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의 회칙 <레지미니 밀리탄티스 에클레시애> (Regimini militantis ec- clesiae)에 의해서 정식으로 설립된 성직 수도회. 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한국 지구는 서울 마포구 신수동 1-1번 지에 있다.
[성 격] 예수회의 기원은 로율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와 6명의 동료들이 1534년 8월 15 일 파리 몽마르트르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행한 서 원에 있다. 그들은 청빈, 정결 및 성지 예루살렘에서 사 도직 활동을 하겠다는 서원을 발하였고, 만약 예루살렘 에 갈 수 없으면 교황의 의향에 따라 어떤 사도직이든지 수행하기로 하였다. 법적인 의미에서 예수회가 탄생한 것은 교황 바오로 3세가 발표한 회칙에 의해서였다. 처 음에는 회원수를 60명으로 제한하였으나 4년 뒤에 해제 되었고, 이냐시오가 죽기 전에 회원수는 이미 1,000명 에 육박하였다.
목적 : 예수회의 목적은 회원 자신의 영혼 구원과 완 성을 도모할 뿐 아니라, 이웃 영혼들의 구원과 완성을 돕 는 데 있다. 예수회의 모든 조직과 생활 양식 및 행정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지향하여 이루어져 있다. 교황 회칙과 이냐시오가 작성한 《영신 수련》(Exercitia Spiritualis)과 예 수회 회헌 그리고 역대 총회에서 제정한 규칙들과 총장 들의 지침, 연학 규정 등은 이 목적을 구체화시킨 문건들 이다.
관리 및 운영 : 예수회의 통치에 있어서 총회가 최고 권위를 가지며, 총회는 교황의 명에 따른다. 총회는 중요 사항에 관하여 영구적인 효력을 갖는 명령을 시행할 수 있고, 회헌의 일부를 개정 또는 폐지하고 회헌에 준하는 교령을 반포할 권한을 갖는 등 입법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는다. 총회는 총장, 부총장, 지역구의 장상, 관구장 및 관구 회의에서 선출된 2명의 대표와 독립 지구 및 지부 의 장상들로 구성된다. 총장을 새로 선출할 때에는 반드 시 총회를 소집하여야 하며, 기타 중요한 사항을 논의하
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열리도록 되어 있다. 1558년부 터 1995년 사이에 34차의 총회가 열렸는데 그중 26회 가 총장의 선출을 위한 소집이었다.
총장은 중앙 집권적 통치 형태를 띠는 예수회 행정의 최고 집행권자로서 예수회 내의 유일한 선출직이며 종신 직이다. 그는 총회에서 선출되며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경 우에 총회는 총장을 해임할 수 있다. 그러나 총회의 총장 해임권은 아직까지 행사된 일이 없다. 총장은 회원의 입 회 및 퇴회, 전체 예수회에 대한 최종 결정권, 모든 장상 들의 선임 및 해임권 등에 걸친 광범위한 권한을 갖는다. 장상들의 임기에 대해서는 규정된 바가 없으나 통상 6년 이다. 총장은 로마에 거주하며, 각 지역과의 긴밀한 연락 으로 세계 전역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에 관한 정보를 얻 는다. 초대 총장은 성 이냐시오이고, 현재 총장인 콜벤바 흐(Peter Hans Kolvenbach, 1983~ )는 제29대 총장이다.
예수회는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서 관구로 분할되어 있 으며, 수개의 관구들이 연합하여 지역구를 형성한다. 2000년 현재 85개의 관구와 6개의 독립 지구가 있으며, 이들은 11개의 지역구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지역 담당 보좌관 제도가 있는데, 이들은 총회에서 선출 된다. 이들은 총장과 함께 거주하면서 지역 내의 문제에 대한 자문을 한다.
회원의 구성 및 양성 과정 : 예수회의 회원은 사제, 수 사, 연학 수사들로 구성된다. 모든 회원들은 입회와 동시 에 수련자로서 2년 간의 수련기를 보내고, 수련을 마칠 때에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영구적인 단순 서원을 공적 으로 발한다. 성직을 지망하는 연학 수사들은 예수회 공 동체에서 수년 간의 지적 및 영적 양성을 받게 된다. 그 기간은 각자의 지적인 배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년 간의 교양 과정을-대학 졸업을 입회 자격으로 요 구하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 아시아, 미국 등지에서는 이 기간을 면제하는 경향이 있음-이수한 뒤에 2~3년 간 철학 공부를 한다. 이어서 1~3년 간에 걸쳐 '리전시' (re- gency)라는 중간 실습기를 갖고(교생, 선교, 사목 실습 등)
신학 공부를 한다. 신학 4년을 마치는 해에 사제 서품을 받고 사목 활동을 하거나 신학 및 일반 학문에 관한 특수 연학을 한다. 사목적 활동을 다소간 한 뒤에 6개월 내지 8개월 동안 제3 수련이라고 하는 최종적인 영적 양성 과 정을 갖고 이어서 최종 서원을 함으로써 모든 양성이 마 무리된다.
최종 서원 때에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3대 장엄 서원 과 함께 교황의 선교 파견에 대하여 온전히 순명하는 제 4 서원을 발한다. 이때에 다섯 가지 서원을 사적으로 하 도록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청빈 서원을 완화시키거나 완화하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으며, 순명에 의해서가 아니면 교회의 직위를 청하지도 받지도 않겠고, 예수회 내에서 직위를 얻으려고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원에 어떤 특전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며 예수회의 생활 양식 을 준수할 의무는 모든 회원이 똑같다. 다만 장엄 서원자 만이 예수회의 총장이나 관구장과 같은 주요 장상직을 맡을 수 있다. 평수사는 입회 후 10년이 지나고 최소 3 개월 동안 제3 수련을 이수한 뒤에 최종 서원을 한다.
특징 : 예수회의 구조는 기존 수도회들을 모방한 것이 많지만 몇 가지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징들 로는, 중앙 집권적 행정 구조, 최종 서원 이전에 수년 간 의 시험 기간 설정, 회원의 등급 구분, 고위 성직자가 되 지 않음, 공동 시간 전례의 의무 폐지, 의무적 · 공적인 고행과 극기 없앰, 고유 수도복 대신 해당 지역의 교구 사제들과 같은 복장 착용, 자매 수녀회 및 재속회가 없는 것 등이다. 창설자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창립 정신에서 순명의 덕이 예수회의 가장 탁월한 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모든 회원들에게 실행의 순명과 의지의 순명 뿐 아니라 장상의 뜻을 헤아려서 능동적으로 순명하는 이해의 순명을 요구하였다. 예수회의 이러한 특징들은 전통적인 수도회의 생활 양식을 사도적 생활 양식에 맞 게 적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회의 사도직은 교육, 선교 등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한 것이라면 영리 사업과 정치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 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 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 A.M.D.G.)라는 예수회 활동 의 기본 정신에 잘 나타나 있다.
영성 :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 뿌리를 둔 예수회의 영성은 현대적인 영성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 그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교회에 대한 충실과 사 랑에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주어진 선교 사명을 즉시 민 첩하게 처리하는 즉응성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 세 상 어디에든지 파견될 용의가 있음을 의미하는 보편성으 로 나타난다. 또한 식별의 감각을 익히고 발휘하여 만사 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하느님을 배제하지 않 는 인본주의를 항상 높이 평가하며 복음 전파자로서 엄 정한 양질의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철저한 양성 과정을 갖 게 한다.
[해산 이전의 예수회 역사(1540~1773)] 예수회는 창 설된 이후 꾸준히 성장하였다. 이냐시오의 말년인 1556
년에 938명의 회원이 있었고, 1565년에 3,500명, 1626년에 15,544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에도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여 1710년에 19,998명에 이르렀고 1749년에는 22,589명(사제는 11,293명)이 되었다.
예수회는 짧은 시간에 큰 명성을 얻었다. 거룩한 생활 과 뛰어난 학식으로 알려진 회원들이 많았고, 특히 신앙 을 전파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냈다. 예수회가 반종교 개 혁을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적 · 영적으로 교 회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독일 남부 지역과 프랑스, 중부 유럽 및 동유럽 지역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종 교 개혁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는데 이때에 얀세니즘 문제 가 새롭게 대두되어 예수회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8 세기 중엽에는 예수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으며, 마침내 해산령이 내려졌다. 이때까지 예 수회의 활동은 대단히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교육 : 설립 초기부터 교육이 예수회의 주요 사도직이 었다. 이는 이냐시오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당대의 교황과 주교들 및 평신도들의 급박한 요청에 부 응하여 사도직 방향을 재조정한 결과였다. 이냐시오의 생애 말년인 1556년경에 양성 과정에 있는 회원들과 평 수사들을 제외한 가용 인원의 4분의 301 46개의 학교에 서 활동하였다. 1579년에는 144개나 되었고, 1626년 에는 444개의 학교와 56개의 신학교 및 44개의 예수회 회원 양성 공동체를 갖게 되었다. 1749년에는 학교가 669개, 신학교가 176개, 예수회 회원 양성 공동체가 61 개에 이르렀다. 학교는 대부분 중고등학교였지만 1749 년에는 대학만도 24개에 이르렀다.
예수회 학교에 적용할 학교 조직과 교육 방법에 관한 통일된 규범이 "연학 지침" (Ratio studiorum, 1599)으로 확 정되었다. 이 지침은 인문학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예 수회 학교에서는 극예술을 진흥시켜 근대의 극장 예술의 발달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학생들은 귀족 자녀에 서부터 가난한 집의 자녀들까지 다양하였고, 보통 수업 료는 받지 않았다. 수업료를 내는 학교는 전체의 4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회 해산 당시 학생수가 얼 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만 명에 이른 때 도 있었다.
사제 양성의 책임도 예수회에 광범위하게 맡겨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551년에 세워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이후 그레고리안 대학교로 불리는 로 마 신학원(Collegio romano)이 유명하다. 이는 최초의 현 대식 신학교로서 그 후에 생기는 신학교의 모델이 되었 다. 이들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종교 개혁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교육 분야의 명성으로 인하여 예수회 회원들은 '유럽의 선생님' 으로 통하였다.
학문 : 인문 · 자연 과학의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서 학문 진보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신학은 토마스주의를 따르면서도 순수한 사색에 의지하지 않고 성서와 교부학 및 역사적 접근 방법을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프로테 스탄트들, 후에는 안센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은
총, 자유 의지, 예정설에 관하여 도미니코회 등과 몰리나 주의 논쟁을 전개하였다. 16세기 인물로는 교리서를 저 술한 성 가니시오(P. Canisius, 1521~1597), 논객인 벨라르 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수아레스(F. Suárez, 1548~1617), 몰리나주의 논쟁을 주도 한 몰리나(L. de Molina, 1535~1600) 등이 있다. 예수회 회 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윤리 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 로 독립되었다. 해산 이전까지 뛰어난 윤리 학자들을 많 이 배출하였다. 17~18세기 동안 엄격주의와 이완주의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 대부분의 예수회 회원들은 개연 론을 취하였는데, 교회는 지금까지도 이 입장을 가르치 고 있다. 성서와 수덕 신학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교 회사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교부학, 공의회 관련 자 료 및 성인전 등의 출판을 활발하게 하였다. 수학 · 물리 학 · 천문학 등의 자연 과학 연마에도 힘썼으며,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경험 자료들은 지리학 · 언어학 등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목 활동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전에는 그 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던 설교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으며,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방법에 따라 수많 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피정을 지도하여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였다. 성모 신심 운동을 일으켰고, 17세기에는 예수 성심 신심이 예수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수도 공동체들의 재건 쇄신 작업을 맡았으며, 환자들을 돌보 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가지 고 임하였다. 군종 및 교도 사목에도 처음부터 종사하였 다. 프랑스 · 독일 · 스페인 · 포르투갈 · 폴란드 등지에서 는 예수회 회원들이 왕실의 고백 사제를 맡기도 하였다.
영국 · 네덜란드 ·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일부 지방에 서는 가톨릭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를 위해 로마,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신학원을 운영하 여 사제들을 양성하여 파견하였다. 영국에서는 박해로 16~17세기에 약 70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순교하였는 데, 이들 중 캠피언(E. Campion, 1540~1581) 등 26명이 시 성되었다.
선교 : 예수회는 회헌에서 선교회로 규정되었으며, 실 제로 선교 분야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예수회의 성 소는 영혼을 구원할 희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어디에서든지 살 용의를 지닐 것을 요구한다. 이냐시오 는 비신자들의 개종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최초의 동료 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화에 헌신하며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외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교황에게 자신들을 맡기며 교황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 든지 하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냐시오의 말년인 1556년에 이미 아프리카, 아시아 및 북미 대륙에서 예 수회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예수회가 탄생할 당시는 이미 신대륙 발견과 함께 세 계 선교의 권한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가 분점하였 고,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및 아우구스티노회에 의 해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면서 예수회의 선교 활동은 인원과 지역 면에서 선발 수 도회들을 앞지르게 되었다. 1749년에는 예수회 선교사 가 3,276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회원 전체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중앙 집권적이며 기동성이 뛰어난 예수회의 구조는 선교의 요청에 잘 부응하는 것으로 밝 혀졌다. 예수회 회원들은 선교사로서 뛰어난 조직력과 열성, 과감한 자세와 항구성을 보여 주었다. 장거리 여 행, 기후와 생활 조건의 차이, 고독감에서 오는 어려움이 나 원주민의 저항이나 잔혹한 유럽인들의 탐욕에 굴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아프리카의 선교는 이냐시오 당대에 에티오피아에 선 교사들을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모로코와 이집 트, 에티오피아 등 북아프리카 그리고 해안 지방과 콩고 및 마다가스카르 섬에 국한되어 이루어졌다. 예수회 회 원들은 악명 높은 노예 상인들에 대항하여 원주민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아시아의 선교는 소아시아, 근동, 페르시아, 티베트, 실론, 버마, 말레이 반도, 타이, 인도차이나 반도 및 동 인도의 여러 섬들에서 전개되었지만, 주력은 인도, 중국, 일본 및 필리핀에서 활동하였다. 극동 지방에 최초로 도 착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 는 12년 동안 인도와 일본에서 복음화 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그가 세례를 베푼 사람은 3만여 명에 달한다.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바오로 이래 가장 위대한 선교 사 중의 한 사람인 그를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 성인' 으로 선포하였다.
인도에서는 해안 지방뿐 아니라 내륙 안쪽까지 선교 활 동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노빌리(R. de Nobili, 1577~1656) 의 적응주의적인 선교 방법이 알려져 있다. 중국 선교는 1552년 사베리오가 선교를 꿈꾸며 중국 대륙을 바라보 면서 숨을 거둔 지 30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후 2세기 동안 456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대륙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발리냐노(A. Valignano, 1538~1606)와 리치 (M. Ricci, 1552~1610)가 특히 유명한데, 이들은 가톨릭을 중국의 전통과 생활 양식에 맞추려고 함으로써 지성인들 에게 쉽게 다가가고 이들로 하여금 선교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서구의 과학 기술을 통하여 실용 적인 접근을 도운 리치, 살 폰 벨(J.A. Schall von Bell, 1592~ 1666), 페르비스트(F. Verbiest, 1623~1688) 등과 같은 과학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례에서 중국어를 사용하였고 하느님의 이름을 "천주" (天主)라 하였으며 조상들과 공 자를 경배하는 제사를 잠정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로 여긴 다른 수도회와 갈등을 빚어 100년 간의 의례 논쟁 을 불러일으켰으며, 교황청의 제사 금령(1742)으로 일단 락되었다. 의례 논쟁은 중국 정부의 박해와 함께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중국 교회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일본은 사베리오가 직접 선교를 하여 700명 가량의 개종자를 냈다. 1593년까지 일본 선교는 예수회 회원들 이 전담하였다. 1614년까지 계속 발전하여 신자수 30만
명에 선교사는 15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614~1651 년까지의 대박해로 일본 교회는 초토화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처형당하였다. 이때 순교한 예수회 회원만 해도 111명에 이른다. 이후 2세기 동안 일본은 그리스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높은 신자율을 기록하였다. 1551년에 다른 수 도회들에 이어서 예수회가 선교에 참여하였다. 1767년 스페인 식민지령에서 예수회를 추방할 때 필리핀에서 일 하던 예수회 회원은 158명이었고, 그들이 담당하던 신 자수는 전체 신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 명에 이 르렀다.
북남미 대륙에서는 아시아보다 더 많은 선교사들이 활 약하였다. 1749년에는 예수회 선교사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미주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브라질 590명, 스페 인령 2,075명, 프랑스 지역 104명). 브라질에서의 예수회 선교는 1549년 노브레가(Manuel de Nobrega)와 다섯 명 의 동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597년에 선교사수는 120명에 이르렀다. 이들에 의해 주민들과 흑인 노예들 의 개종과 문명 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브라질에서 예수회 회원들은 교육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 다. 브라질의 문화 발전과 국가 성립 과정에서 예수회 회 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브라질의 사도라 불리는 호세 데 안치에타(Jose de Anchieta)와 설교가이며 작가로서 억압받는 이들의 변호자였던 안토니오 비에이 라(Antonio Vieira)가 대표적이다.
스페인령은 브라질을 제외한 전 남미 지역과 중미, 멕 시코, 미국의 남부와 서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페루 (1567)와 멕시코(1572)에 최초의 예수회 선교 지부가 설 정되었다. 여기에서 광활한 지역으로 선교사들이 파견되 었다. 이들은 공동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 것으로 가톨릭 신자인 원주민들의 마을 공동체인 '선 교구' (宣教區, Reduccion)는 잘 알려져 있다. 각 선교구 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건설되며 영적 사회 경제적 · 정 치적 운영에 선교사들이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 목적 은 국내외인들의 착취와 악행으로부터 원주민들을 보호 하고 이들을 개화 개종시키는 데 있다. 선교구는 예수
회 회원들이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 며, 다른 수도회들도 이와 같은 형태 의 마을을 운영하였다. 예수회 회원들 은 100여 개의 선교구를 관할하였다. 특히 현재의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우루과이, 브라질 일부에 걸친 지역을 관할한 파라과이 관구의 선교구가 유 명하다. 이들 중에서도 과라니족들이 살던 30여 개의 선교구들이 잘 알려 져 있는데, 약 150년 동안 이들 인구 의 절반에 해당하는 70만 명에게 세 례성사를 베풀었다.
북미 지역의 선교는 예수회 회원들 의 순교로써 시작되었으며, 2세기 동
안 약 3,500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선교에 참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남으로는 과테말라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는 현재의 미국을 포괄하는 가장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 고 있던 멕시코 관구에 소속되었었다. 1749년에 멕시코 관구에서 활약한 회원은 572명이었는데, 이들은 23개의 학교와 8개의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1591년 선교 활동 을 시작한 이래 다른 선교사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상태 에서 최초의 탐험가이자 문명의 개척자들인 이들에게 세 례를 받은 신자들은 200만 명 정도나 된다. 이들 중에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사는 이들을 옹호하는 일을 한 이들 이 있는데, 흑인 노예들의 사도인 클라베르(St. Pedro Cla- ver, 1580~1654)가 대표적이다. 여기에서도 남미와 같이 원주민들을 조직하여 공동체로 생활하였었다. 1767년에 는 122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100여 개의 선교 지부를 관할하며, 12만 2천여 명의 인디언들을 사목하였다.
[해산과 복구(1773~1814)] 예수회는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에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해산의 비극을 맞았 다. 근본적인 요인은 예수회의 급성장과 높은 명성, 교육 및 학문적인 지위 상승이 교회 내외에서 질시를 불러일 으킨 데에 있다. 예수회 회원들의 활동이 세속의 권력자 들, 교회 내의 경쟁자들과 일으킨 갈등과 논쟁이 어떤 것 인지는 대표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파라 과이의 선교구 문제와 안센주의자들과의 논쟁 및 중국의 의례 문제가 그것이다. 선교구 문제는 원주민들을 사회 경제적 수탈의 대상으로 여긴 세속 권력과 갈등을 일으 켰다. 얀센주의자들과의 논쟁은 윤리 · 신학적인 입장 차 이로 인한 논란이었으며, 중국 의례 문제는 조상 제사의 해석에 얽힌 논쟁으로 1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예수 회 회원들은 조상 제사가 우상 숭배나 미신이 아니라, 인륜 적 덕목인 효의 표현임을 옹호하였다. 예수회의 견해가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 정의와 토착화, 개연주의 등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달 랐다. 윤리적인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는 얀센주의자와 교회 타도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계몽주의 철학자, 백과 전서파, 프리메이슨에 속하는 철학자들과 각국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예수회를 공통의 적으로 삼고 합심 협력 하여 예수회를 제거하는 책략을 진행시켰다.
부분 해산 : 최초의 조치가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포르투갈 국왕은 1759년에 칙령을 반포하 여 국내 및 포르투갈령석민지 내의 모든 예수회 재산을 몰수하고, 예수회 회원들을 추방시키도록 하였다. 이때 추방되거나 투옥된 사람은 1,700여 명에 이른다. 예수 회의 적으로 자처했던 볼테르 (Voltaire, 1694~1778), 루소 (J.J. Rousseau, 1712~1778)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얀 센주의자, 갈리아주의(Gallicanism)의 본산지인 프랑스에 서는 국왕 루이 15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예수회를 불법 단체로 선언하였 다. 그러나 3,500여 명의 예수회원들을 추방시키지는 않았다. 스페인과 스페인령 식민지에서는 1767년 정부 고위 관리가 주축이 되어 예수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5,100여 명의 예수회 회원들을 강제로 추방시켰다.
완전 해산 : 이로 인해 예수회는 절반 정도 파괴되었 다. 부르봉 왕가는 교황청에서 예수회를 결정적으로 해 산시켜 주기를 바랐다.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 는 예수회를 해산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무시하였지만, 그의 후임자인 글레멘스 14세(1769~1774)는 결국 재임 4년째인 1773년에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예수회 가 존립하는 목적인 유익한 봉사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 문에 예수회를 해산한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예수회의 회헌이나 회원 개개인이 교의에 어긋났기 때문은 아니었 다.
예수회는 사형 선고에 해당하는 이 교서를 순명으로 받아들였다. 총장 리치(Lorenzo Ricci)는 1775년에 사망 할 때까지 로마에 감금되었다. 수많은 사제들은 교구 사 제가 되어 사제 직분을 계속 수행하였으며, 독일과 오스 트리아에서는 교육적 · 학문적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고 공동체 생활을 한 경우도 있다. 해산된 동안 프랑스에서 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 순교한 이들 중에 23명은 1927년에 시복되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회 정신을 따르 는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어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복구 : 그러나 예수회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 다. 교황의 교서는 해당 지역에서 공적으로 선포되어야 효력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러시아의 여황제인 카타리나
2세는 러시아 영토 안에서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훌륭한 교사들인 예수회 회원들을 보호하고자 이 교서를 공포하 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예수회 회원들이 합법 적으로 활동하였고, 교황 비오 6세(1775~1799) 및 비오 7세(1800~1823)의 인가를 받아 입회자들을 받아들여 수 련원까지 운영하였다. 예수회가 복구될 당시 러시아의 예수회 회원은 337명이었다. 교황 비오 7세는 1804년 시칠리아 왕국에서 예수회를 법적으로 복구시켰는데, 당 시 회원들은 199명이었다. 그는 이어서 유럽과 영국, 미 국의 예수회를 복구시키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무르익기 를 기다렸다. 마침내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교황이 감금 에서 풀려 나자 예수회를 해산한 교서를 즉시 취소하고 예수회를 완전히 복구하도록 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때가 1814년 8월 7일이었다.
[1814년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역사] 복구 이후 회원 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1814년에 600명이었던 것이 1850년에 4,600명, 1900년에 15,073명이 되었고, 복 구된 지 100년 후에는 27개 관구에 회원수가 16,894명 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황청의 복구 조치 이후에도 예수 회가 박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프랑 스에서는 예수회 회원들을 세 차례 추방하였고, 스페인 에서는 다섯 차례,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에서는 수회에 걸쳐, 벨기에에서는 1816년에,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에 서는 일곱 차례에 걸쳐 추방이 되풀이되었다. 러시아는 1820년에 완전히 추방시켰고, 스위스에서는 1847년 영 구적으로 추방하였다. 20세기 들어 공산화된 국가에서 의 추방까지 포함하면 그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 런 상황에서도 회원수가 꾸준히 늘어서 1964년에는 35,968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하여 제2 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감소되어 2000년 현재 21,354 명이 되었다. 예수회는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서 현재 127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다(인도 3,601명, 미국 3,590명, 스페인 1,808명, 이탈리아 1,276명, 한국 135명). 그 동안 예 수회 회원으로서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은 2000년 12월 현재 복자 134명, 성인 48명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의 예수회 활동에서도 교육 분야는 두드 러진다. 예수회가 해산된 기간에도 러시아 등지에서 13 개의 예수회 학교가 존속하였다. 예수회가 복구된 후에 서서히 학교 교육이 부흥하여 1844년에는 53개, 1914 년에는 234개의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2000년 현재 4,561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교육에 종사하며, 73,750 명의 비예수회 회원들과 협력하여 전세계의 각급 학교에 서 약 158만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로마의 그레 고리안 대학교와 교황청립 성서대학 및 교황청립 동방 교회 연구소는 예수회가 기여하고 있는 사제 양성과 신 학 발전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학문 분야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론적 토대 를 제공하고 견고하게 하는 데 기여한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로너간(Lonergan)이 대표적이다. 또 예수회 의 전통에 따라 천문학 등 자연 과학에 계속 관심을 기울 였는데 바티칸 천문대(Vatican Observatory) 등 전세계에
걸쳐 다수의 자연 과학 연구소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 술 분야에도 적지 않은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과학자 로서 "창조적 진화론"을 주창하여 신학에 큰 영향을 미 친 테이야르 드 샤르뎅(Teillard de Chardin, 1881~1955) 역 시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 교회와 예수회] 예수회 회원으로서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사람은 스페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세스페데스(G. de Céspedes, 1551~1611)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함께 조선 땅을 찾 아와서 종군 신부로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에 이 승훈(李承薰)이 북경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 을 때, 그가 만난 서양 신부는 예수회 회원이었던(당시는 예수회가 해산되었음) 그랑몽(J.J. de Grammont, 1736~1812?) 신부였다. 이승훈은 그때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등 다 수의 서적을 들여와서 자생적인 한국 교회에 영적 자양 분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예수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그보 다 훨씬 뒤인 1954년의 일이었다. 한국 교회는 교황청 에 고등 교육 기관을 한국에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 고,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이를 인가하고 이 사 명을 예수회에 맡겼다. 이 기초 작업을 위해서 1954년 도쿄 죠치(上智) 대학에서 일하던 독일인 게페르트(T. Geppert) 신부가 한국에 와 학교 부지를 매입하는 등 실 질적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총장 얀센(J.B. Jan- ssen) 신부는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 이 임무를 부여하여 미래의 서강대학교의 설립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한편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외국에서 체류하던 4명의 한국인이 예수회에서 자신들의 성소를 발견하고 외국 관 구에 입회하였다. 이들은 김태관(金泰寬, 토비아, 1939), 진성만(陳聖萬, 베드로, 1940), 박고영(朴槁英, 토마스, 1941), 윤양석(尹良碩, 시몬, 1948) 신부들로서 최초의 한국인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안병태(安秉泰, 알퐁소) 신부는 1955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위스콘신 관 구의 수련원에 입회하였다.
위스콘신 관구에서 파견된 첫 신부들은 1955년 6월부 터 일을 시작하였고, 이어 헙스트(C. Herbst) , 프라이스
(B. Price) 신부와 다니엘(M.Daniels) 수사가 들어와 이 일 을 거들었다. 마침내 1960년 4월 18일에 166명의 학생 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서강대학교가 개교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이 많아짐에 따라 대학 내에 사제관을 지어 1962 년에 개원하였다. 이후 서강대학교는 꾸준히 발전하여 2000년 현재 11,07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로 성장하여 지성인 양성을 통한 사회 복음화에 일익을 담 당하고 있다.
한편 광주대교구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대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일을 당시 한국에 진출한 예 수회에 부탁하였다. 1961년 진성만 신부가 광주에 내려 가 신학교 설립 준비를 하였고, 1962년에 정부로부터 대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바쿠버(Andrew Bachhuber) 신부가 대건 신학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고, 1969년 교구로 이양할 때까지 예수회가 광주 신학교를 운영하였 다.
1964년에 한국 회원들을 양성할 수련원을 개원한 데 이어 1966년에는 서강대학교 내에 산업 문제 연구소를 개원하였다. 이는 사회 사도직을 향해 내딛은 첫걸음이 었다. 그 동안 이 연구소에서 9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단 체 교섭과 노동 조합의 조직, 기능에 관한 사항을 교육받 았다. 1968년에는 안병태, 정대권(John Mace) 두 사람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1973년에는 수원 에 피정을 위한 말씀의 집을 개원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하여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 의 한 8일 피정과 한 달 피정을 실시하고 있다. 1976년에 는 평소부터 가난한 이들과 삶을 함께하고자 했던 정일 우(John V. Daily) 신부가 청계천에서 복음자리 성당을 열 었다. 그는 후에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 인천 지역에 이 주 마을인 복음자리를 여는 등 도시 빈민 사도직을 개척 하고 이에 헌신하였다. 1978년에는 서강대학교 옆에 있 는 조그만 건물에서 이냐시오 야학을 시작하였다. 여기 서는 정규 고등학교 과정과 함께 일상에 필요한 여러 가 지 기술을 가르치는데, 2000년 현재 18명의 자원 봉사 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학생수는 30명이다.
1980년에 총장 아루페(Pedro Arrupe) 신부가 이한택
(李漢澤, 요셉) 신부를 예수회 한국 지부의 장상으로 임 명하여 최초의 한국인 장상이 탄생하였다. 1984년에는 수원에 있는 수련원 축복식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1985년 2월 25일 예수회 한국 지부가 독립 지구로 승격되어 위스콘신 관구와 분리되었다. 당시 예수회 회 원들은 사제 32명, 수사 5명, 연학 수사 17명으로 총 54 명이었다. 1988년에 화곡동에 새로 지은 연학 수사 공 동체인 알로이시오의 집을 축성하였다.
1991년에는 도시 빈민 사목을 지향하는 한 몸 공동체 가 성립되어 현재 무악동에서 서울대교구의 선교 본당을 담당하고 있고, 노인들과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인 성모 공동체와 약물 등의 위협에 노출된 청소년들의 공동체를 이끄는 회원, 그리고 농민들과 함께 사는 회원들이 있다. 1993년에는 서강대학교 내에 이냐시오 영성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에 영성적인 기여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1994년에는 서강대학교 부설 수도자 대학원을 설립하여 신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외에도 매스 컴을 통한 복음화 차원에서 이냐시오 영상 연구소를 운 영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난민촌과 중앙 아시아의 강 제 이주 한인들을 위한 선교 요청을 받고 실습 수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의 예수회 회원들간 의 연대와 교류를 넓힘으로써 종교간 대화나 외국인 노 동자 문제에 대처하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2001년 12월 현재 한국에 있는 예수회에는 종신 서원자 121명 (신부는 외국인 8명을 포함하여 68명, 수사는 45명), 수련자 10명이 있다. (→ 가니시오, 베드로 ; 광주 가톨릭대학교 ; 그랑몽, 장-조셉 드 ; 김태관 ; 노빌리, 로베르토 ; 라 너, 칼 ; 리치, 마테오 ; 몰리나주의 ; 발리냐노, 알레산 드로 ; 벨라르미노, 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물로 ; 보호 통치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 살 폰 벨, 요한 아담 ; 서 강대학교 ; 세스페데스, 그레고리오 데 ; 수아레스, 프란 시스코 ; 《영신수련》 ; 《예수회원 서한집》 ; 의례 논쟁 ; 이나시오, 로올라의 ; 일본 천주교회사 ; 죠치 대학 ; 클 라베르, 베드로 ; 페르비스트, 페르디난트)
※ 참고문헌 한국 예수회, 《이냐시오 로블라 자서전》, 분도출판 사, 1996²/ 윤양석 역,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한국천주교중앙 협의회, 19953/ 알랭 기엘무, 김정옥 역,《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예 수회》, 분도출판사, 1981/ 후안 카트레트, 신원식 역, 《예수회 역사》,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994/ 리페르트, 김태관 역, 《예수회의 심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베드로 아루빼, 정한채 역, 《예수회 행동 양식》, 예수회 한국 지구, 1987/ 예수회 한국 지구, 《예수회 제34차 총회 문헌》, 예수회 한국 지구, 1997/ 류해욱 편역,《오늘날 이냐시오 의 영성》,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995/ 예수회 국제 교육 사도직위원 회, 박홍 역,《예수회 교육의 특성》, 성바오로출판사, 1989/ 빈센트 크 로닌, 이기반 역, 《서방에서 온 현자》, 분도출판사, 1989/ 마테오 리 치, 송영배 · 임금자 · 조광 외 역, 《천주실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알베르주, 박금옥 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바오로출 판사, 1996/ Ignacio de Loyola, trans. by G.E. Ganss, The Constitutions of the Society of Jesus, The Institute of Jesuit Sources, Saint Louis, 1970/ Thomas H. Clancy, An Introduction to Jesuit Life, Saint Louis, 1976/ John W. O'Malley, The First Jesuits, The Harvard Univ. Press, 1993/ Jean- Claude Dhotel, La spiritualité ignatienne, Vie Chrétienne, 1991/ Javier Osuna, trans. by Nicholas King, Friends in the Lord, The Way Series, 1974/ Joseph de Guibert, trans. by William J. Young, The Jesuits their Spritual Doctrine and Practice, Saint Louis, 1972. 〔鄭堤天〕
예수회
會
[라]Societatis Iesu · [영]Society of Jesus(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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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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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올라의 이냐시오에게 예수회 설립 허가를 주는 교황 바오로 3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