 15). 회개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삶 이다. 예수는 전권 의식(全權意識)을 지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밝히셨다. 율사들은 성서와 전통의 권위에 기대어 계율을 확정했다. "성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 "선대 율사 ~에게서 이렇게 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와는 달리 예수는 성서와 전통에 기대지 않고 전권 의 식을 지니고 말하였다(마르 1, 22. 27). "그러나 나는 여 러분에게 말합니다" 또는 "아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멘”(진실히)으로 말을 시작한 분은 유대교 역 사상 오직 예수뿐이다. 결국 예수의 독창적인 말투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밝힌 단락 세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잘 알려진 대로 율법 학자들은 모세의 이혼 법(신명 24, 1)에 따라 이혼을 쉽게 허락했다. 하지만 예 수는 인류 창조 때로 소급하여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이혼을 반대하였다(마 르 10, 1-9). 예수가 형식상으로는 태초로 소급하여 말하 였지만 그 깊은 뜻은, 남녀는 똑같은 인격체로서 온전히 평등하다는 것이다.
둘째 사례로 안식일 논쟁 단화(論爭短話)가 있다(마르 2, 23-28).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보고 손바닥으로 타작을 했으니 안식일법 을 어겼다고 나무라자, 예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안 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27절). 안식일법은 인류 창조 때는 없었고(창세 1, 26-2, 4), 후에 제정된 것이라는 말씀이 다. 예수는 태초로 소급하여 말하는데 그 깊은 뜻은, 안 식일은 휴식의 필요성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 으라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번안한다면 사람이 법을 지 키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법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창조로 소급하는 시원적 말 씀은 인본주의적 법률관을 밝히는 근원적 말씀이다.
셋째 사례는 산상 설교에 나오는 여섯 가지 대립 명제 (마태 5, 21-48)이다. 예수는 여섯 차례에 걸쳐 구약성서 나 조상들이 전한 전승을 인용하고(命題)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反命題)라고 한다. 구약성서와 조 상들의 전승을 상대화하거나 아예 폐기하는 말씀인데, , 여기에는 예수의 전권 의식이 담겨 있다.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엄두도 못 낼 말씀이다. 그 렇기에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이런 말씀들을 곱씹은 후 다음과 같은 명구를 만들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요한 7, 16). 예수가 613가지의 율법 전부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환원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마르 12, 28-34). 그 런데 예수보다 먼저 활약한 율법 학자 힐렐(Hillel)도 애 주애인(愛主愛人)을 중시했지만, 그렇다고 율법 일체를 애주애인으로 환원시키지는 못했다.
[예수의 행적] 예수의 행적 가운데에서 소외자들에 대 한 관심 · 네 복음서의 이적 사화 · 성전 정화 사화를 차 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 : 예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모으려고 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난한 이들과 굶 주린 이들과 한 맺힌 이들(마태 5, 3-12=루가 6, 20-21), 무식한 이들(마태 11, 25-26=루가 10, 21), 그리고 직업 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마르 2, 14-17 : 루가 15 장 ; 마태 11, 18-19=루가 7, 33-34 : 마태 21, 31-32=루가 7, 29-30 ; 마태 22, 1-10=루가 14, 15-24)을 편애하였다. 또한 당시에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마르 10, 13-16)과 여자들(마르 5, 25-34 ; 7, 24-30 : 12, 41-44 : 14, 3-9 ; 루가 7, 36-50 : 8, 1-3 ; 13, 10-17 ; 18, 1-18 : 요한 4, 1-42 : 7, 53-8, 11)을 가까이하였다. 예수가 여 자들을 존중한 것은, 당시에는 무척 파격적 처신이었다. 예수는 이들 밑바닥 인생을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넘치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 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마태 5, 45),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동 같은 하느님, 잃은 은전 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 같은 하느님, 잃은 아들을 되찾 고 기뻐하는 아버지 같은 하느님(루가 15장), 만 달란트 나 되는 빚을 기꺼이 탕감해 주는 임금님 같은 하느님(마 태 18, 23-35), 해 떨어지기 직전에 단 한 시간 일한 품팔 이에게도 그 가족의 생계를 생각해서 하루치 일당을 주 는 선한 포도원 주인 같은 하느님(마태 20, 1-16)을 의식 했기 때문에 예수는 소외자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다. 예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빠를 깊이 체험하고 맑게 체현하였다.
네 복음서의 이적 사화 : 여기서는 예수가 공생활 동안 행한 구체적인 이적 사화만 살피겠다. 이적 사화 집성문, 그리고 수난 · 부활 사화에 나오는 이적 사화는 다루지 않겠다. 네 복음서의 기적은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심오 한 진리를 가리키는 징표 · 표징이다. 공관 복음서의 경 우 기적은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가리키는 상징 행위이 다(神論的 表徵). 이와 달리 요한 복음서의 기적은 예수님 이 하느님을 알리는 독보적 계시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 행위이다(그리스도論的 表徵). 예수 어록과 네 복음 서에 실린 이적 사화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어록 편집자는 50~60년대에 주로 예수의 말씀 전승 들을 모아 예수 어록을 엮었다. 그는 치유 이적 사화 한 편(마태 8, 5-13=루가 7, 1-10) · 구마 이적 사화 한 편(마 태 12, 22-23 ; 9, 32-34=루가 11, 14)을 채록했다. 이는 어록에 잘 어울리지 않는 예외 현상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치유 이적 사화 8편 · 구마 이적 사 화 4편 · 소생 이적 사화 1편 · 자연 이적 사화 5편 등 1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구마 이적 사화가 돋보인다. 구 마 사화에서 마르코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인 예수가 사탄과 그 졸개들인 마귀들을 제압했다고 한다. 마르코 가 예수의 이적 사화를 18편이나 채록한 것은 그리스 이 적 사화집(aretalogy)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말씀 전승을 소중히 여겨 다섯 곳에 모아 실었다(5-7장 ; 10장 ; 13장 ; 18장 ; 23- 25장). 마태오는 예수의 이적 사화를 그분 말씀의 보조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8-9장에 이적 사화 10편을 모아 실었는데, 그것들을 마태오의 출전인 어록 및 마르코의 이적 사화들과 비교해 보면, 마태오가 확장한 경우도 있 고(마태 8, 5-13과 루가 7, 1-10 비교), 중복한 경우도 있다 (마태 9, 27-31 : 20, 29-34과 마르 10, 46-52/ 마태 9, 32- 34 ; 12, 22-23과 루가 11, 14 비교) 그렇지만 마태오가 마르코 복음의 이적 사화를 축소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마태 8, 1-4과 마르 1, 40-45 : 마태 8, 14-15과 마르 1, 29- 31 ; 마태 8, 28-34과 마르 5, 1-20 : 마태 9, 1-8과 마르 2, 1-12 : 마태 9, 18-26과 마르 5, 21-43 비교). 마태오가 이 적 사화를 옮겨 쓸 때 이야기 부분을 축소하거나 삭제한 반면 예수의 말씀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한 사실로 미루 어, 마태오는 이적 사화 자체보다는 그 의미에 관심을 둔 것이다. 마태오가 고유 전승에서 오직 자연 이적 사화 한 편만 채록한 사실도(17, 24-27) 그가 이적 사화 자체에는 관심이 적었다는 증거이다.
루가는 마르코의 이적 사화 18편 가운데 6편은 삭제 했으나 12편은 옮겨 썼다. 그리고 예수 어록에 실린 이 적 사화 2편도 다 옮겨 썼다. 또한 루가는 고유 전승에서 이적 사화 5편을 채록했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의 이적 4편(사도 3, 1-10 : 5, 1-11 : 9, 32-35. 36-43), 바오로의 이적 5편(사도 13, 8-11 : 14, 8-12 : 16, 16-18 : 20, 9-12 ; 28, 7-8)을 소개한다. 결국 루가는 마르코만 큼 이적 사화에 관심이 많았다. 마태오가 예수의 행적보 다는 말씀을 중히 여긴 반면, 루가는 그 둘을 다 소중히 여겼다(루가 24, 19). 아니, 루가는 말씀보다 예수님의 행 적을 더 강조했다(사도 10, 38).
요한 복음에는 이적 사화 7편이 실려 있다. 요한 복음 사가가 표징 출전이란 책에서 이적 사화 7편을 옮겨 썼 다는 것이 불트만(R. Bultmann, 1884~1976) 이래 신약학계 의 통설이다.
① 치유 이적 사화 : 치유 이적 사화에 명시된 질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마 이적 사화 두 편도 함께 살 펴본다.
복음서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을 보면 상황 묘사 · 기 적적 치유 · 치유 실증 ·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되어 있 다. 이는 그리스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과 닮았다. 그렇 지만 복음서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리스 치유 이적 사화와 다른 점이 복음서 이적 사화 에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환자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마태 17, 20=루가 17, 6 ; 마르 11, 23=마태 21, 21). 예수는 환자가 나으려면 하느님의 능 력으로 치유하는 당신께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형태로 말하였다(마르 1, 40 : 2, 5 : 5, 34 : 7, 29 ; 9, 19 : 10, 47. 52).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불 신한 까닭에 그는 고향에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고 한 다(마르 6, 5). 치유자와 환자 사이에 교감이 있어야만 치
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치유자의 신앙과 환자의 신앙을 다 강조하는 문단도 있다(마르 9, 22-24).
예수는 하느님 아빠의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마르 1, 9-11). 그런 예수가 여러 가지 질병을 고쳤다는 것은 충 분히 납득되는 일이다. 예수는 치유 이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곧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② 구마 이적 사화 : 복음서의 구마 이적 사화는 5편 인데 그 가운데 4편이 마르코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다. 요한 복음서에는 구마 이적 사화가 한 편도 없다. 마르코 는 마치 예수와 사탄이 격전을 벌이는 것처럼 구마 사화 를 서술한다. 예수가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다음 논거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예수 어록, 마르코 · 마태오의 특수 사료, 루가의 특수 사료에 구마에 대한 언급이 두루 나온다. 둘째, 전 승별로 보면 그리스 구마 이적 사화 양식의 영향을 받은 구마 이적 사화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더 오래되고 신빙 성도 더 많은 단구들이 있다. 어록(마태 12, 28=루가 11, 20)에 실린 단구를 루가에 따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셋째,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항에서도 예수의 구마 행적 을 시인했다. "과월절 전날 저녁때 예수를 매달았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성밖으로 끌
려가서 돌을 맞아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부 리고 이스라엘을 현혹하고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 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라.' 그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때 그를 매 달았다."
③ 소생 이적 사화 :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 이야기(마 르 5, 21-24. 35-43), 나인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린 이야 기(루가 7, 11-17), 라자로를 되살린 이야기(요한 11, 1- 53)는 모두 예수 부활을 전제하는 사화들이다. 소생 사 화의 뜻은, 예수가 부활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며, 주님을 믿으면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라자로 소 생 사화에 분명하게 언표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 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 (요한 11, 25).
④ 자연 이적 사화 : 예수는 사람의 병든 몸이나 병든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런데 네 복음서에는 예수가 자연 에 이변을 일으켰다는 일화가 8편 수록되어 있다. 자연 이적 사화를 대할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사실 여부를 묻지 말고 그 이야기가 전하는 근본 취 지를 찾아야 한다. 자연 이적 사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의 구원 능력을 언표하기도 하고, 구약성서에 대한 성찰 을 드러내기도 한다. 풍랑을 가라앉힌 이야기(마르 4, 35- 41), 물위를 걸은 이야기(마르 6, 45-52)는 부활하신 그리 스도의 구원 능력을 드러내는 현현이적(Epiphaniewunder) 이다. 이 현현이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이야기 와 몹시 닮았다. 5,000명을 먹인 이야기(마르 6, 30-44) 와 4,000명을 먹인 이야기(마르 8, 1-10)의 전례가 구약 성서에 있다. 곧, 엘리사 예언자가 보리 떡 20개로 100 명을 먹였다는 이적 사화가 그것이다(2열왕 4, 42-44) . 마르코 이적 사화의 뜻은, 빵 20개로 100명을 먹인 엘 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그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위 대하다는 것이다.
성전 정화 사화 : 예수는 30년 4월 초순에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다. 넓은 이방인 구역(450×300m)에서 소 · 양 · 염소 · 비둘기 등 제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쫓 아내고, 그리스 · 로마 화폐를 이스라엘 전통 세켈로 바 꾸어 주는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었으며, 성전을 가로 질러 지름길로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마르 11, 15-25). 아마도 예수는 기도하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장사로 소란한 성전 분위기에 의분을 금치 못한 것 같다. 아울러 이방인 구역에서 장사를 허락해서 돈벌이를 하는 대사제와 사제장들에게 분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예수가 가야파에게 심문을 받을 때 고발이 있 었다. "우리가 (직접)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손 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 버리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 고 했습니다"는 고발이 있었 지만, 증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서 유효한 증언으 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마르 14, 58-59). 사실 예수 는 친히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적은 없다. 다만,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전 파괴를 예고한 것처럼(미가 3, 12 ; 예레 26, 6. 18) 예수도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였을 따름이다(마르 13, 2 : 루가 19, 44).
[예수 수난사]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 의 뜻을 설파하고 체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예수의 철저한 삶은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 서기 70년경 마르코는 예수의 최후 이야기를 채록하였다(14- 15장).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루살렘 시내 어느 집 이층 방에서 제 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올리브 산 기슭 에 있는 게쎄마니 숲으로 갔다(14, 22-26). 게쎄마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외로이 기도하다 가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밤중 내내 가야파 대 사제의 저택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총독 관저로 압송되어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정오쯤에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요한 19,
14). 곧 이어서 예루살렘 북쪽 성곽 밖에 있는 골고타 형 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오후 세시경에 숨을 거두었 다. 그분의 나이는 대략 36세. 그날 해가 지면서 해방절 겸 안식일이 시작되었기에(요한 18, 28 : 19, 14. 31)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 총독의 허락을 받고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다(14, 32-42) : 예루살렘 성전 동쪽,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게쎄마니에는 올리브 나무 가 무성했고, 올리브 기름을 짜는 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게쎄마니(기름틀)라고 불렀다. 예수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 시고···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 되어 하느님 아빠께 간 절한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느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 라고 불 렀다. "아빠"는 정겨운 호칭이다. 예수가 이 호칭을 사용 한 것은 하느님을 가까운 하느님, 정겨운 하느님으로 느 꼈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그러 기에 죽음의 잔을 거두어 주십사고 전능하신 아빠께 매 달렸던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분명하 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체포되다(14, 43-52) : 예수는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다가 최고 의회에서 보낸 하인들 에게 체포되었다. 피하려고 하였다면 캄캄한 밤이었으니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었을 것이고, 해방절을 맞아 예루 살렘에 순례 온 군중 사이로 쉽게 잠적할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하느님 아빠께 돌려 드 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묵묵히 대사제 저택으로 붙들려 갔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로 달아났고, 베드로는 대사제 저택까지 따라가서 최고 의 회의 심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결국 스승을 부인하고
역시 갈릴래아로 도망쳤다.
가야파의 심문(14, 53-65) : 예수는 30년 4월 6일 목 요일 밤부터 7일 금요일 새벽까지 대사제 가야파의 저택 에서 심문을 받았다. 대사제의 저택 위치는 밝혀지지 않 고 있다. 대사제 측근들은 밤새 예수를 심문한 결과, 하 느님을 모독한 중죄인으로 단정하고, 율법(레위 24, 16 ; 민수 15, 30)에 따라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 렸다. 그러나 총독만이 사형 언도와 집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7일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 총독 관저로 예수를 압송하였다(15, 1).
빌라도 재판(15, 1-15) : 빌라도는 26~36년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서 지중해변 가이사리아에 상 주했다. 그런데 30년 4월 초순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 에 상경하여, 예루살렘 서부 언덕에 있던 헤로데 궁전에 서 정무를 보았다. 마침 예수 사건이 터져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전 중에 예수 사건을 심리하고 정오쯤에 사형 언도를 내렸다(요한 19, 14).
대사제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기면서 고발한 죄목은 신성 모독 죄목이 아니고 정치적인 죄목이었다. 곧 예수 가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유대인의 임금' 으로 자처 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가 정치와는 거리가 먼 분 임을 간파했지만, 최고 의회의 사주로 조작된 민의에 밀 려 사형 언도를 내리고 당일 사형 집행을 명했다.
십자가에 매달리다(15, 21-32) : 4월 7일 정오가 지나 예수는 총독 관저인 헤로데 궁전에서 예루살렘 북쪽 성 곽 밖에 있는 골고타(갈바리아) 형장으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 기운이 떨어져 잘 걷지 못하자 로마군 형리들이 리 비아 키레네 출신 시몬을 징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하였다.
형장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로마 군 인들은 예수를 마취시키려고 포도주에 몰약(아라비아산 향유)을 타서 마시도록 했으나 예수는 끝내 사양하였다. 맑은 정신으로 최후를 마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돌아가시고 묻히다(15, 33-47) : 마르코 복음서에 의 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모국어 인 아람어로 딱 한 말씀만 하였다(15, 34). "엘로이 엘로 이 레마 사박타니" , 즉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만 떼어 놓고 보면 절망적인 절규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시편 구절(22, 2)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시 편 22편은 곤경에 처한 의인이 바치는 간구이다. 그러므 로 예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힘을 다해서 시편 간구를 바치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4월 7일 금요일, 서산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토요일) 겸 과월절(니산 15일)이 시작되므로(요한 19, 31) 아리마 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최고 의회 의원이 서둘러 예수의 장례를 치렀다.
Ⅲ . 신앙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신앙] 서기 30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가 설립된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 을 받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 과 같이 술회했다. "일찍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 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련하셨다"(1 고린 2, 9=이사 64, 3 : 65, 16).
예수 부활 신앙은 실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리스도교 의 핵심 신앙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예수가 세 우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 후에 예루살렘 성밖의 골고타 형장에서 처형되었을 때 그리스도교는 설립되지도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이 처형 된 스승의 발현을 체험하면서 그의 부활을 확신하고, 30 년 5월 말경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 그리스도교 를 설립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 부활 신앙의 종교이다.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 : ① 사도들의 설교 : 예수의 제자들은 30년 5월 말경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한 다음 즉시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을 상대로 설교했 다. 사도 행전에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설교 네 편이 수록 되어 있다(2, 14-39 : 3, 12-26 : 4, 18-20 : 5, 29-32). 그 러나 이는 베드로의 설교를 채록한 것이 아니고 사도 행 전의 필자인 루가 복음사가가 만들어 베드로의 입에 담 은 글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디벨리우스(M. Di- belius, 1883~1947) 교수의 연구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베 드로의 네 설교에 드러나는 기본 구조와 내용은 베드로 가 실제로 행한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설 교 네 편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증언 · 구약 논증 · 회개 촉구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런 구 조이며 내용이기에 베드로도 이런 식으로 설교했으리라 고 본다. 그러므로 루가가 베드로의 설교 네 편을 창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 구조와 내용만은 사실과 맞게 집 필했다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 :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론적 신경을 만들었다. 가장 원초적인 신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죽
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 또는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이다(마르 16, 6 : 사도 3, 15 4, 10 : 5, 30 : 13, 30. 37 ; 1데살 1, 10 ; 갈라 1, 1 ; 1고린 6, 14 : 15, 15 : 2고린 4, 14 : 로마 4, 25 : 7, 4 : 8, 11 : 10, 9 ; 골로 2, 12 : 2디모 2, 8).
세월이 흐르면서 원초적인 신경이 조금씩 확장된다. 그 단적인 예가 고린토 전서 15장 3-5절이다. "그리스도 께서는 성서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 셨으며, 또한 성서 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게 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보였습니다." 이 신경 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과 발현이 포함 되어 있다. 얼핏 보면 네 조항 신경인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 꼽은 원초적 신 경으로 환원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매장은 죽음의 확인 에 지나지 않고, 예수의 발현은 부활의 확증이기 때문이 다. 이 확장된 신경의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스도 께서는 성서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고 한 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풀이로서, 그리스 도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죽으셨으며,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고자 죽으셨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 말씀대 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 자에게 보였습니다"고 한다. 예수 부활 역시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갈릴래아 출신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 이 빈 것을 확인한 날짜(마르 16, 1-8 ; 요한 20, 1-13), 그 들이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을 처음으로 체험한 날짜를 가리킨다(마태 28, 9-10 ; 요한 20, 14-18). 게파와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은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일로서 (마르 14, 28 : 16, 7), 부활 신앙의 근거가 되는 가장 중 요한 발현이었다(1고린 15, 3-5).
사도들의 설교 및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에서는 예 수 부활을 가리킬 때 '일으키다' 라는 의미의 '에게이로' (ἐγείρω) 동사의 능동형 또는 수동형을 사용하였다. 죽음 을 누워 있는 것 또는 잠자는 것으로 여기고, 부활을 일 으키는 것 또는 깨우는 것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그 밖에 도 부활을 가리키는 동사로는 '아니스테미' (ἀνίστημι, 일
으키다 : 사도 2, 24. 32 : 3, 26 : 13, 33. 34 : 17, 31), '아 나스테나이' (ἀναστμαι, 일어서다 : 1데살 4, 14 : 루가 24, 7. 46), '자오' (ζἀω, 살아나다 : 2고린 13, 4 ; 로마 6, 10 : 14, 9 : 묵시 1, 18 : 2, 8)가 나온다.
③ 빈 무덤 사화 :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서기 30년 4월 9일 일요일 새벽에 골고타 근 처에 있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16장 1- 8절과 요한 복음서 20장 1-13절에 수록되어 있다. 예수 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두 가지 이유로 신빙 성이 있다. 첫째, 유대인들은 부활을 시신이 소생하는 것 으로 간주했다(에제 37, 1-14).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에 그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예 수 부활을 도저히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예수 의 무덤이 빈 사실은 유대교인들도 인정했다. 단지, 그리 스도인들이 예수 부활을 주장하려고 예수의 시신을 남몰 래 이장했기 때문에 예수의 무덤이 비게 되었다는 소문 을 1세기의 유대인들은 줄곧 퍼뜨렸다(마태 28, 15 ; 유스 티노, 《트리폰과의 대화》 108, 2).
④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 사화 : 갈릴래아 출신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그 무덤이 빈 것을 목격 했고, 이어서 처음으로 예수 발현을 체험했다고 한다(마 태 28, 9-10 : 요한 20, 14-18). 이는 예수가 당신의 부활 을 여자들에게 알려 준 '사적 인지 발현 사화' (私的認知 發現史話)이다. 1세기 교회는 이 발현 사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 발현 목록(1고린 15, 3-5)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법정에서 여자들의 증언을 청취하지 않던 시기의 이야기라, 그만큼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일 화이다. 만일 조작했다면 예수가 남자들에게 맨 처음 발 현했다고 꾸몄을 것이기 때문이다.
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 사화 : 이 사화는 루가 복음서 말미와 사도 행전 서두의 예수 승천기까지 포함 해서 도합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다(마태 28, 16-20 : 루 가 24, 13-35. 36-49. 50-53 : 사도 1, 6-11 ; 요한 20, 19 23. 24-29 : 21, 1-25). 마르코 복음서 16장 9-20절에도 발현 사화 여러 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마르코 복 음사가가 기록한 것이 아니고 후대 어느 필사가가 마태 오 · 루가 · 요한 복음서와 사도 행전의 발현 사화들을 적 당히 베낀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발현을 간결하게 언급하였다(갈라 1, 16 ; 1고린 9, 1 : 15, 3-8). 이 사화들 에는 '사적 인지 발현 사화' 도 있지만(루가 24, 13-35 ; 요한 20, 24-29), 그 외는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부여하 는 '공적 사명 발현 사화' (公的使命發現史話)이다.
발현 사화와 신앙 고백에서 제자들의 예수 발현 체험 을 기술할 때 사용한 동사는 '보다' 라는 의미의 '호라 오' (ὁράω) 동사의 능동형(마르 16, 7 : 마태 28, 17 ; 요한 20, 18. 20. 25. 29 : 사도 9, 27 : 22, 14 1고린 9, 1) 또는 수동형(사도 9, 17 ; 26, 16 : 1고린 15, 3-8)이 가장 흔하 다. 이 밖에도 '보다' 라는 의미의 '테오레오' (θεωρέω) 동사의 능동형(루가 24, 37. 39), '드러내다' 라는 의미를 지닌 '파네로' (φανερόω) 동사의 능동형(요한 21, 1. 14),
'계시 · 계시하다' 라는 뜻의 '아포칼립시스 · 아포칼립 토 (ἀποκάλυψις, ἀποκαλυψτο)라는 명사와 동사가 두루 사용된다(갈라 1, 12. 16) .
예수 부활 신앙의 유래 : 신약성서에서 드러나는 사도 들의 설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 그리고 예수 부활 에 관한 다양한 사화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 부활 신앙의 유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① 도피 : 예수가 체포되자 제자들은 달아났다(마르 14, 50). 게파는 대제관 저택까지 따라가기는 했으나 그 역시 스승을 배반하고 달아났다(14, 72). 그리고 갈릴래 아로 도망쳤다(마르 14, 28 ; 16, 7 : 참조 : 요한 16, 32).
② 부인들에게 발현 : 30년 4월 9일 일요일 새벽에 부 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마르 16, 1-8), 부인(들)이 예수 발현을 체험했다(요한 20, 14- 18 ; 마태 28, 9-10).
③ 베드로에게 발현 : 예수는 부활한 다음 갈릴래아에 서 우선 게파에게 나타났다(1고린 15, 5a). 요한 복음 21 장 1-23절은 이를 전제하는 발현 사화이다.
④ 열두 제자들에게 발현 : 갈릴래아에서 열두 제자들 에게 나타났다(1고린 15, 5b). 마태오 복음 28장 16-20 절은 이를 전제하는 발현 사화이다.
⑤ 오순절 :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은 극적인 체험을 했다. 사도 행전 2장 1-13절을 보면, 그 들은 무아지경에 이르러(2, 13)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 는 이상한 언어(靈言)로 말을 하였다(2, 4 ; 10, 46 ; 19, 6 ; 1고린 12, 30 : 13, 1). 이어서 제자들은 동족을 상대 로 힘차게 예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⑥ 오순절 이후 발현 : 33년경 바오로가 개종할 때까 지 예수 발현은 계속되었다. "이어서 그분은 한번에 오 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중의 대부 분은 아직도 살아 남아 있지만 몇몇은 잠들었습니다. 이 어서 그분은 야고보에게, 그 다음에는 사도들에게 나타 나셨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배냇병신 같은 나에게도 나타 나셨습니다"(1고린 15, 6-8).
예수 부활 신앙의 의미 :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부활한 예수는 시간을 넘어 영원한 존재로, 공간을 넘어 편재하는 존재로, 생성 소멸 법칙을 넘어 불사불멸 하는 존재로 탈바꿈하였다. 역사적 인물이 초월자가 되 었다. 부활한 예수는 현상적으로는 안 계시지만 신앙상 으로는 언제 어디에나 현존한다. 그는 '없이 계시는 분' 이시다. 요한 복음사가는 부활한 예수를 신령한 분으로 묘사하였다(20, 14-18. 19-23. 24-29). 사도 바오로는 부 활한 예수를 영(靈, πνεῦμα)이라고 했다(1고린 15, 45 : 2 고린 3, 17).
예수를 하느님의 종국적인 계시자로 받드는 그리스도 인이라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자기 자신 을 이해하고 이룩하기 마련이다. 우선, 하느님 사랑과 이 웃 사랑을 오롯이 체현한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할 것 이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는 예수가 강조한 이웃 사랑에 대해 이런 명언 을 남겼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Dilige, et quod vis fac) . 입을 다물어도 사랑으로 하고 말을 해도 사랑으로 하라. 나무라도 사랑으로 나무라고 용서해도 사랑으로 용서하 라. 마음속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려라, 그 뿌리에서는 오직 선만이 싹트리라"(《요한 1서 강론》 7. 8). 사랑에 젖 지 않고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 8. 16)을 만날 수 없으 며, 사랑에 젖지 않고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 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진실과 사랑의 가치를 체현한다 면 보람도 크겠지만 손해보는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박 해라는 극한 상황에서는 예수처럼 목숨을 잃을 수도 있 다. 그렇지만 밑지는 삶, 비참한 죽음이 부활로 이어진다 고 믿는다. 그 옛날 하느님이 예수의 삶을 거두셨듯이 예 수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거두실 것을 믿는 것이 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 어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을 비교 서술하였다(갈라 2, 19-20 ; 필립 3, 10-11 ; 2고린 4, 10-11 : 5, 15 ; 6, 9-10 ; 13, 4 : 로마 6, 4-5 ; 8, 11. 15-17). 바오로의 확신은, 그 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존칭]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받든다. 네 복음사 가는 예수의 언행을 채록하는가 하면, 신약성서 필자들 은 각자 나름대로 부활한 예수를 주제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신약성서 필자들은 교회로부터 그리 스도론적 존칭들을 물려받아 사용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존칭 10개만 골라 설명한다.
메시아, 다윗의 후손 : '기름 부음 받은 자 란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 (מָשִׁיחַ)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그리스 도' (Χριστός)는 신약성서에 529차례나 등장한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 절대 다수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다 윗보다 더 위대한 성군 메시아가 태어나기를 고대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물론, 이스 라엘을 태평성대 종주국으로 만드리라고 기대했다. 그러 면 세계 만민이 이스라엘 선민을 부러워하여 이스라엘로
몰려와서 조공을 바치리라는 꿈을 꾸었다. 수제자인 시 몬 베드로가 예수의 정체에 대해 메시아라고 고백한 적 이 있다(마르 8, 29-31). 이 고백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전해 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수가 메시아란 호칭을 받 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정치적 인물인데, 예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가 수난 · 부활한 다음 사도들을 비롯해서 예루살렘의 신 자들은 그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선포했다. 정치적 차원의 메시아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메시아라는 뜻이다.
아들, 하느님의 아들 :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 (αββα) 라고 부르면서 게쎄마니에서 간구의 기도를 드렸다. 결 국 예수는 하느님의 아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아 의 식을 지녔었다. 또한 예수는 '나의 아버지' 와 '여러분의 아버지' 를 구분하였다. 이로써 예수 자신과 하느님 아빠 와의 관계는 독보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일컬어 아들,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 했다. 예수는 하느님과 가까운 분이라는 뜻이다. 이스 라엘에서는 천사 · 이스라엘 백성 · 백성의 대표자인 임 금 · 의인 등 하느님과 가까운 존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 했다. 그런데 예수가 하느님과 지극히 친밀한 분이시 라는 생각에서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를 일컬어 하느 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르 1, 11 : 9, 7)이라고 하고,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외아들' (요한 1, 14. 18 ; 3, 16. 18)이라고 한다. 이 호칭을 한자 문화권에서는 '성자' (聖子)라고 사용해 왔다.
사람의 아들 : 기원전 200~서기 200년경 사이에 이 스라엘에 유행한 묵시 문학에는 '사람의 아들' [人子]이 라는 초월자가 등장한다(에녹 34-69 : 에즈라 4서 13장 ; 참조 : 다니 7, 13-14). 묵시 문학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 들 은 하늘에 있다가 역사의 종말 때에 세상에 내려와서 하느님을 대리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 선민을 구 원하는 초월자이다.
그런데 네 복음서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사람의 아들' 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사람의 아들은 장차 세상을 심판 하고 선민을 구원하러 오리라고 말하는가 하면, 사람의 아들은 이미 왔다고 말하는 때도 있다. 예수가 말한 '사 람의 아들' 의 유래에 대해 신약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 '사람의 아들' 은 교회에서 예수께 드린 존칭이라 는 설이 강하다(Conzelmamann, Lohse, Votle). 둘째, 예수가 세상 을 심판하고 선민을 구원할 종말 미래의 '사람의 아들' 을 거론하였을 때, 당신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제3자를 염두에 두셨다는 설이 있다(Bultman). 셋째, 예수가 실제 로 현재와 미래의 '사람의 아들' 로 자처했다는 설도 있 다(Schweizer, 김세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여 성부 오른편에 있다 가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리라 고 고대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그리스도상과 묵시 문학의 '사람의 아들' 은 상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에, 그 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아들' 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 했을 것이다.
주님 : 1세기경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이 나면 환성 (ἀλαλαγή)을 질렀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감읍할 때면 "예수는 주님이시다"(Κύριος Ἰησοῦς : 1고린 12, 3 ; 2고린 4, 5 ; 특히 필립 2, 10-11 ; 로마 10, 9)라고 외쳤 다. 황제가 나타나면 "황제가 주님이시다"라고 로마인들 이 외친 것과 닮았다.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인들도 성 만찬 때 모이면 다 함께 입을 모아 "예수는 주님이시다" 고 외쳤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부활한 그리 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환성 "마라나타"(1고린 16, 22) 를 외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님' 은 부활한 그리 스도를 매우 높이는 극존칭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서 하느님을 '주님' 이라고 했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주님이라고 했을 때 그를 하느님으로 추대한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 다음가는 분 으로 받든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서 필자들 가운데서 사 도 바오로, 그리고 루가 복음사가 및 사도 행전 필자가 이 존칭을 애용했다.
구원자 : 로마인들은 황제를 구원자로 받들었는데, 아 마도 그 영향으로 그리스계 교회에서 이 존칭을 예수께 사용한 것 같다. 사용 빈도는 비교적 적어 신약성서에 열 번만 언급된다(루가 2, 11 ; 사도 5, 31 ; 13, 23 ; 요한 4, 42 ; 1디모4, 10 ; 2디모 1, 10 : 디도 1, 3 : 2, 13 : 3, 6 : 1 요한 4, 14).
하느님의 종 : 신약성서에서 오로지 사도 행전에서만 네 차례에 걸쳐(사도 3, 13. 26 : 4, 27. 30) 예수를 '하느 님의 종' (δούλος Θεού)이라고 한다. 예수를 이렇게 명명한 까닭은 예수의 일생이 이사야서(52, 13-53, 12)에 나오 는 '야훼의 종' 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 행 전의 필자는 고난(사도 8, 32-33=70인역 이사 53, 7-8)과 부활(사도 3, 13b=70인역 이사 52, 3)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사도 교부들도 예수를 간혹 '하느님의 종' 이라고 했다 (《디다케》 9, 2-3 ; 10, 2-3 ; 글레멘스 1세의 《고린토 서간》 59, 2-4 ; 《폴리카르포의 순교록》 14, 1 ; 20, 2 : 《바르나바의 편지》 6, 1 ; 9, 2). 사도 교부 이후에는 이 존칭이 사라졌 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받드는 신학적인 경향 때문에 그 분을 '하느님의 종' 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까닭인 것 같다.
마지막 아담 : 사도 바오로는 두 차례에 걸쳐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대비시켜 서술했다 (로마 5, 12-21 ; 1고린 15, 20-22. 45-49). 아담은 창조된 인류의 조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된 인류의 조상이 기 때문에, 각각 보편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으로 빚어졌지만, 둘째 사람 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그 사람이 그렇다 면 흙으로 빚어진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고, 천상에 속 한 그분이 그렇다면 천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 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 이, 장차 우리는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고린 15, 47-49)
대사제 : 히브리서 필자는 11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대 사제라고 한다(2, 17 ; 3, 1 : 4, 14. 15 ; 5, 5. 10 : 6, 20 : 7, 26. 28 : 8, 1 : 9, 11). 대사제인 예수는 죄짓는 일 말 고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신 분이므로 연약한 인 간을 동정하실 줄 아는 분이다(4, 15).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으로 하여 금 온 인류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게 하였다(7, 27 ; 9, 26-28 ; 10, 12). 그런 다음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하늘 나라의 영원한 대사제로 임명되었다(5장 : 6장 ; 10장 ; 7, 21. 24). "이분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 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분은 그들을 위하여 간청하시려고 항상 살아 계십니다" (7, 25).
하느님의 어린 양 : 요한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 양' (ὸ ἀμνὸν τοῦ Θεοῦ)이라고 2번 언급하였다(1, 29. 36).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1, 29)이라고 했으니,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한 대속자라는 뜻이다. 대속자를 일컬어 어린 양이 라고 한 은유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의 어린 양은 '하느님의 종' 에서 비롯되 었다는 주장이 있다. 1세기에 교회 일부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종' 으로 받들었다. 1세기 교회는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 이 많은 이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자 고난 과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도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 고자 고난과 죽임을 당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종' 또는 '어린 양 을 뜻하는 아람어는 '탈러야' (תַלְיָא) 한 단어뿐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종' 이나 '하느님의 어린 양' 이나 아람어로는 같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과월절 어린 양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과월절 전날 사 람들이 성전에서 과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각에 돌아가 셨다(18, 28 : 19, 14. 31 : 참조 : 19, 36). 그래서 과월절 어린 양의 이미지를 예수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유대교의 과월절 어린 양은 출애급 사건을 가리킬 뿐, 전혀 대속죄 사상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그렇 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과월절을 지낼 때면 과월절 어린 양인 예수에게 대속죄 능력을 쉽게 부여할 수 있었을 것 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창립 초기부터 예 수의 죽음을 대속죄적 구원 사건으로 풀이했기 때문이다 (1고린 15, 3-5).
예수는 하느님이다 : 신약성서에서 오직 요한계 문헌 에만 네 차례에 걸쳐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한다(요한 1, 1. 18 : 20, 28 ; 1요한 5, 20). 이 신앙 고백이 니체아 공 의회(325)에서는, 예수는 그 실체(οὐσία)가 하느님 아버 지와 일체이므로(ομοούσιος)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하느 님이라는 교리가 선포되었다.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 회(381)에서는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교의적인 정의를 내 렸다. 또한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예수는 한 위격 (位格) 안에 인성과 신성이란 두 가지 품성을 모두 지닌 까닭에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라는 교의가 발표되었 다. 이러한 세 공의회에서 선포된 삼위 일체 교리와 그리 스도론 교리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이다.
기타 : 위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예수를 하느님의 지 혜(마태 11, 19=루가 7, 35 : 1고린 1. 24. 30 : 2. 7 ; 골로 2. 3), 하느님의 모습(필립 2. 6), 하느님의 모상(골로 1, 15), 하느님 영광의 광채 · 하느님 실체의 표상(히브 1, 13)이라고 한다. 또한 스위스 출신의 원로 신약학자 슈 바이츠(E. Schweizer)는 최근에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비유' 라고 했다. (⇦ 그리스도 ; 성자 ; 신성 ; → 그리스 도론 ; 기적 ; 독생자 ; 메시아 ; 부활 ; 사람의 아들 ; 삼 위 일체 ; 예수 성탄 대축일 ; 예수 승천 ; 하느님의 나라 ; 하느님의 뜻 ; 하느님의 말씀 ; 하느님의 모상 ; 하느님 의 아들 ; 하느님의 어린 양 ; 하느님의 종)
※ 참고문헌 김진호편,《예수 르네상스 ·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 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컨 콜디아사, 1992/ 一, 《복음서의 이적 해석》, 컨콜디아사, 1996/ 김 창락, 《새로운 성서 해석과 해방의 실천》, 한국신학연구소, 1990/ - -,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한국신학연구소, 1997/ 박상래, 《성서 와 그 주변 이야기》, 바오로딸, 1997/ 박태식,《예수와 교회》, 우리신 학연구소, 1999/ 안병 《갈릴래아의 예수 . 예수의 민중 운동》, 한 국신학연구소, 1990/ 유충희, 《예수의 최후 만찬과 교회의 성만찬》, 우리신학연구소, 1999/ 정양모, <예수 수난사 연구>, 《종교 신학 연 구》 9집, 분도출판사, 1996, pp. 321~392/ - 《마태오 복음 이야기》, 성서와 함께, 1999/ -, 《공관 복음서의 비유》, 성서와 함께, 1999/ 정태현, 《놀라운 발견》, 바오로딸, 1996/ 조태연, 《예수 운동 · 그리 스도교 기원의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1996/ 최혜영, 《신약성서의 기도 연구》, 우리신학연구소, 1999/ 황성규, 《예수 운동과 갈리리》, 한국신학연구소, 1995/ 엘벗 놀런, 정한교 역,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분도출판사, 1982/ 보 라이케, 번역실 역, 《신약성서 시대사》, 한국신학연구소, 1986/ 에두아르드 로제, 박창건 역, 《신약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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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그]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 [라]lesus Christus · [영]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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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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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탄생과 성전 봉헌, 이집트로의 피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