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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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묶어 농경[耕 耘] · 질병 · 경조사(慶弔事)들을 서로 돕고 치안[出入] 을 함께 유지하도록 한[相保相資] 법.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 전>(戶典) 호적(戶籍) 조에 실려 있는 인보(隣保)를 목 적으로 한 향촌 조직법인 오가작통법은 조선 초기에는 호패법 실시, 조선 중기에는 향약 실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통을 작성하는 문서 방식인 통패식(統牌式)이 호적을 작성하는 데 그대로 적용되었으므로, 기본적으로 는 국가가 호구 조사를 확실하게 하여 인구와 부세를 제 대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떠돌
이 유민(流民)이나 거지[乞丐]들을 구휼하거나 통제한 다는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조선 초기에는 병농 일치(兵農一致)를 근간으로 하는 군대 조직인 오위 제(五衛制) 운영과도 연계되었으므로, 비상시에는 군대 를 모집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오가작통법은 본래 5가를 1비(比)로 하여 비장(比長) 을 두며 20비를 1리(里)로 하여 이정(里正)을 둔 <주례> (周禮)의 비려(比閭) 제도와 춘추 시대 제나라 관중(管 仲, ?~기원전 645)의 연향법(連鄕法)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 당(唐)나라에서 본격 실시한 제도를 모범으로 한 것 이다.
《조선 왕조 실록》을 살펴보면, 건국 초인 1393년(태조 2)과 1412년(태종 12)에 벌써 각각 수군(水軍) 조직과 한성(漢城)의 5부 조직에 5가를 1비로 묶어 관리하자고 건의한 기록이 있다. 또한 1451년(문종 1)에는 중죄인을 알면서도 숨길 경우, 가까운 친척[三切隣]이나 오가인보 (五家隣保)를 맡는 관령(管領)을 범인과 같은 죄로 다스 린다는 연좌법이 한성부에서 수교로 시행되었다. 1466 년(세조 12)에는 오가작통법을 국경 지방인 함경도와 평 안도에 실시하였다. 하지만 전국 8도 전체에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호적은 매 5 가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매 5통을 1리로 하여 이정(里正)을 두며, 면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둔 다고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러나 1490년(성종 21)에도 법전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1526년(중종 21) 한성부에서도 오가작통법이 법 규정대 로 실시되지 않아서, 일단 10가를 하나로 묶는 십가작패 법(十家作牌法)을 시행해 보라는 전교가 내려질 정도였 다.
조선 후기 1675년(숙종 1)에 와서, 윤휴(尹籍)의 건의 를 받아들여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오가통사목>(五 家統事目) 21개 조를 만들게 함으로써 비로소 전국적으 로 실시되었다. 이때는 사대부(士大夫)와 서인(庶人)을 막론하며, 가구(家口)의 다과(多寡)나 재력의 빈부(貧 富)를 막론하고, 집이 들어서 있는 가좌(家坐)에 따라서 통을 만들도록 원칙을 정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특 히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하여 통수(統首)의 관장을 받고, 5~10통을 소리(小里), 11 -20통을 중리(中里) , 21~30통을 대리(大里)로 하여 각각 이정(里正)과 이유 사(里有司)를 1명씩 두도록 하고, 이의 행정은 면에 귀 속시켜서 수령의 감독을 받는 면윤(面尹)의 지휘를 받도 록 하였다. 동시에 오가작통 기록에 빠져 있는 사람은 억 울한 경우를 당해도 재판을 받아 주지 않으며 남에게 살 해되더라도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규정도 만들었다. 유민(流民) 역시 작통은 하지 못하더라도 가 까운 통의 끝[統端]에 기록하도록 하였고, 다른 지방으 로의 이거(移居)는 반드시 관청에서 문서를 발급받아야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피역자(避役者)를 막는 조치를 만 들었다. 곧 오가작통법은 17세기에 와서 이정법(里定 法)의 실시로 인한 면리제(面里制)의 정착과 더불어 명
실공히 실시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자, 1월 10일 당시에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 왕후(貞純王后, 1745~1805)는 "수령은 각기 맡은 지역에서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 내에서 만일 사학(邪學)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역률로 시행하여 조금도 남김이 없도록 하라" 고 하교하였다. 황 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양반 및 중인층을 넘어서 평민 부녀자까지 포함하는 일 반 신자들을 광범위하게 색출하는 목적에 본격적으로 적 용되었다.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丙午迫害) 때에는 "사학이 만연되었으니 오가작통법을 거듭 밝히고 아울 러 연좌시키는 율을 엄중하게 세우" 라는 비변사의 건의 까지 받아들여져서 연좌법까지 본격 적용되었다. 이후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도 천주교 신자 색출에 오가작통법이 적용되었다.
1884년(고종 21)에는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다시 <오 가작통절목>이 마련되었다. 절목 내용은 숙종 때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유민의 경우 반드시 통 내 다른 사람 의 보증이 있어야 기록되도록 조치하였고, 호패법 실시 와 직접 연계시켰다. 1892년(고종 29) 전후에는 동학교 도를 위시한 도적을 막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이 강조되기 도 했고, 1896년 호적 대장 작성에는 십가작패법이 적 용되기도 했다. 곧 전근대 사회의 정부 공권력이 지닌 한 계 때문에, 오가작통법의 실제 적용은 각 시기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 박해)

※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高宗實錄》 《經國大典》 《增補文 獻備考》 《闢衛編》 [朴光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