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 군 강천면 부평리)에 세워진 신학교. 1887년 3월 서울의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으로 이전되었으며, 1928년에는 대 · 소신학교를 분리하여 운영 하다가,
1942년 2월 16일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교되었다. (역 대 교장] (부엉골 신학교) 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 (1885. 10~1887), (용산 신학교) 초대 리우빌(Liouville, 柳 達榮) 신부(1887. 3~1893. 4), 2대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1893.4~8), 3대 로(Rault, 盧若望) 신부(1893. 8~1897. 5), 4대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1897. 5~ 1900. 9), 5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1900. 9~1939) 6대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1939~1942)
[부엉골 신학교] 1884년 6월 20일 리델(Ridel, 李福 明) 주교가 사망하면서, 블랑(Blanc, 白圭三) 주교가 제7 대 조선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조 선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페낭 (Penang) 신학교의 한국 학생들이 그곳의 기후와 풍토를 이기지 못하고 귀국하는 상황에서 신학교의 설립은 절실 하였다. 이에 블랑 주교는 1885년 10월 28일 원주 부엉 골에 초가 몇 칸을 매입하여 소신학교인 '예수 성심 신 학교' 를 개교하고, 마라발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개교 당시 교수는 마라발 신부 한 사람이었고, 학생은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등 7명이었다. 이후 한문 교사가 보충된 듯하지만, 위치 상 궁벽한 곳에 있었고, 또 시설이 좋지 못한데다가 학생 수도 10명 이내였기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용산 신학교] 이러한 상황에서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게 되자, 블랑 주교는 1887년 3월에 신학교를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여 개교하였다. 개교 직후 학생수는 14명이었고, 리우빌 신 부가 초대 교장을 맡았으며, 마라발 신부와 한문 교사 1 명이 그를 보필하였다. 아울러 1892년 6월에는 기존의 한옥 건물을 헐고 2층의 양옥 교사(校舍)를 새로 건립하 였다.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 등 대 · 소신학교 의 과정을 함께 운영하던 용산 신학교는 1892년부터 본 격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했고, 페낭 신학교의 유학생들도 1892년 7월까지 모두 귀국하여 용산 신학교에 편입하였 다. 이에 1895년에는 강의 과목을 증설하여 교육의 내 실을 기하였고, 이듬해 4월 26일에는 처음으로 3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또 1902년 4월에는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5월에는 동작리에 신학 교의 별장[連碧亭]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11년에는 학생수가 96명으로 증가하자 대신학교 학생들을 위한 건물을 신축하였고, 1912년부터는 한국인 신부들을 대 상으로 라틴어로 된 잡지 《타벨라》(Tabella)를 간행하였 다. 이어 1914년 10월에는 대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 가 설립되자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학생들을 전학시 켰고, 같은 해에 3층의 양옥 교실을 신축하여 건물 부족 문제를 해소하였다. 그리고 1919년 3 · 1 만세 운동 때 에는 일부 신학생이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923년에는 산간 지방에서 오는 학생 들의 기초 교육을 위해 예비반을 개설하였다.
이처럼 개교 이래 꾸준히 성장하던 용산 신학교는 재 정 · 시설 · 교수의 부족 및 불규칙한 신입생의 모집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교구에서는 이러한 문제들 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학교와 소신학교의 분리를 계획했 고, 드디어 1928년 말 소신학교를 혜화동으로 이전하기 로 결정하였다. 대 · 소신학교의 분리 당시, 대신학교의 학생은 34명, 교수는 3명이었다.
새 학제의 실시로 1933년에는 14명의 학생이 소신학 교를 졸업하고 용산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매 년 신입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신학교에 서는 교수 인원을 확충함과 동시에 강의 시간도 교회법 의 규정에 맞게 2년은 철학을, 4년은 신학(교의 신학 · 윤 리 신학)을 배우고, 부수 과목으로 교회법 · 성서 · 교회 사 · 전례 · 프랑스어 등을 모든 학생들이 수강하도록 하 였다.
그러나 용산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 대구 · 덕 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1942년 2월 16일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폐교되었고, 학생들은 베네딕도회에서 운영 하던 덕원 신학교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폐교당 한 용산 신학교는 1945년 2월 23일에 경성천주공교신
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되어 설립 인가를 받 았고, 1947년 4월 30일에는 정식 대학인 성신대학(聖 神大學)으로 승격되었으며, 1959년에는 다시 교명을 가 톨릭대학으로 바꾸어,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오늘 에 이르고 있다. (→ 가톨릭대학교 ; 배론 성 요셉 신학 교 ; 성신중고등학교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崔奭祐, <한국 교회와 한국인 성직 자 양성>, 《가톨릭대학 논문집》 11집, 가톨릭대학교, 1985/ 가톨릭대 학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사 자료집》, 가톨릭대학 출판부, 1991. [편찬실]
예수성심신학교
聖心神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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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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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1910년대 모습(왼쪽)과 1924년의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