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光州大敎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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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구역과 본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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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구역과 본당 분포도>


전라남도 지역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대교구. 전 주교구, 제주교구와 함께 광주관구를 이룬다. 1931년 3 월 10일 전라북도와 함께 전라 감목 대리구(全羅監牧代 理區)로 설정되었으나 전라북도와 분리되어, 1934년 5 월 10일 전남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1937 년 4월 13일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사목 관할 지역으로 하여 광주 지목구(光州知牧區)로 설정됨과 동시에 성 골 롬반 외방전교회에 사목권이 부여되었다. 이어 1957년 1월 21일 광주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 설정에 따라 광주대교구로 승격되었으며, 1971년 6월 제주 지목구를 분리하였다. 주교좌 본당은 처음에 산정동 본당이었다가(1937-1957), 북동 본당으로 바뀌었고(1957~1983), 다시 임동 본당으 로 바뀌었다(1983~현재). 〔역대 교구장〕 초대 맥폴린 (Owen Mcpolin, 林) 신부(1937.4~1942.2), 2대 와끼다 이 사고로오(脇田淺五郎) 신부(1942. 2~1945.8), 3대 맥폴린 신부(1945. 8~1948), 4대 브렌난(Patrick Brennan, 安) 주교 (1949. 11~1950. 7), 5대 헨리(Harold Henry, 玄海) 대주교 (1954. 10~1971. 7), 6대 한공렬(韓I烈, 베드로) 대주교 (1971. 7~1973. 3), 7대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 (1973. 10~현재). I . 전 사 전라도 지역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한국 교회 창설 당 시로 소급된다. 즉 한국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호남 의 사도로 불리는 유함검(柳恒儉)에 의해 일찍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거듭되는 박해 때마다 많은 순 교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대개 전라북도 지역 에 해당하였고, 전남 지역에서는 천주교 전파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전남의 교우촌은 1827년 곡 성 덕실(현 谷城郡 梧谷面 彌山里)에서 시작된 정해박해(丁 亥迫害)로 거의 폐허화되었다. 이후에도 천주교인에 대 한 핍박이 계속되어 1872년에는 3명의 신자들이 살해되 는 나주 무학당(武學堂, 현 나주국민학교) 사건이 발생하 였다. 또한, 장성군 서이면 탑정리(長城郡 西二面 塔亭 里)에서는 1890년 봄 전남 지역을 담당하였던 베르모렐 (Vermorel, 張若瑟) 신부가 사목 방문을 하고 돌아간 후 선교사 유숙 문제로 발단이 된 신자들과 주민들 간의 시 비가 1891년에 교안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1891년 파리 외방전교회 연보에 의하면 전라도에는 110여 개의 공소가 있었고 신자수는 4,500여 명을 헤아 렸는데,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많은 산야와 섬들로 형성되어 있는 전라남도는 교통이 불편하였고 사목 활동 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그래서 전라북도 지역에 본당과 공소들이 설립되고 선교사들의 전교가 진행되는 동안에 도 전라남도 지역은 선교사들의 큰 관 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뒤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사목 방문 을 계기로 이듬해 목포(현 산정동) 본당 이 전남 지역의 모 교회로 설립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본당을 설립할 만한 교 우 집단이 없었음에도 목포가 신설 본 당의 설립 후보지로 선택된 것은 1898 년으로 예정된 목포의 개항 때문이었다. 목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데예(Deshayes, 曺有道) 신부는 전북 순 창군 쌍치면 아천리(全北 淳昌郡 雙置 面 阿川里) 공소에 머무르며 성당과 사 제관 부지를 물색하여 정한 후 1898년 7월 목포에 정착하였는데, 이때 목포에 는 인천과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40여 명의 신자가 있었을 뿐 이 지역의 신자 들은 한 명도 없었다. 1899년 데예 신부는 목포 산정리 산 을 매입하여 벽돌집 성당을 신축하고 전교에 주력하여 이듬해에는 8개 공소에서 118명의 성인 영세자를 탄생 시켰다.당시 목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오늘의 전남뿐 아 니라 전북의 순창, 정읍, 태인까지도 포함되었다. 한편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우적동(務安郡 夢灘面 沙川里 牛 跡洞)에도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전교로 1899년부터 공소가 시작되었다. 데예 신부의 적극적인 순회 전교는 많은 도서 지방에 도 교우 집단을 형성시켰다. 전남의 섬들은 박해 시대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는데 그들에 의 하여 천주교가 전해지지는 않았고, 데예 신부에 의해 1900년 초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금 납부 등 현실적인 이권과 관련하여 섬 주민들이 집단 입교하 자 신자들과 섬 주민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이 발생하 였고, 1905년과 1906년에는 일진회원(一進會員)과 신 자들의 충돌이 도서 지방과 연안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수는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1909 년에 데예 신부가 목포 본당을 떠난 이후로는 도서 지방 의 전교가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목포 본당에 이어 전남 지역에 설립된 본당은 1908년 계량 본당(桂良本 堂, 현 나주 노안 본당), 1932년 순천 본당(현 순천 저전동 본당), 1933년 5월 광주 본당(현 광주 북동 본당)이 있다. 한편 제주도에는 페네(Peynet, 裴嘉祿) 신부와 김원영 (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전교로 1899년에 제주 본당이, 이듬해에 한논 본당(旌義郡 西烘里 大沓, 현 서 귀포 본당)이 신설되었으나 1901년 신축교난(申丑敎難, 일명 제주교안)이 발생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 다. 이후 제주도 지역은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의 노력으로 1909년 신 성여학교(晨星女學校, 현 신성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 전의 발발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신 부수가 부족하게 되자 이후 제주도의 두 본당은 1924년 까지 목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II . 교구 설정과 정착 1911년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할 · 설정되 자 전남 지역은 대구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고, 1931년 3 월 10일 전라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었으며, 1933년 10 월 전남 지역의 사목을 담당할 골롬반 외방선교회원들이 입국하여, 1934년 5월 10일 전남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 고 골롬반회의 맥폴린 신부가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다. 맥폴린 신부는 골롬반회의 한국 본부를 목포에 두었는 데, 광주가 전남의 도청 소재지였지만 신자들이 많지 않 은 반면 목포에는 당시 전남 교우의 1/4이 있었고, 전남 의 모든 교회들이 목포 본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 다. 1937년 4월 13일 전남 감목 대리구는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광주 지목구로 설정되고 맥폴린 신부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골롬반 외 방선교회에 사목권이 위임되었다. 당시 광주 지목구의 교세는 신자수 3,567명, 본당 9개(목포 · 나주 · 계량 · 광 주 · 순천 · 장성 · 여수 · 제주 · 한논), 공소 36개, 한국인 신 부 3명, 골롬반회 신부 19명이었고, 교구청은 목포 본당 안에 있었다. 교구의 자리매김을 위해 본당을 설립하고 전교에 주력 한 지 5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신설 교구의 성장 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때 맥폴린 교구장 이하 골롬반 회 신부들 모두가 준적성국(準敵性國) 국민이라 하여 일 제(日帝)에 의해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국인 신 부들과 접촉하였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재 석(金在碩, 요셉) ·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 이민두(李 敏斗, 다테오) 신부 등 세 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교구 사 목을 담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1942년 12월에는 일제의 책동에 의해 일본인 와끼다 이사고로오 신부가 제2대 광 주교구장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목포에 있던 교구청을 광주 본당 내로 이전하였으나 교세는 날로 쇠퇴하였다. 1945년 8 · 15 광복과 더불어 와끼다 신부가 교구장 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맥폴린 신부가 다시 제3대 광주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교구청도 다시 목포 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1948년 맥폴린 교구장이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가 광주교구장직을 사임하자, 이듬해 11월 브렌난 신부가 제4대 광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광 주교구의 발전을 꾀하였으나 6 · 25 동란 중 목포 본당 의 쿠삭(Cusack, 高) 신부와 보좌 오브라이언(O'Brian, 吳)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하였다. 이 어 헨리 신부가 교구장 대리로서 광주교구를 이끌어 나 갔는데 해방 후부터 6 · 25 전쟁 중 남동 · 원동 · 경동· 제주 · 신창 · 제주 · 한림 본당 등이 신설되었고, 1953년 에는 목포 산정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와 '평화의 모 후' , 경동 본당에 '죄인의 의탁' 프레시디움이 조직되면 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1954년 10월 헨리 신부가 제5대 광주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그는 전임 브렌난 교구장이 전남의 각 지역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계획한 데 뜻을 함께하여 1954년 무안 · 보성 · 영산포 · 진도 · 해남 본당, 1955년 무안 일로 본당, 1956년 목포 북교동 본당, 1957년 담 양 · 벌교 본당, 1958년 곡성 · 화순 흑산도 · 제주 · 모 슬포 본당등을 신설하였고, 1956년 8월 21일에는 제주 도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제주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였다. 한편 광주교구는 전후(戰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회 경제 개발에 참여하 였는데 1954년 제주도의 이시돌을 개발하기 시작하였 고, 여러 수도회를 초청하여 교육 의료 활동을 전개하 였다. 1955년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가 진출하여 '성 골롬반 병원' 을 개설하고 1967년에 '성 골롬반 간호학 교' (현 성신 간호 전문대학)를 설립하였으며, 1958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가 진출하여 1960년 '천주의 성 요한 의원' 을 개원하였으며, 1969년에는 가 롤로 보로메오 수도회 진출하여 '가롤로 병원' 을 개원하 였다. 또한 살레시오 수도회가 진출하여 1957년 사레지 오 중고등학교 · 성모중학원 · 성모중학교를 설립하였고, 살레시오 수녀회가 진출하여 사레지오 국민학교 · 사레 지오 여자중고등학교를, 사랑의 시튼 수녀회가 성 요셉 금릉 여자중학교와 성 요셉 여고를, 1975년 마리아회가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 1957년 1월 21일 광주 지목구는 대목구로 승격되었 고, 헨리 신부는 대목구장이 되었다. 이어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의 교계 제도 설정과 동시에 대교구로 승 격되었는데 당시의 교세는 본당 31개, 신자수 61,961명 이었다. 대교구로 승격하였지만 광주대교구가 안고 있었 던 사제 부족 현상은 멕시코 과달루페회(Missionhers de Guadalup)의 초청으로 연결되어 1963년 9월부터 여수와 순천 지역 교회에서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시작 되었다. 한편 1962년 대건 신학교(大建神學敎, 현 광주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제 양성 교육의 장을 교구 내에 두게 되었고, 1970년에는 광주 가톨릭 문화관(현 광주 가톨릭 센터)을 개관하였다. 1971년 6월 28일 제주 지목구가 설정되어 광주대교 구에서 분리되고 헨리 대주교가 제주 지목구의 초대 교 구장으로 전임되고, 제6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전주교구 장이던 한공렬 주교가 임명됨으로써 광주대교구는 한국 인 교구장 관할 교구가 되었다. 제주도에 있던 7개 본당 을 제주 지목구로 분리한 1971년 말 광주대교구의 교세 는 42개 본당, 112개 공소, 한국인 신부 28명, 외국인 신부 53명, 그리고 신자수 65,697명이었다.
Ⅲ . 성장과 현재 각 본당에 교구비 책정을 시작하는 등 광주대교구의 자립을 위해 발걸음을 내닫기 시작한 한공렬 주교는 1973년 2월 선종하고, 수원교구장이던 윤공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제7대 광주대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광주대교구는 자립과 발전을 향해 총력을 기울였다. 1976년 신설된 지역 사제 회의는 사목상의 어려움을 함 께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고, 신축 준공된 광주 가톨릭 센터는 광주대교구 가톨릭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지역별 평신도 연수회는 본당과 교구 발전에 신자들의 의견이 수렴되는 모임이 되었다. 한편 전남 지방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동자 · 농민 운 동에 큰 획을 그었던 1976년의 함평 고구마 사건에 교 구 차원의 큰 관심을 쏟음으로써 이후 지역 사회의 고통 에 동참하는 교회의 모습을 구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 다. 또 1980년 5월 18일에 발생한 광주 민중 항쟁은 광 주대교구의 사목 활동에 민중과 함께하는 교구의 자세를 요구하였다. 이에 교구는 5 · 18을 겪은 지역적 특성 안 에서 구속자 석방과 유족 · 부상자 등에 대한 보상과 위 로에 주력하고, 매년 그날을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함으 로써 인권 운동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재다짐하였다. 이 어 1987년 4월 직선제(直選制) 선거를 위해 12명의 교 구 사제가 단식을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은 전국 교구로 확산되어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광주대교구의 의 지와 소망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이와 함께 교구에서 는 1982년부터 사회 정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주제 로 시민 교양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해 말 광주대교구는 신자수 100,000명을 돌파하였다. 1985년 교구민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광주대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를 발족하고, 목포 지역 신자들을 위해 목포 가톨릭 회관을 개관했으며, 청소년 교육장을 설립하였다. 1986년 10월 교구청과 주교관을 신축하여 가톨릭 센터 6층에서 임동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10 월 교구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대교구 50년사》 를 발간하고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88년 2월 강진 · 해남 · 완도 등의 신자들을 위해 중남부 지역 교육 관 및 다산 연구원을 개원하고, 3월 도서 지방이 많은 교 구의 특성을 고려하여 '공소 사목부' 를 신설하였으며, 1992년 5월 우리 농촌 살리기의 일환으로 임동 본당 내 에 자연 유기 농산물 상설 전시관 '되살이' 를개장했다. 1994년 초 현재의 교세는 신자수 222,301명, 본당 76개소, 공소 113개소와, 신부 151명(한국인 124, 외국인 27), 수사 22명(한국인 19, 외국인 3), 수녀 445명(한국인 432, 외국인 13)이며, 병원 2개소, 나환자 정착 마을 7개 소, 장애자 학교 1개교, 유치원 18개소, 국민학교 1개 교, 중고등학교 5개교, 직업 학교 1개교, 대학교 1개교 등이다. 王文明 ※ 참고문헌  천주교 광주대 교구 편, 《광주대교- 50년사》, 빛고 을출판사, 1990/ <광주대교구 교세 통계표>(1937~1993)/ J. Kelly, The Splendid Cause(1933-1983), Columban Fathers, 1984. 〔尹善子〕