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파리 외방전 교회 조선 선교사. 축 일은 9월 20일. 세례 명은 베드로. 한국 성 은 오(吳). 1837년 4 월 8일 프랑스 앙굴렘 (Angoulème) 교구 뤼 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 에서 태어났다. 리슈 몽(Richemont)의 소신 학교와 앙굴렘 대신학 교에서 수학했으며,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 리 외방전교회의 신학
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 된 뒤, 8월 18일에 프랑스를 떠나 1863년 6월 말 임지
인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생활하 던 그는, 얼마 뒤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경 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블뤼 (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內浦) 지방에 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는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오메트르 신부는 수 원의 샘골(泉谷里)에에서 성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 나 박해에 대한 소문으로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사를 중 지하고 3월 9일에 거더리(충남 예산면 고덕면 상궁리)에 있 던 다블뤼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등과 하루를 보낸 다음, 거더리에서 15리 떨어진 '소덜' 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의 수 색이 심해져 다블뤼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계획을 세웠지만 역풍으로 배가 해안을 벗어나지 못하자 다시 떠났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3월 11일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면서, 그는 이튿날 다블뤼 주교가 있던 거더리로 와 자수하였으며, 위앵 신부 역시 쇠재에 서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였다.
이후 세 명의 선교사들은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 송되었으며, 3월 19일에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았다. 오메트르 신부는 신문 중에 결코 다른 사람을 고 변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그는 3월 23일에 군문 효수 (軍門梟首)형을 선고받고 다블뤼 주교 · 위앵 신부 등과 함께 1866년 3월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일명 고마 수 영)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갈매못 백사장에 묻혔다가 5월에 이치문 (힐라리오) 등에 의해 이장되었고, 8~9월에는 다시 남 포 서들골로 옮겨졌다. 그 후 1882년 3월 블랑(Blanc, 白 圭三)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11월에 일본 나가사키 (長崎)로 보내졌으며, 1894년 5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 아와 용산 신학교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00년 9월에 는 종현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967년 10월 절두산 순 교 기념관과 성당이 완공되면서 절두산 지하 성당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 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으며, 1984년 5 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1997년 뤼페크 본당과 서울 발산동 본당은 자매 결연 을 맺고 상호 방문하고 있으며, 2001년 8월에는 앙굴렘 교구장 클로드 다장스(Claude Dagens) 주교와 뤼페크 본 당 미셀 멍귀 신부가 교우들과 함께 14일 간 한국을 방 문한 바 있다.
※ 참고문헌 《右盜盜廳謄錄》 / 《가톨릭 사전》 / 《달레 교회사》 下, pp. 342~343, 425~43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 록》(현대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Adrien Launay, Memorial, Paris, 1916, p. 14/ R. Ducouret, Pierre Aumaitre Marty, 1963. 方相根]
오메트르, 피에르 AumaÏtre, Pierre (183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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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오메트르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