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표

誤謬表

[라]Syllabus · [영]Sillabus of err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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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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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표.

186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에 의해 회칙 <관타 쿠라>(Quanta Cura) 함께 선포된, 당시의 오 류에 관한 80개의 명제 목록. 정식 명칭은 '우리의 교황 성하이신 비오 9세의 추기경 회의 연설, 회칙과 그 외 교 황 서한에서 주목하신 우리 시대의 주요 오류를 담고 있 는 목록' (Syllabus complectens praecipuos nostrae aetatis errores qui notantur in Allocutionibus consistorialibus, in Encyclicis aliisque apostolicis Litteris sanctissimi Domini Nostri Pii Papae Ⅸ)이다.
[역 사] 오류표의 기원은 후에 레오 13세 교황(1878~ 1903)이 된 페치(V.G.Pecci) 주교가 페루지아의 교구장으 로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849년에 개최 된 스폴레토(Spoleto) 관구 공의회에서 교회 · 권위 · 소유 권 등에 관한 당시의 오류들을 단죄할 것을 교황에게 청 원하였다. 1852년에 잡지 《가톨릭 문화》(Civiltà Cattolica) 는 합리주의(rationalismus)와 반(半)합리주의(semirationalis- mus)에 대한 단죄를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에
대한 칙서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생각이 마음에 들은 비오 9세 교황은 주교들 · 신학 자들 · 저명한 평신도들의 의견을 조사하도록 포르나리 (Fornari) 추기경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는 29가지의 연 구 사항을 담은 목록과 함께 여러 인물에게 조언을 구하 는 편지를 보냈다(1852. 5. 20). 이에 아보가드로(Avoga- dro) 공작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는 특별한 칙서를 요구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현대 오류에 대한 단 죄를 위해서 다른 교황 문헌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 의견을 수용하여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에 대한 칙서 작업을 끝낸 교황청 위원회에 당시의 주요 오류에 대한 특별 조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칸투치(Cantucci) 추기경이 위원장으로 있던 위원회에 카테리니(Caterini)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를 추가하였다. 이 새 위원회는 야코비 니(Iacobini) 몬시놀을 총무로 하고, 델리카티(Pio Deli- cati) · 페라리(Giacinto Ferrari) · 페로네(Giovanni Perrone) 등의 신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1860년 7월 23일 에 프랑스 페르피냥(Perpignan)의 주교 제르베(P. Gerbet) 는 85개의 잘못된 명제를 수록한 《우리 시대의 다양한 오류에 관한 사목 지침서》(Instuction pastorale sur diverses erreurs du temps présent)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위원들은 제르베 주교의 사목 지침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간 추리고 라틴어로 번역하여 70개의 오류표(Syllabus propo- sitionum)를 작성하였다. 카테리니 추기경은 신학자들에 게 각 명제에 신학적 해석을 추가하여 왜 단죄받아야 하 는지 이유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였다(1861. 6. 20). 교황은 이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2명의 자문 위원을 새로 이 임명하였다. 1862년 2월 15일에 위원회는 신학적 각
주가 달린 61개의 오류표(Theses ad Apostolicam Sedem delatae et censurae a nonnullis theologis propositae)를 작성하였 다. 같은 해 6월 일본의 순교자들과 미카엘 데 상티스(Mi- chael de Sanctis)의 시성 때문에 로마에 모인 300여 명의 주교들에게 교황은 이 오류표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였 다. 거의 모든 주교들은, 이 단죄가 시기 적절하며 필요 한 것이라는 응답을 하면서, 신학적 각주에 대한 약간의 변경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 오류표를 공표하지 못했다. 교황에 적대적이었던 토리노의 주간지 《메디아토레》(Mediatore) 가 오류표를 입수하여 게재하였기 때문이다(1862. 10). 교 회에 적대적인 이들은 반교회적 · 반교황적인 운동을 벌 였고, 교황은 이 비난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다 른 형태로 단죄 방법을 간구하였다. 즉 자신이 기존에 발 표한 회칙 · 교황 교서 · 추기경 회의 때 행한 연설 등에 서 당시의 오류에 대해 지적한 내용을 추출하자는 것이 다. 이를 위해 교황은 새 위원회를 임명하였고, 일 년 동 안의 작업 끝에 80개 명제의 오류표가 작성되었다. 교황 은 1864년 12월 8일에 회칙 <관타 쿠라>와 함께 <오류 표>(Syllabus complectens praecipuos nostrae aetatis errores)를 반포하였다.
[내 용] 단죄한 각 오류는 화려한 문체로 장식되지 않 고 스콜라식 형태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성이나 내용의 길고 짧음과 상관없이 10장으로 나누어져 있으 며, 각 명제마다 교황의 문헌에서 발췌한 근거가 제시되 고 있다.
1장(1~7)은 다신론(pantheismus) · 자연주의(natural- smus) · 절대적 합리주의(rationalismus absolutus)를, 2장 (8~14)은 중도적 합리주의(rationalismus moderatus), 3장 (15~18)은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us)와 종교 무관심주 의(ltitudinarismus) , 4장은 사회주의(socialismus) · 공산주 의(communismus) · 비밀 결사(societates clandestinae) · 성 서학회(societates biblicae) · 성직 자유주의 결사(societates clericoliberales)를 단죄하였다. 특히 4장에서는 사회주의 와 공산주의의 가르침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이 두 체 제와 교의나 설립 목적이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그 외 것들에 대해 이미 단죄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5장 (19~38)은 교회와 교회 법령에 관한 오류(Errores de Ecclesia eiusque iuribus), 6장(39~55)은 그 자체나 교회와 의 관계에서 간주된 시민 사회에 대한 오류(Errores de SO cietate civili, tum in se tum in suis ad Ecclesiam relationibus) , 7 장(56~64)은 자연 윤리와 그리스도교 윤리에 관한 오류 (Errores de ethica naturali et christiana), 8장(65~74)은 그리 스도교 혼인에 관한 오류(Errores de matrimonio christiano) 9장(75~76)은 교황의 속권에 관한 오류(Errores de civili romani pontificis principatu) , 10장(77~80)은 오늘날 자유 주의에 관련된 오류(Errores qui ad liberalismum hodiernum referuntur)를 단죄하였다.
[반 응] 반성직주의 경향을 지닌 언론은 오류표에 강 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교황이 근대 정신의 숨통을 조이 면서 중세로 되돌아가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프랑
스의 정의와 종교부 장관(ministre de la Justice et des Cultes) 바로슈(J. Baroche)는 프랑스의 모든 주교들에게 보내는 회람에서 <오류표>와 회칙 <관타 쿠라>를 출판할 수 없 다고 공지하였다(1865. 1.1). 이에 많은 주교들이 직접 공 직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회칙과 오류표 출판 금지에 대 해 강하게 저항하였다. 브장송(Besançon)의 마태오 추기 경과 물랭(Moulins)의 드뢰-브레제(Dreux-Brézé) 주교는 오류표와 회칙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고발당하기도 하 였다. 1865년 1월 26일 오를레앙(Orléans)의 뒤팡루(F.- A.-P. Dupanloup, 1802~1878) 주교는 자격 없는 일반인들에 의해 곡해된 오류표의 진정한 내용을 알리는 소책자(La Convention du 15 septembre et lencyclique du 8 décembre)를 출판하 여, 많은 이들 특별히 주교들과 교황으로부터 환영을 받 았다.
또한 자유주의 경향을 지닌 평신도들과 교황 지상주의 자들은 오류표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전자 그 룹에 속한 이들은 처음에는 혼란에 빠졌으나 뒤팡루 주 교의 소책자가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후로는 용기를 되찾았다. 후자 그룹에 속한 이들은 처음부터 오류표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특히 뵈이요(L. Veuillot, 1813~1883) 는 《자유주의의 환상》(L'illusion liberale)이라는 저서에서 자유주의 경향의 신자들을 비판하면서, 악에 대한 치료 책은 오직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그 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의적 가치] 오류표는 법적 가치 면에서 세 가지 측 면을 갖고 있다. 우선 오류표는 교황 문헌이며 고유한 가 치를 가지고 있는 문헌이다. 또한 보편 교회에 선포한 교 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때문에 무류성을 지닌 문헌, 즉 교황좌에서 선포된 정의(detinitio ex cathedra)인 가 하는 문제가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점이 되었다. 학 자들의 의견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우선 오류표가 무류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
는 이들의 의견으로, 크게 세 형태로 나누어진다.
첫째, 오류표는 교황 개인의 무류성을 지닌 문헌, 즉 교황좌에서 선포된 정의라는 주장이다. 이는 프란젤린 (Franzelin) · 뒤마(Dumas) · 페쉬(Pesch) 등이 주장한 것 으로, 오류표가 무류성을 지닌 문헌이라는 점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진다고 한다. 즉 가톨릭 교회 주교들의 공 통되고 공식적인 동의를 받았고, 회칙 <관타 쿠라>와 함 께 하나의 문헌을 형성하여 회칙이 무류성을 지니는 만 큼 오류표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오류표 자체가 교 황의 최종적인 판결(sentence définitive)임이 충분히 보여 지기 때문에 교황좌에서 선포된 정의의 성격을 모두 지 니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오류표는 교회의 무류성이 보증하기 때문에, 무 류성을 지닌 교의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베더라 크(P. Biederlack)는 주교들의 도덕적 만장 일치(unanimite morale)가 오류표를 교황의 참된 판결이라고 수용하였지 만, 무류성이라는 측면에서 최종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주교들이 일부 신학적 해석에서 수정을 요구했기에 오류표의 모든 명제가 교회의 무류성 을 통해 보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오류표를 구성하고 있는 문헌 자체가 무류성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표 역시 그렇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리날디(Rinaldi)가 내세운 이 주장에 대해, 교황의 서한이 나 추기경 회의에서 행한 연설까지도 교황좌에서 선포된 정의로 변형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오류표에서 교황의 무류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무류성의 근본 조건 중 하 나가 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선포하는 교황의 원의가 충분히 보여져야 하는데, 오류표가 다양한 단계를 거쳐 형성된 것 자체가 이 원의를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고 있 다는 것이다. 또한 교황의 무류성을 담고 있는 문헌이라 면 단죄하는 각 명제가 가톨릭 신앙에 명백히 위배되고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 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과 특별 알현을 한 브리그스(Charles A. Briggs)는 오류표를 무류성 이라는 범주하에서 발표한 것이 아니라는 교황의 개인적 의견을 기술하였다(The Holy Father himself assured me that it did not come undert the category of infallibility. .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교황이 오류표에 대해서는 무류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명백한 결론은 내리기가 어렵 다. 분명한 것은 교황 문헌이고 보편 교회 안에서 권위를 지니는 교의상의 결정이기에 모든 신자들이 이에 존경을 표하고 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실라부스 ; → 비오 9세)
※ 참고문헌  《ASS》 3(1867), pp. 168~176/ Denzinger and Hûnermann, coll. 2901~2980/ L. Brigué, 《DTC》 14-2, pp. 2877~2923/ L. Choupin, (DAFC) 4, pp. 1569~1582/ F.L. Cross . E.A. Livingstone, 《ODCC》, pp. 1565~1566/ P. Hourat, Le Syllabus. Etude Documentaire, Paris/ A. Piolanti, 《EC》 11 1, pp. 578~580.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